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ssage No. 48.
율법과 유전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 책을 낭독하여 듣게 할지니”(신31:11)
십계명은 양심을 살리는 법이다. 그러나 마음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 지킬 때에만 양심이 살아나게 되어 있었다. 예수님의 눈에는 이들의 마음이 독사의 소굴, 회칠한 무덤으로 보였다.
유대인들은 마음과 행동을 분리 시켰다. 오직 행에만 집중 했다. 이스라엘은 그 십계명을 양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은 십계명을 진화시켜 또 다른 법을 만들었다. 율법과 유전이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법들이 집합되어 있다. 율법 책은 성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책이다. 유대인의 경전이다. 그들이 지킬 수 있도록 경전을 만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대인들은 이것을 성경처럼 지킨다. 장로의 유전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의 핵심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다. 다른 말로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이다.
겉으로 보기엔 정의롭고 법답게 보이는 법이었다. 그러나 이 법칙은 정신이 없는 육체와 같은 것이었다. 인간을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Cause and Effect의 법칙을 살짝 위장한 것일 뿐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 법정신이나 일부 조항이 아브라함 시대 전 고대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법이 어디서 기인했건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어차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은 우주 안에 이미 흐르고 있던 법칙에 불과하다는 것일 텐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돈이 필요할 때 단골로 이용하는 고린도 후서나 다른 성경 ‘심는 대로 거둔다.’ 도 바로 여기에 뿌리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직접 교육을 받지 못한 바울은 율법학자로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라는 율법 정신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설명하려고 노력 하였고 ‘심는 대로 거둔다.’ 라는 편지로 고린도 교회에 선물(헌금)을 자발적 강요(?)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은혜의 법칙은 그 보다 훨씬 더 깊고, 넓고, 높다.
누차 말하지만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은 우주의 법칙이다. 성경 속, 많은 곳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죄를 심으면 사망을, 의를 심으면 영생을 받는다. 나쁜 나무에서 좋은 실과를, 좋은 나무에서 나쁜 실과를 맺을 수 없는 것은 법칙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없이 인간이 행한 의가 과연 진정한 의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이 과연 완전한 의를 행할 수 있을까? 인간이 행한 의를 저울질 해보고 분석했을 때 100%의 의가 나올 수 있을까? 성경은 인간은 결코 의를 행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그들이 의롭게 살았다고 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 유대인은 그동안 그들이 살아오면서 만든 과업을 무엇으로 떨쳐내야 하는 걸까?
히브리 사람들은 바로의 노예로 있을 때부터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았다. 감사할 조건이 없었다. 삶 자체가 고통이었다. 불행한 그들의 과거 생활을 조명해 볼 때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그리고 계속 변하고 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성령 시대 안에도 계절이 있다.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변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람이 과거에 묶여 사는 것은 악이다.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aining toward what is ahead”(빌3;13). 과거는 시간의 도둑이요 현재를 갉아먹는 좀이다. 롯의 아내는 과거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다.
만일 과거를 체로 걸러본다면 무엇이 남을까? 과거도 오늘을 위해 사용할 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지혜다. 십자가의 한 강도는 자신의 과거를 걸러본 후 그리스도의 의를 발견하고 낙원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자신의 과거를 걸러내지 않아 바로 곁에 있는 의를 의로 보지 못하여 지옥으로 갔다.
