Message No. 54.
예수님의 출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
평안, 평화… 앞에서 한번 언급 했지만 한국의 어느 부호가 자기의 일평생 소원은 수면제 먹지 않고 잠 한번 실컷 자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한번이라도 불면증으로 고생해 본 사람은 그 분의 말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환경에서도 사람들은 평안을 원한다. 심지어 전쟁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평안을 원한다. 단 하루, 단 한 순간만이라도 평안하게 살아보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다. 평화는 어디나 있을 것 같은 데 없다. 돈으로도 얻을 수도 없다. 명예나 권력으로도 얻을 수 없다.
인류는 오래 동안 이 평화 없이 살아왔다. 평화가 없었다는 것은 근심이다. 근심은 불행이다.
하나님께서는 평화의 원형체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화의 복음을 전 하사.”(행10:36) 누가복음엔 주님을 평화의 왕으로 호칭했다.
모든 염려나 근심, 걱정거리를 다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보내셨다는 의미다. 명예 속에 들어있는 근심, 권력 속에 들어있는 근심, 부귀 속에 들어있는 근심을 없애면 평화가 숨을 쉰다. 그렇다면 주님은 천하의 모든 영화를 주고도 얻을 수 없는 평화를 어떤 방법으로 주시겠다는 걸까?
평화가 존재하려면 먼저 사망도, 질병도, 두려움도, 미움도, 원망도 없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평화를 갉아먹는 바이러스다. 청결한 곳에서는 서식할 수 없는 바이러스다. 마음을 청결케 하면 된다. 마음을 청결케 하려면 먼저 태초부터 전이되어 온 사망의 독을 제거해야 한다. 그 독이 제거되면 면역력이 높아져서 마음은 자가 청소를 할 능력이 생긴다. 그것이 없어지지 않고는 평안이 있을 수 없다. 생겨도 먹혀버린다.
그리스도는 천상에서 내려온 은혜의 해독제다. 그 분이 몸속에 담고 오신 피는 너무나 맑고 순결하여 인류의 모든 독을 해독할 수 있고 인간의 모든 질고를 치유할 수가 있다.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 살지 못하게 한 모든 질병들을 단번에 치료하여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고 그 분과 일체를 이룰 수 있게 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에 성령의 전을 건설할 수 있다. 사람 마음에 하나님이 밟으실 길을 만들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꽃이 피게 하고 하나님이 아끼실 열매가 열리게 할 수 있다.
주님의 출현은 히브리인 뿐 만 아니라 세계 만방 족속들에게 내리는 평화의 소식이고 사랑의 소식이다. 신성을 회복시켜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와 영적 교류를 개통하시겠다는 은혜로운 메시지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이란 즐겁게 감사함으로 그 분을 메시야라는 해독약으로 믿는 것이고 값없이 인간에게 내린 사랑의 원체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러면 천하 영광으로도 얻을 수 없는 평화를 얻게 된다.
주님은 평화 뿐 아니라 평화를 호위하는 수많은 물자들을 값없이 얻을 수 있는 마법의 보물선, 그 자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롬5:1-2)
은혜에 들어감이란 보물 선에 들어감이다. 그 안에는 없는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보물 선 밖에서 그 보물 선을 구경만 할까?
인간은 너무 오랫동안 사망의 법칙의 노예로 살아왔다. 인간세상의 논리 밖에 있는 우주의 논리, 은혜의 논리들을 이해 할 수가 없다. 완벽한 평화를 누려보지를 못했기에 실감을 하지 못한다. 완벽한 사랑에 대해 무지했다.
화평을 누리는 것은 인간이 할 일이다. 어떤 사람이 사냥꾼의 덫에 걸린 짐승 하나를 풀어 줬다. 덫에서 풀려난 짐승은 멀리 도망가지 않았다. 자유함을 알고 자유를 누리지 않고, 덫에 풀렸어도 풀리지 않은 것처럼 그대로 있었다. 그 짐승은 사냥꾼의 입으로 들어갔다.
인간은 평화를 누려야 한다. 천사가 전한 말을 듣고 믿어야 한다. 평화의 왕이 왔다고 하면 평화의 왕이 온 줄로 믿고, 이제 더 이상 불행은 없다고 하면 불행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가금씩 영화를 보면 감옥에 있던 죄수가 밖으로 나오면 맨 먼저 하늘을 처다 보며 길게 호흡을 들어 마시며 자유를 만끽 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유, 그렇다 자유는 곧 평화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빈곤하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더 이상 누구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
부정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고, 부정적인 모든 족쇄로부터 벗어나서 넓고 청청한 영의 세계를 바라보고 은혜의 삶을 살면 평안하지 않을 수 없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출현은 평화의 출현이다. 평화가 도래 한 것이다. 사망의 독을 품고 침대에 누워 죽어가는 우리를 찾아와 사망의 독을 해독하여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다. 더 이상 나는 독 품은 자가 아니다. 나는 건강하다. 죽음이 나를 떠났으니 나는 영원하다. 나에게는 영생의 생수가 넘쳐난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Message No. 55.
신은 제사를 폐했나?
”또 내가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 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일이 없느니라.“(히 10:17)
에덴을 잃어버린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법은 제사였다. 제사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는 제사를 드리는 쪽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잘못에 대한 댓가를 제물로 대신한다는 의미다. 인류는 이런 제사를 통해 스스로 위로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제사를 신이 기뻐하신다고 믿었다. 어쩌면 신은 그 제사를 통해 필요한 무엇인가를 얻으신다고 믿기도 했다. 그래서 인류는 신에게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물건을 제물로 드렸다. 신이 배가 고플 것 같으면 음식을, 고기를 좋아하실 것 같으면 짐승을, 그리고 피를…… 때로는 태워서 드리고, 때로는 삶아서 드리고, 때로는 구워서 드리고, 때로는 산채로 드리고….. 이렇게 제물을 드렸다.
유대인들도 제사를 드렸다. 벌을 받았을 때도 제사를 드렸고, 책망을 받을 때에도 제사를 드렸고, 심지어 하나님의 독생자를 죽이면서도 제사를 드렸다. 신의 아들을 죽이면서 신께 제사를 드리는 그들이었다. 제사만 드리면 만사가 해결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사 속에 들어 있는 제사의 의미에 대해선 전무했다. 그들은 제사 하나면 신의 모든 노여움을 없앨 수 있다고 믿었고, 비둘기나, 양, 염소, 등이면 신을 매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불의에 대해 두려움이 없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째로 역겨워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만든 후 자신을 숭배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에덴동산에는 제사도 없었고 의식도 없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만날 수 있는 상태였다. 완벽한 자유 상태였다. 하나님과 인간이 직접교류가 이루어진 곳인데 무슨 제사가 필요했겠는가?
창 4장에 처음 제사가 등장한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해서 제사를 드리게 되어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가 않다. 모세가 바로에게 했던 말과 달리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맨 처음 한 일은 거창한 제사가 아니었다. 순종의 행군이었다. 그것이 스루 광야에서 잘 나타난다.
“제사를 지내리라” 고 한 것은 제사에 절여있던 바로가 이해할 수 있는 ‘해석적 언어’로 말한 것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광야생활 40년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다. 왜?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때는 순종이 제사요, 순전한 마음이 수양의 기름보다 더 좋은 제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명분삼아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의식에 동조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이 창안해낸 제사의식을 통해서 매수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 한다. 제사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믿었다. “주는 게 있어야 받는 게 있지” 이는 법칙이다. 조건이 없고 댓가가 없는 것은 진리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것이 양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법칙이다. 하나님 사이에는 적용시킬 수는 없다. 모든 것이 그 분의 것인데 무엇으로 그 분을 기쁘게 할 수 있으며 무엇을 드려 그 분께 유익이 되게 할 것인가? 우리가 드린다고 해 봤자 결국 그 분의 것이 아니겠는가? (마 5:34-35, 이사야 66:1-2,시11:4, 행 17:25. 대상 29:14)
제사는 그분의 것으로 그 분과 거래를 하려하는 인간의 창작물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요 사랑이라고 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다. 기뻐하지도 않으셨다.