과거를 봐야 과거에서 움직이는 자기를 볼 수가 있고, 그래야 회개를 할 수 있고, 벗어날 수 있고, 잊을 수 있다. 보지 못한 것을 잊을 수는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과거를 걸러내지도, 과거에서 벗어나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죽음을 꺼내들고 모세를 원망하면서 죽음을 불러들였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직면할 수 있는 두 가지 법칙을 살펴보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 하나는 불평을 하거나 원망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행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생각보다 강할 수도 있지만 약할 수도 있다. 그 마음에 불평이나 원망이나 불안을 담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마음이 녹아버린다. 시커멓게 타버린다. 영도 망가지지만 육도 망가진다. 영과 육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불평거리가 현상 화 되어 그 사람 삶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에너지는 우주로부터 더 많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불러오고 긍정적인 에너지는 우주로부터 더 많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러 온다. 끼리끼리의 법칙이다. 이는 너무너무 정확하고 너무너무 확실한 법칙이다. 그리고 무서운 혀의 법칙 (야고보 3:6)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대화를 할 때 망설임 없이 누구를 지칭하여 “사기꾼” “도둑놈” “나쁜 놈” 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말에 의해 그 말한 사람에게 “사기꾼” “도둑놈” “나쁜 놈” 이 될 것이다. 말은 그렇게 위력이 있다. 너희가 너희 말로 의롭다함을 입고 너희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차라리 애급에서 죽었더라면 ….” 그들은 그들의 입술로 죽음을 불러들였다. 실제 그때마다 그들은 죽었다. 땅이 갈라져 죽었고, 불이 내려와 죽었고, 독사에 물려 죽었다. 그들의 말대로 죽었다. 혀의 법칙이 이처럼 무서운 것임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민 26:1)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에 의해서였다. “차라리 애급에서 죽었더라면” “차라리 애급에서 죽었더라면”
Message No. 49.
은혜의 법칙.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21:8)
모든 법에는 예외 조항이 있다. 율법이 땅에 속한 법이라면 은혜의 법은 하늘에 속한다. 그러나 그 법은 아직 인간 세상에 정식으로 펼쳐지지 않은 법이다. 그림자로만 잠깐씩 보여줬다 거두시는 법이다. 그 장면이 민수기에 등장한다.
유대인들은 또 구시렁거리다 불뱀에게 물려죽게 된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심으로.”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민 21:5)
사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불평을 하거나 이런 기도를 하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백성의 마음을 풀어주면서 수습을 하실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인 생각이다. 이성적인 계산이다. 우주에는 이미 법칙이 있다. 백성들이 또 이 법칙에 결려든 것이다.
‘원망, 하나님은 인간의 원망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도달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 옮겨다줄 천사가 없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니 그 원망은 자기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주에 깔린 법칙이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구시렁거린 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체험한다. 체험과 동시 죽어간 것이다. 하나님이 불뱀을 이용했다고 하고 있다. 이는 유대인들이 우주의 법칙을 깨닫지 못해서 그렇게 기록한 것뿐이다. 하나님이 뱀을 보내지 않았어도 그들은 그들의 말대로 죽게 되어 있었다. 그들이 이미 말을 뱉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미처 죽지 않은 백성들이 살려달라고 애걸한다. 이에 하나님이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해독 방법을 가르쳐준다.
이들이게 놋 뱀을 장대에 세워 그 놋 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해독이 되게 한다. 맹독이 든 독사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놋으로 뱀을 만들어 쳐다보면 해독이 되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법칙이 아니다. 사랑의 법칙이다.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은혜의 법이다.
“어떻게 독사에 물려 죽어 가는데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처다 보면 산단 말인가.” 그것을 설명할 만한 인간의 논리는 없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법칙이 아닐 수는 없다. 우주에는 수많은 이런 법들이 존재한다. 아직 나타나지 않았거나 펼쳐지지 않은 법, 설명할 수 없고, 설명되지도 않는 법, 그러나 영적 지혜를 얻으면 한순간에 알아질 수가 있고 깨달아 질수가 있다.
장대 한번만 처다 봄으로서 닥지닥지 달라붙어 따라다니는 과거의 악업의 굴레를 털어버릴 수 있는 것, 그것은 공의의 법칙을 넘어 사랑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는 은혜다.
은혜는 인간 안에 들어있는 과업의 굴레, 율법, 사망, 원망, 두려움, 미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면책 특권이요, 사망의 독을 뽑는 해독제다.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진리다. 영적 병을 치료하는 사랑의 명약이다.
요한의 외침은 바울의 복음과는 달리 사랑이 철철 넘친다. 과업에 의한 굴레를 두려워 하는 흔적이 전혀 없다. 모든 율법보다 율법정신보다 높은 차원에 있는 것이 사랑의 복음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인간은 바로 이 경지로 올라가야 한다.