그동안 인류는 하나님의 세계와의 영적 교제(communion)를 단절 한 후 노아의 홍수를 일으킬 만큼 타락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인간의 모형에서 짐승이나 악마의 모형으로 그리고 신성에서 악마의 품성으로의 퇴화 혹은 진화를 의미했다. 도덕적 타락 뿐 아니라 정신적 타락, 난잡하고, 추한 성적 타락, 잔악하고 처참한 우상 숭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들의 문란한 성적 타락상이 나타난다. 강간, 간통 근친상간 등등. 그러나 도덕적 타락은 자유의 꽃도 자유의 열매도 아니다. 멸망에 대한 징조일 뿐이다. 이것 역시 역사를 통해 증명된 사실이다.
야곱은 돌베개로 제단을 삼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제물이 사용되지 않는 제사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 축복을 약속했다. 하나님은 야곱의 마음을 받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물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음이 중요하다. “순종이 제사보다 났고.”
성경은 하나님께 선물을 하려고 한다면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제사요, 제물이요, 선물이라고 한다.
행 10장을 보면 고넬로가 등장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돕는 사람이었고 그 자선이 Memorial Offering으로 하나님께 상달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통해 베드로를 만나 구원을 얻는 장면이 나온다.
자선은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이다. 사랑 안에는 제사가 없다는 것을 잘 나타내 준다. 우리가 제사를 드려야 할 제단은 특정 장소가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장소는 가난한 자들이 우굴 거리는 거리와 시장과 감옥이다. 외롭고 병든 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과부와 고아들이 우글거리는 장소고 거리다. 우리는 주님이 지정해 주신 장소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없으면 하나님이 마련해 주실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에서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이 이삭과 산양을 바꿔치기 하게 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필요한 물질은 준비시켜 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정해 놓은 제단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웃을 돌보고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것이 바로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빛과 소금이 되는 방법이라고 말씀 하셨다.
Message No. 56.
헌금은 제물이 될 수 있나?
“He forgives us all our sins, having canceled the written code, with its regulations, that was against us and that stood opposed to us, he took it away, nailing it to the cross. (골 2:13-14)”
주님은 하나님과의 일체를 가르치셨다. 어떻게? 사랑을 통해서다. 수직적인 사랑, 수평적인 사랑을 통해서다.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되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사랑의 전이 된다. 제사가 필요 없다는 의미다.
왜?
죄가 없어서다.
왜 죄가 없는가?
법이 없어서다.
우리 행위를 판단하고, 트집 잡고, 시비하고, 반대하는 모든 법과 율례들이 단체로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렸다, 이제 우리를 판단할 모든 잣대가 없어져버렸다. 그렇다고 악을 행하면 안 된다. (로6:15)
아무리 술을 많이 먹고 운전을 해도 알코올 농도 얼마 이상이면 음주 운전이라고 한 법이 없으면 음주운전으로 걸릴 이유가 없다. 자동차를 200마일로 달려도 속도제한이 없으면 스피드 티켓에서 걱정 끝! 이다. 법도 없고, 죄도 없고, 우리가 안에 계시는 성령과의 일체가 이루어졌는데, 무슨 제사가 필요하겠는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새 계명, 주님의 새 계명을 지키는데 무슨 제사가 필요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내고 있는 헌금, 때론 그것을 마치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혹은 제물이라는 의미로 주입시키고 있는 헌금, 하나님의 은총을 매수하기 위해 내는 헌금,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아예 그만 해버려? 아니면 과잉충성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제사를 드려?
교회는 성령의 전들이 모이는 공동체다. 성령의 전들은 가능하면 자주 만나야 한다. 모두 한 지체요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여러 가지 에너지가 생성된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의 전들의 모임 장소인 것이다. 장소를 유지하려면 유지비가 필요하다.
모든 공동체는 목적이 있다. 초대 교회의 목적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주의 성찬을 지켜 기념하고, 주님의 부활을 즐거워하고 떡을 떼고 (음식), 말씀을 읽고 찬송을 하면서 즐겁게 노는 것이었다. 이런 일을 하려면 공동 자금이 필요했고 이 자금을 형편대로 내는 것이 지금의 헌금이 되었다. 그리고 사도들의 선교활동이나 구제를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돈을 걷기도 했다. 공동체의 운영을 위한 비용이나 공동체 식구들의 생활비를 위해 돈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지체로서 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중요한 사랑의 표현이다. 서신들을 보면 사도들 중 유독 바울이 헌금을 강조했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헌금을 제물의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왜? 그 자신이 모든 율법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법과 규례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면 모든 법과 규례는 십자가로 귀결된다. 십자가의 법도를 지키면 된다. 십자가의 법도와 규례는 용서와 사랑이다. 거기서 평화가 생산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삶 전체를 살아있는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다. 이 말은 주님을 대신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삶을 계승받으라는 뜻이다.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라는 말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는 삶이 바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제물의 삶이라고 했다. 구제를 통해 빛과 소금이 되라는 뜻이다. 구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라는 뜻이다.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내는 돈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의미로 생각하고 있다. 제사는 이미 폐해졌다. 죄가 사라졌으니 제사가 있을 수 없다. 제사가 없으니 제물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주님의 삶을 살아드리는 것이 제사고 제물이다.
우리 자신을 드리기가 아까우니까 돈으로 대신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수법이다. 주님의 마음과 정신으로 사는 것이 주님을 대신 살아드리는 삶이다. 우리의 생을 주께 드려서, 주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 제사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시도록 해 드리고 성령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하시도록 해 드리는 것이 우리가 드리는 제사다. 일단 나를 드릴 테니 마음껏 하고 싶은 것 해 보라고 하는 것이 제물이 되는 방법이다.
내 인생을 거룩하게 하시든지 아니면 아예 망쳐버리시든지 아니면 가지고 노시든지, 골프를 치시든지, 승마를 하시든지, 마음대로 하시라고 몸과 맘과 영혼까지 내 드리는 것이 제물이 되는 방법이다. 내 육신을 타고 한번 최고 높은데 까지 올라가서 천상의 빛을 밝혀보시든지 원하는 것 다 해보시라고 바쳐드리는 것이 제물이 되는 방법이다.
이것을 바울은 이해하기 쉬운 말로 ‘노예’로 비유했다. 우리더러 죄의 노예가 아니라 의의 노예가 되라고 했다. 그래야 우리의 생이 거룩해지고 영생이 결과 된다고 했다.(로 6:22) 노예는 주인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 우리를 주님께 대신 살라고 내어드리면 우리가 우리를 사는 것 보다 훨씬 더 잘살게 하고 빛나게 하고 거룩한 성공을 이루는 삶이 될 것이라고 했다.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to him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 (로 6:13)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가 그 분께 우리 삶을 통째 줘버리면 어떻게 될까? 바꿔질 것이 없다. 생명의 ownership과 인생의 ownership만 바꿔질 뿐이다. 차주는 바꿔져도 운전대를 잡는 이는 우리다. 우리가 주님의 대리 운전자가 되는 것이다.
가자는 대로 가고 하자는 대로 하면 된다. 멈추라하면 멈추고 가자하면 가면 된다. 기름 값도 그분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살라는 대로 살면 된다는 의미다. 그분의 마음으로 살고 그분의 정신으로 살면 된다는 의미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3:23-24)
Message No. 57.
영적 지식이란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할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니라.”(요일 5:19-20)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아들”, “악한 자”, “그리스도”, “영생” 이는 모두 영적인 지식을 말한다. 그렇다면 영적 지식이란 무엇일까?