현대인들은 두려움과, 원망과, 미움과 시기, 질투의 광야에서 살고 있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살수 없고, 미워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고, 원망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의심과 불신의 광야에 살고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두려움이고 수치고 원망이고 불편이고 미움이다. 그래서 ‘Hell 조선’, ‘Hell 조선’ 외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우주는 신비고 하나님은 창조의 주시다. 하나님은 우주를 우리가 말로 명하는 것이 창조되도록 창조해 놨다. 아니면 그렇게 창조하신다.
말하고, 창조되고, 이것이 기도고 소통이다.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고 하는 과정에서 소통이 되고, 신뢰가 생기고, 믿음이 생긴다.
사람들은 조건도 없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한번 쳐다만 봐도, 지옥이 천국이 되는 은혜의 법칙이 있는데도 믿지 않는다. 주님이 계신 곳은 지옥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의 그늘로 들어가면 모든 독이 해독이 된다. 비로소 평안을 얻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원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천상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상에서 온 지혜를 가져야만 완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야 3:17-18)
어느 한 부분을 안다고 안 것은 아니다. 물론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 보다 더 많은 부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법칙을 깨치는 순간 한 순간에 기쁨이 터질 것이다. 엄청난 힘으로 솟구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이 내 앞에, 아니면 내 곁에 아니면 내 안에 계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성령의 품에 안겨 있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은혜다. 할렐루야!
Message No. 50.
소리의 법칙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올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다.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다 각기 앞으로 올라 갈지니라.” (여호수아 6: 5)
하나님은 인간에게 한 단계씩 높여가며 영적인 법칙을 가르치고 있다. 여리고성을 향한 행진은 그동안 광야 생활을 통해 훈련된 히브리인들의 신앙을 시현하는 중요한 실습장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우주의 법칙을 익히는 훈련장이었다.
왜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여보내기 전 이런 훈련을 시켰을까? 앞에서 간단히 언급 했지만 집을 지으려면 주춧돌과 기둥 그리고 다른 정신적인 물자가 필요하다.
가나안은 히브리 사람들이 놀러가는 장소가 아니다. 나라를 세우러 가는 곳이다. 살기 위해 가는 곳이다. 고향을 만들러 가는 곳이다. 살려면 집을 지어야 된다. 집을 지으려면 집을 지을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자재가 있어야 한다. 주춧돌 같은 정신과 기둥이 될 만한 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었다. 힘도, 재력도 창의성도 없었다. 지혜도 없었고, 명철도 없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명철은 그들이 세울 나라의 주춧돌이요 기둥이요 자재였다. 유대 백성은 다듬어지지 않은 바위였고, 땅에 붙어있는 나무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르고, 깎고, 다듬어야 했다. 그래야 나라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대한 신뢰와 지식이 주춧돌과 기둥이다. 이런 자재를 사용하여 나라를 세우고 집을 지어야 나라가 오래 지탱할 것이다.
신앙과 믿음의 기초석 없이는 나라를 세울 수 없다. 또 세운다고 해도 금방 무너질 것이다. 그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처럼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런 연유로 3일 길을 40년이 걸리게 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광야 40년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히브리인 스스로가 만든 것이었다. 광야라는 훈련장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을 배웠다.
여호와는 몇 번이나 포기하려 했다. 과외 선생을 해본 분들은 이해 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출 32: 9-10)
여호와는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면서는 소리의 법칙을 가르쳐준다.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사람들의 소리, 믿음을 가진 자들의 소리가 모아졌을 때의 위력을 보여 주신다. 말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리고 성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요새중의 요새요, 철통 무장된 성이었다. 히브리 사람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전쟁 경험도 별로 없었다. 무기도 없었다. 그런 유대인들이 철통 무장한 여리고성을 점령한다는 것은 현실 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는 아낙 자손이라는 거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전쟁에 능한 전설적인 전사였다. 그들은 신(어쩌면 우주 다른 곳에서 온 인간)과 인간의 후손들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전술은 히브리인들이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다. 아예 성문에 빗장을 걸고 밖으로 나오지를 않은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성문을 부술만한 무기도 기술도 힘도 없었다.