육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영적인 것은 비물질적인 세계를 말한다. 육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육체의 감각으로 감지 할 수 없는 세계 그러나 그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말한다.
사실 영과 육은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다. 어찌 보면 하나고 어찌 보면 둘이다. 그러나 또 어찌 보면 하나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다. 모두 하나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국경이 있을 뿐이다.
본래 영계 뿐 아니라 물질계의 모든 창조물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인간은 태초부터 하나님을 위한 물질계의 대리자로 창조 되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물질계의 창조물들을 다스리고 지배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스린다는 것과 지배하는 데에는 많은 지혜와 기술과 지식이 필요하다.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지만 누구를 대신할 때는 대신하는 분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한다.
인간이 대리한 분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이 대리하는 그 분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분에 대한 지식, 그분의 세계에 대한 지식, 그분의 세계에 대한 법칙 지식, 그것 없이는 그 분을 위한 충실한 청지기가 될 수가 없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천상의 법칙을 많이 말씀 하셨다. 때로 비유로, 때로는 암호로 천상의 지식을 말씀 하셨다. 비유와 암호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들을 준비가 된 자만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그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고 인도할 것이라고 하셨다.
욥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에 있는 창조물을 만들 때, 그 창조물의 활동과 관련하여 아주 섬세한 프로그램과 그에 따른 법칙을 알 수 있다. 모든 생명체에 보이지 않은 법칙이 있는 것처럼 영계에도 그러한 법칙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사실 물질계에서 살아갈 인간이 영적인 법칙을 알아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영적인 삶을 살려고 한다면 (신약에서는 그것이 가능) 당연히 영적인 세계에 대한 법칙과 지식을 알아야 한다. 영적인 지식 없이는 영적인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약을 사는 인간은 성령의 전으로서의 삶을 산다. 성령의 전으로서의 삶은 영적인 삶이다. 성령은 영이고 성령에 관한 지식은 영적 지식이다.
주님은 인간의 모든 질고를 치료 하셨고 모든 영적인 약점을 보완 하셨다. 이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 하셨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회복 되었다. 이것은 영적인 지식이다.
영적 지식이란 육체를 입은 인간이 다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허락된 지식이 있다. 허락된 지식이란 물질계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꼭 알아야 할 지식이다.
예수에 대한 지식이다.
영적 지식은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성경 안에도, 성경 밖에도, 예수에 대한 소개는 많다. 너무 많다. 메시야, 혁명가, 형이 상학자, 교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등등.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단순한 이름 그 이상이다. 그 분의 세계, 그분의 나라, 그분의 성품, 그분의 신분, 등등, 그 분과 연결된 모든 것이 그분에 대한 지식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했나? 우리는 예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묻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 선지자, 예언자, 죽었다 살아난 세례 요한, 다시 온 엘리야 등등 많은 대답들이 나온다.
이에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아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는 대답을 하고 칭찬을 받는다. 그리스도란 구세주란 뜻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
그렇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인류의 구세주시다. 구세주란 무엇인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의 나라에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나는 길이요” 예수님을 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논리로 합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길이란 사람들이 밟고 걸어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따라가는 것까지 포함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을 길, 진리, 생명 이라고 말한다.
또 요한복은 6장47-57절에서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육체고, 말씀이고, 생명의 떡이라고 한다. 그의 피와 그의 살을 먹어야 우리가 영생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이는 지상의 말이 아니다 지상의 논리가 아니고 지상의 지식이 아니다. 그래서 로마는 기독교를 핍박할 때 기독교인들을 인육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하기도 했다.
인생을 긴 여정이라고 한다면 길은 인생의 여정이 펼쳐지는 장소를 의미한다. 인생의 여정이란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밟아간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선택에 의해 어떤 장소를 걸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밟아간다는 것은 산다 (living)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밟고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 발이 지금 무엇을 밟고 있는지는 아무 중요하다.
영적으로 약간 들어가 생각하면 발로 그리스도를 밟아야 한다는 것은 때 묻은 발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 위를 걸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토대 위에서 우리의 생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죽음의 노예, 죄의 노예, 두려움의 노예, 향락의 노예,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 의의 세계, 희락의 세계로 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뿐이다.
아담 타락 이전 상태 즉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고, 하늘의 식구들과 교감 (communion) 을 할 수 있는 상태,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구해서 받는 상태로 가는 길은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알고+믿고+믿고 아는 것을 행으로 입증하고 ) 하나님과 직접 대화 할 수 있는 자리로 인도하는 길이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고, 불안 없이 사는 왕국으로 가는 길이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고통 없이 사는 마을로 가는 길이고, 미움 없이 살 수 있는 땅으로 가는 길이고, 질병 없이 사는 나라로 가는 길이고, 빈곤 없이 사는 집으로 가는 길이고, 죄로부터 그동안 내가 쌓아 짊어지고 있는 모든 죄업을 벗어버리는 평화로 가는 길이고, 진정한 자유의 땅으로 가는 길이다.
그는 진리다. 그의 모든 가르침이 진리다. 그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이 진리다. 진리의 정의는 변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별로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영원한 진리다.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어디서나, 언제나, 변함이 없다.
예수님이 평화라는 것이 변하지 않는 진리다. 이것은 평안의 법칙이다. 사랑의 법칙이다. 은혜의 법칙이다. 약속이다. 죄업을 이기는 법칙이다. 그가 누구라도, 강도라도, 도둑이라도, 아이라도, 노인이라도, 장로라도, 목사라도, 차별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진리다.
그분이 사랑이라는 것이 진리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진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이 박혀 돌아가신 것이 진리고, 부활하신 것이 진리다.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진리다. 그 법칙에는 실패도 없다. 그 법칙에는 슬픔이 없다. 그것이 진리다.
그는 생명이다. (요7:18) 예수님은 생명이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의미한다. 끊어진 관계가 다시 연결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영생을 의미한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호흡이다.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는 꺼지지 않는 생명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다시 연합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바로 그것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을 믿는 것이, 믿는 것을 생활에 활용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이 믿음의 의미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훨씬 더 깊고 넓다.
Message No. 58.
성령을 아는 것이 영적 지식이다.
“보혜사 그가 오시면”
성령을 바로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성령을 바로 알고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일평생 악령의 종으로 살다가 악령의 종으로 종지부를 찍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을 은사를 주는 분, 은사를 주시기 위해 오신 분으로 이해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너무나, 너무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성령에 대해 영적으로 육적으로 비합리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성령은 영이다. 영의 세계는 어마어마하다. 귀신도 영이다. 마귀도 영이다 사탄도 영이다. 그들도 물질계를 움직일 때는 물질계의 눈높이로 기적, 표적, 혹은 기사를 일으키고 사용한다. (계 12장 12-13정, 16장 14절)
그리고 영들이 일으키는 기적, 표적, 기사에는 상표가 없다. 어떤 것이 사탄이 일으킨 것인지, 어떤 것이 귀신이 일으킨 것인지, 어떤 것이 마귀가 일으킨 것인지, 어떤 것이 성령이 일으킨 것인지, ‘Made by God” or “Made in the Spirit or Jesus” 라는 표딱지가 붙어있지 않다.
흔히 사람들은 교회에서 어떤 기적이 일어나면 성령이 일으켰고, 교회 밖에서 일어나면 귀신이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간단히 처리될 일이 아니다. 어떤 분은 기도원을 세워 성령의 이름으로 필리핀 심령술사들이 일으키는 치유사역을 하고 있다. 일명 성령수술이다. 성령수술도 대부분 목사가 집행한다. 치유행위를 하는 날은 몸과 마음을 제법 청결케 한다. 신을 불러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령의 역사인가? 아니면 마귀의 역사인가? 글쎄? 그러나 그것은 오래 동안 전해 내려오던 필리핀의 전통 민간 치유 요법이다. 공중으로부터 영을 불러들여 하는 치유행위이다.