하나님은 그 여리고 성안에 금과 은과 각종 보물이 있으니 가서 취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림에서 떡을 꺼내 먹으라는 것과 같았다. 성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제 모세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여기까지 성숙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잣대로 저울질 해보지 않았다. 상황을 분석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원망하지 않았다.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하나님은 몇 가지를 전술을 펼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전술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성을 함락시키는 것과는 관계가 없어 보였다. 인간 세상의 방법이 아니었다. 논리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성의 소리를 누르고 하나님의 소리를 높였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자 난공불락의 성이 무너졌다.
그들은 인간의 전쟁 무기인 칼과 창이나 대포가 아니라 양각 나팔과 인간의 소리가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 하게 된다. 그들은 들어가 금과 은과 보석을 취했다.
얼마나 경이로운 전쟁 장면인가? 인간의 소리가 모아졌을 때 핵무기로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셨다. 믿는 자가 합심하여 단일 목적을 위해 드리는 기도가 하늘 보좌를 흔든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생각되는 장면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아무 것도 아닌 소리에서도 이런 위력이 나온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에게서도 이런 위력이 나올 수 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되고, 무식한 자를 들어서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고, 하잘 것 없는 어린 아이가 영적세계에서는 큰 자가 되고, 낮은 자를 들어서 큰 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새로운 영적 법칙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길에는 인간이 함락시켜야 할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있다. 그 성벽은 두껍고 그곳의 백성은 장대하다. 그러나 그곳에 은금이 가득하고 내게 필요한 보물이 가득하다.
그 두꺼운 장벽은 두려움이다. 의심이다. 그 장벽 앞에선 우리의 두려움은 그 장벽을 더욱 두껍게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은 그곳에 들어가서 그 속에 있는 금은보석을 취하라 하신다.
그 성벽만 허물어 버리면 된다. 무너뜨릴 수 있다. 소리다. 소리는 기도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니라.”
Message No. 51.
세례 요한의 출현
“그 때에 세례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3;1)
히브리 사람들은 약속의 땅을 침략했다. 그리고 그곳의 백성들을 살육하고 자기들의 나라를 세웠다. 그 중에는 평화밖에 모르는 민족도 있었다. 그들은 구약을 통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정당화 했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세운 나라였는데도 완전하지가 않았다. 그들의 신앙도 오래 가지 못했다. 사사기가 잘 보여준다. 혹독한 체험을 통해 체득한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었는데도 너무 빨리 부식되고, 병들고, 좀먹고, 썩어버렸다. 이는 양심의 부패를 의미한다.
우주의 법칙에 의해 어디나 흥과 쇠의 계절이 있다. 열왕기에 나와 있다. 유대인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보면 그들의 계절이 더욱 분명해진다. 사울, 다윗, 솔로몬 등, 얼마나 타락했으면 하나님은 르호보암 때 나라를 쪼개서 이스라엘과 유다로 나눴고 나중에는 다윗과 솔로몬이 그렇게 정성 드려 46년 동안 지어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면서 자랑스러워하던 성전을 파괴하고 불타게 하고 그리고 그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했을까? 하나님은 깨끗한 마음과 자비를 원한다는 메시지가 넘치고 있다 .(마23:23)
그들은 이 중요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자행한 악한 행위를 보고 질려버린다. 사사를 비롯하여, 선지자, 예언자를 보내 권면도 해보고, 겁도 줘보고, 달래도 보지만 모두 허사가 되자 끝내는 400년 동안이나 버려버린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나라와 족속의 하나님이었지 히브리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차별 없는 거대한 만군의 여호와시다. 약속이 있건, 없건, 마음이 더러우면 누구나 독사의 자식이다. 하나님은 어떤 약속이나 직책이나, 혈통보다, 청결한 마음을 원하셨다. 하나님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움직이시는 마음이시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모든 인류가 마치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착각을 하고 살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착각을 악의 산물이라고 정의했다. 족보까지 그렇게 맞추었다.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한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내리신 십계명을 지켰고, 율법을 지켰다. 그러나 십계명이나 율법은 그들의 양심을 살리려는 기초 작업에 불과했다. 그것을 통해 그들이 마음을 깨끗하게 해 보시려는 의도였다.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 그들의 양심은 율법을 지킬 때나 지키지 않을 때나 달라지지 않았다. 양심이 살아나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아서다. 그들은 계명을 지켰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지켜야 할 방법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지 때문이었다. 우주의 법칙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모든 계명은 지키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대로 지켜야 지키는 것이 되고, 지키는 것이 되어야 에너지가 나오고 변화가 생긴다.