그들이 영을 부를 때는 지붕에 있는 바퀴벌레들이 우르르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그들은 그 소리가 영이 오는 소리로 믿는다. 그러나 그런 심령 치유는 대부분 불행으로 막을 내린다. (“성령수술의 정체” 참조) 그런 행위가 교회에서 행해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부를 것인가? 아주 기도를 많이 한다는 목사가 집행을 한다면 그것을 성령이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세탁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기적은 일어나는 장소에 따라 성령의 역사 귀신의 역사가 되지 않는다. 교회서도 마귀의 역사는 일어난다. 교회 밖에서도 성령의 역사는 일어난다. 성령은 어떤 장소에도 갈 수 있다. 갈 수 없는 곳이 없다. 우주 만물이 그분의 것이다.
처음 성령에 대한 소개는 세례요한에 의해서였다. 그는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 보다 능력이 뛰어나셔서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도 성령의 실체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아니하였다.
예수님은 성령을 자신이 가르쳐 놓은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분, 우주의 진리를 가르치실 분, 우주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실 분 등등으로 소개를 했다.
영생의 비결을 묻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면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영이 태어난 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성령에 의해 우리 영이 다시 태어난다는 말을 쉽게 풀면 성령이 우리 영을 낳으신다는 말이다. 물질세계의 말로 잉태하고 낳는 것은 엄마다. 성령이 우리 영의 엄마라는 뜻이다. 어머님, 영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보호하신다고 했다. 영락없는 엄마의 역할이다.
성경에서 성령을 그(He)로 표현했건 그녀(She)로 표현했건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영의 세계에는 성이 없다. 우리도 사후엔 천사와 같이 된다고 했다. 남자와 여자는 물질계에서 부르는 말이다. 물질계의 생육을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 그렇게 창조하셨다.
인간의 중생은 성령을 받는 일이다. 성령이 없으면 중생이 없고 중생이 없으면 칭의도 없고 성화도 없고 영생이 없다.
바울은 성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전 12: 4-1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 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우리를 천성으로 인도할 우리 영혼의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영적 진리를 가르치고 우주의 법칙과 진리를 가르치고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에겐 성령의 역사가 필요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속에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 속에 주님이 거하시면, 우리도 자신이 한 일을 할 것이요, 자신이 한 일보다 더한 일도 하리라고 말씀 하셨다.
은사는 밖으로 나타난 것도 있지만 안으로 나타난 것도 있다. 성령은 필요에 따라 역사 하신다. 육체의 치유가 필요하면 육체의 치유를, 영의 치유가 필요하면 영의 치유를, 회복을, 복구를, 이런 사역이 주 임무다. 어떤 역사가 귀신의 역사고, 어떤 역사가 마귀의 역사인지, 어떤 성령의 역사인지는 그 열매로만 알 수 있다.
성령의 열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 22)모두 연결되어 있다. 하나가 있으면 전부가 있게 된다. 마귀나 귀신, 사탄은 성령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들은 그런 것들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Message No. 59.
사탄을 아는 것이 영적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인간세상에서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 사탄이다. 사탄의 이름은 많다. 사람의 영과 육에 해를 주는 모든 악을 총칭하여 사탄이라고 한다.
성경은 사탄을 타락한 영,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 귀신의 영, 음녀 , 옛 뱀, 마귀 등등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세계에서의 밝혀놓은 사탄의 정체다.
인간 세상에서는 그들을 광명의 천사 의의 종으로 위장한다고 했으니 인간 앞에서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 자와 의의 종으로 서있는 자가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을 구별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그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오직 그들의 열매를 통해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용서와 평화와 사랑을 수행하지 않는 광명의 천사는 위장한 천사다. 용서와 평화와 사랑을 수행하지 않고 그들이 받쳐주지 않는 의의 종들은 사탄의 위장한 종들이다.