모든 계명을 양심을 살리고, 지키고, 성장시키도록 고안되었다. 그것들은 세속의 법 같지만 영적인 법이다. 그들은 법의 영성을 보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을 가진 민족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셨던 가나안을 다 빼앗기고도 회개를 할 줄 몰랐다. 이 또한 양심이 없어서였다. 자신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뭐가 잘못인지 무엇을 잘 못 한지를 알지 못했다.
이때 세례 요한이 나타난다. 그의 출현은 기적이었다. 출생부터가 기적이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요 예언자다. 예수님은 그를 다시 오신 엘리야라고 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높이기까지 했다. 그는 선지자나 예언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광야의 소리 (The voice of desert)라고 하면서 광야의 소리로 살다 광야의 소리로 죽었다. 그에게도 제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그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겼는데도 어딘가에서 유실되어 현 세대에까지 전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성경에 등장한 그의 활동은 너무나 짧고 간단하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직전에 나타나 공생애 시작 후 죽었다.
성경엔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가 한 여자의 춤 값으로 목이 잘려나간 비운의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의 삶은 불행하다. 그는 무상한 삶을 살다, 무상하게 사라진 부평초 같은 선구자 (harbinger) 였다.
고대의 거의 모든 현자들은 스승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특정 종교를 초월하여 우주 가운데 존재하는 보편적 진리를 찾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고유한 생의 가치로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신은 누구인가?
별자리와 인간 세상과의 관계, 별들과 인간과의 관계(천문학) 신과 인간의 관계 등등이 당시 현자들의 학습하던 주제들이다.
자신을 아는 것은 지혜고, 이런 지혜를 가진 자를 현자라고 불렀다. 종교를 초월하여 어디를 가나 이런 주제를 들쳐 매면 존경을 받고, 누구하고나 말을 섞을 수 있고, 어울릴 수 있고, 친해질 수 있는 사회였고 문화였다. 성경에 나타난 세례 요한은 약대 옷을 걸치고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은 것으로 나와 있다. 그를 ‘광야의 소리’라고 한 것은 그가 광야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생이 광야처럼 황량하고 쓸쓸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사가랴를 잃고 10살 때엔 엄마까지 잃는다. 그는 이집트의 한 현자의 도움으로 이집트로 내려가 그곳의 한 사원에서 기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서 이집트 철학을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학문을 통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그곳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당시 동방(이집트, 헬라)지역은 예수님을 처음 영접했던 동방 박사에 의해 천상으로부터 세상의 메시야가 왔다는 사실이 널리 퍼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나이 30이 다 되도록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그의 스승은 누구인지, 누가 그를 가르쳤는지, 그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사명을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일) 깨달았는지, 성경엔 나와 있지 않다.
Message No. 52.
마음에 길을 내는 세례의 요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요한의 회침은 “회개”였다. 회개는 주님이 처음 외친 복음이기도 하다. 성경은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고 주가 걸으실 길 (첩경) 을 평탄케 하기 위해 파송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와서 회개를 외치고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다. 이것이 그가 한 일이다.
성경은 그의 세례보다 그의 외침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를 “광야의 소리” 라고 한 것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외친 회개가 어떻게 주가 걸으실 길을 예비 (개척) 하고 주가 걸으실 첩경 (길) 을 평탄케 하는 것이 될까?
“주의 길을 예비하고”는 “주가 걸으실 길을 만들고”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이 뜻을 해석하면 그는 길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고” 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걸어가기 쉽게 길을 다듬는다는 의미다.
회개는 쉽게 마음을 청결케 하라는 것이다. 이는 주님이 걸어가야 할 길이 사람 마음에 있다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가 길을 내야 할 곳은 사람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의 외침은 마음을 뒤집어서 엎는 외침이었다. 길을 내려면 기존의 형태가 부서져야 하기 때문이다.
회개를 하는 것은 마음을 청결케 하는 작업이요, 마음속에서 돌덩이를 치우는 작업이요, 마음에서 가시덤불을 걷어내는 작업이요, 마음을 파헤치는 작업이요, 마음의 굴곡을 없애는 작업이요, 마음을 판판케 하는 작업이다. 구습을 벗는 작업이요, 습관을 벗는 작업이요, 프로그램을 걷어내는 작업이다.
사람 마음에 천상에서 오신 주님이 걸으실 길을 내는 세례요한의 사명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사람이 마음의 죄를 씻어지게 해 주님이 걸으실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 마음을 다듬어지게 하고, 사람 마음에 주의 말씀이 걸으실 길이 확 뜨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다. 이 뜻은 천국이 마음 앞에 와 있다는 의미다. 마음 문이 열리고 길이 놓이면 즉시 들어갈 것이라는 뜻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주님이 인간 마음에 들어가는 것은 천국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의미다. 주님이 천국이라는 뜻이다. 주님이 천국이요, 천국이 주님이라는 뜻이다.
주님이 걸으시는 길은 회개한 마음이고, 죄가 씻어진 마음이고, 청결한 마음이라는 의미다. 마음에 주님을 모시는 길은 마음을 청결케 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주님이 오실 길을 내는 길이고, 마음에 천국이 건설되도록 터를 닦는 일이다. 할렐루야 이는 신령한 작업이다.
세례 요한의 소리는 죽어져버린 유대인의 양심을 과녁으로 삼았다. 그들의 양심을 살아나는 소리를 외쳤다. 양심이 살아나는 처방을 내린 것이다.
“회개하라!” “죄를 씻으라!”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의 양심에 망치질을 했다. 계속 하여 회개를 외쳤다.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하는 무덤아…..” 모두 양심을 향한 망치질이다. 그들의 심장에 최고의 자극을 주었다.
그는 회개의 증표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치면서 세례 예식을 행했다. 그것을 씻김의 예식이라고 불렀다. 청소를 할 때 물을 사용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마음을 씻는 표식도 물이었을 것이다.
본래 물로 죄를 씻는 의식은 이방 종교에서 행하는 의식이었다. 종교를 초월하여 그리고 종족을 초월하여 당시 사회에 알려진 보편적인 예식이었다. 이방 사람들은 그들에게 붙어있는 온갖 불행과 악운과 부정이 물에서 씻으면 없어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세례 요한이 그것을 도입한 것이다
세례 요한은 마음을 씻는 표로 각인된 예식을 도입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 의식에 그들의 죄가 씻겨 졌고, 이제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왔음을 각인시키려 했다.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가진 많은 풍습이 이방 풍습과 비슷했다. 헬라는 모든 신들의 집합소였다. 문화적으로 종교적 통일을 꿈꾼 로마의 정책 때문에 종교의식에 대한 포용성도 너그러웠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당시에도 많은 유대인들은 혼혈족이었다.
사도행전에 등장한 훌륭한 신앙의 선조들도 어머니 혹은 아버지만을 유대인으로 둔 혼혈인 이었다. 그들은 로마의 문화와 종교사상을 받아 들였다. 그들을 개화된 유대인 즉 헬라 파 유대인이라고 불렀다.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로마 사람들은 종교적인 차별을 미개함에서 온 무지로 취급했다. 그래서 종교적인 편견이 강한 유대 파 유대인들을 당시 사람들은 아주 무지한 사람들로 취급했다. 지금도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니다. 모두 혼혈, 순수 혈통을 가진 유대인은 없다. 이것이 그들의 실체고 진실이다.
물로 죄를 씻는 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의식이었다. 세례는 씻음을 받은 사람들 의식에 자신들의 마음이 씻어졌음을 주입시켰다. 만일 죄가 씻어졌는데도 의식이 모르고 있다면 양심은 계속에서 자신이 부정하다는 생각을 뿜어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는 평안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가 씻어졌다는 의식 속의 확신은 너무너무 중요하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도 이 의식을 거행하면서 인간에게 붙어 있는 온갖 죄와, 악과 부정과 마음의 더러움을 씻는 하나의 상징으로 사용했을까?