이 모든 것은 영적 지식에 해당한다. 이런 지식이 있어야 그들에게 속아 그들의 종노릇하지 않는다. 그들의 종노릇 하는 순간엔 성령이 함께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영적 지식이 필요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사탄을 알면 아는 만큼 싸움이 쉬울 것이라는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탄이 하나님의 보좌 앞 천상의 아들들의 모임에 참석한 장면이 욥기에 나온다. (욥기 1:6-12)
물론 욥기서는 문학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지만 그래도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사탄이 어떻게 다시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인지? 어떻게 더러운 것이 거룩한 분 앞에 설수 있었던 건지? 물론 문학작품이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우리는 욥기를 통해 사탄의 정체를 보다 많이 알 수 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과 하나님을 이간질 하고, 인간을 유혹하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 욥기에 나타난 사탄의 실체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내어 주면서 그의 생명은 손을 못 대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이 내린 재앙으로 다른 생명 (욥의 모든 자녀들)이 희생을 당한다. 역시 아이러니다.
신약에는 사탄의 정체가 보다 자세히 나타난다. 어떻게 얻었는지 그는 천하만국의 영화에 대한 주권을 가진 자로 (눅 4:6) 등장 한다.
그러나 그가 물질적인 형체를 입고 나타났는지 아니면 영적인 상태로 나타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없다. 천하만국이란 하늘과 땅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파우스트에도 나온다. 인간의 영혼을 사기 위해 사탄은 사방팔방을 다니며 믿는 자를 미혹한다. 왜? 믿지 않는 자는 어차피 자기 것이기 때문이다. 천화만국의 영화를 꿈꾸는 사람들- 그들의 영혼이 이미 사탄한테 팔렸음을 암시 준다.
그들은 불의나 악에게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숙인 자들이다. 마음속에 있는 세속에 대한 탐욕은 이래서 위험하다. 탐욕을 버리지 않고는 이기기 힘든 유혹이 날마다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덴에서 입증되었던 것처럼 사탄의 조건은 진실의 한 파편, 혹은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사탄이 예수님께 거래 조건으로 내민 천하만국의 영화도 부패한 영화다. 평안이 없는 것이다. 앙꼬 없는 찐빵, 그래서 사탄이 주는 이 세상의 모든 영화는 평화가 없다.
사탄이 주는 것 가운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움이나 고통, 그리고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다. 아무리 화려하고 번뜩인다 해도 세속의 영화는 평안이 없다. 사탄이 주는 것이 실제 천하만국의 영화라 해도 평안이 없다. 어떤 것은 지옥이다. 사탄과 인간이 합작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영화, 평안이 없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 그래서 천하만국의 영화를 가진 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영혼 없이 살다가 자살을 하거나 감옥에 가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지도 모른다. 그나마 성경은 이 외형적 영화를 아궁이 앞에 놓인 마른 풀, 햇볕이 들면 사라지는 아침 이슬, 안개, 저녁이 되면 시들어버릴 꽃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것은 바람이 불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먼지요, 순간적인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반짝이다.
사탄은 평화가 없다. 행복도 없다. 만족도 없다. 사탄이 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됐든 평화 없는 것, 행복 없는 것들뿐이다. 자기가 가진 것 이상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들어 놓은 인간 영혼을 세상의 먼지 같은 미끼로 낚시질을 한다. 인간은 그의 유혹 앞에서 끙끙거리다가 덥석 물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렇지 않다.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 너무나 길다. 자기의 하기에 따라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짧게 보이는 것은 짧아서가 아니라 진리를 볼 수 있는 시력이 없기 때문에 짧게 보이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곳엔 죽음이 있다. 그러나 죽음 있는 곳엔 영생이 있다. 죽음을 건너 뛰어 영생으로 가는 길도 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은 법칙이다. 사탄이 그것을 막고, 가리고, 그런 깨달음이나 지식이나 믿음을 소유할 수 없게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