요1 3:5절에는 물은 육을 성령은 영을 씻는 다로 나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었고 제자들에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게 했다. 귀한 손님이 오기 전엔 집안 청소를 한다. 먼지를 털고 물로 씻고 걸레로 닦고 깨끗하게 청소를 한다. 천국을 모시기 전 마음 (양심 )을 청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일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으나 제사장, 서기관, 사두개인들은 그의 외침을 거부했다.
Message No. 53.
동방 박사의 신앙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2:9-11)
믿는 자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에게는 선지자, 선각자, 깨달음을 얻는 4대 성인 중 한명으로 알려진 예수님의 출현은 인간과 우주 그리고 모든 영적인 세계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인간의 내면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종의 정신적, 영적 지각 변동이었다.
당시 천문학(점성술)을 연구하던 이집트의 박사들은 예수님의 별 자리를 보고 인류의 왕이 태어났다는 결론을 내렸고, 유대의 예언자들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했다. 하늘의 천사들은 내려와 이 땅에 평화와 의의 왕이 나셨음을 알렸다.
밤마다 별자리를 연구하던 동방 박사들의 밤하늘에 예수님에 대한 어떤 표식이 깔렸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인류의 메시야를 별을 보고 알아 봤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그 만큼 청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청명한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볼 수 있다고 해도 마음에 탐욕 있거나 어떤 집착에 붙들려 있다면 그 어떤 징조가 나타나도, 아니면 그 어떤 소리가 들려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
자연에는 흐름이 있고 법칙이 있다. 자연은 우주에 속해 있다. 그들은 비록 물질세계에 속해있지만 영적 세계와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우주의 흐름은 물질계의 경계를 넘어 영적인 세계로 뻗혀있다. 어떤 징조가 밤하늘에 별로 나타난다면 다른 어딘 가에선 또 다른 징조를 나타내 보였을 수 있다.
인간이 그것을 알아보느냐, 없느냐는 순전히 인간에게 달려있다. 인간의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바람 소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밤하늘을 벗 삼아 밤이슬을 맞으며 자연과 더불어 양을 치던 목자들은 하늘의 소리를 들었고 노래하는 천사들을 보았다. 그들의 마음이 맑아서였다. 그들이 누구든 상관이 없다.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지 상관이 없다. 그들의 신분이 어떠하든, 그들이 부자든. 가난하든, 나이를 먹었든, 어린 아이든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징조는 맑은 마음이 있는 자들에게 나타나서 천상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가 과학자든, 농사짓는 사람이든, 마음이 창결하면 신을 만날 수 있다. 인간이 신을 갈망해서가 아니다. 신이 인간을 찾아와서다.
깨끗한 마음은 활주로와 같다. 아무리 성능 좋은 비행체가 착륙을 하려고 해도 활주로가 없으면 착륙을 할 수가 없다. 활주로에 장애물이 있어도 착륙을 할 수가 없다.
그 소리를 들을 귀가 없고 눈이 없으면 보고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현대인은 소경이요 귀머거리다.
천상에선 지금도 인간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 하나님은 말을 하고 있고 성령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러나 대 다수 사람들은 메시지를 놓쳐버린다. 바로 곁을 지나가도 알지 못한다.
마음에 탐욕을 비우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탐욕의 뿌리는 갈 5장 19절에서 정의 되어 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와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과 또 그와 같은 것 (거짓말, 비난 등등) 이라.”
주님의 탄생을 알아낸 박사들은 바로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 했다. 그들이 얼마나 순수했는지는 그들의 행적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인류의 왕이 태어난 것을 알고 즉시 그 왕을 만나 경배하기 위해 집을 떠난다. 겸손이다. 학자들이 지닌 오만함이 없다.
왕을 만나 자기들의 어떤 소원이나 꿈 아니면 마음에 원하는 것을 부탁하거나 청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냥 경배하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인가. 그들은 귀한 예물까지 준비해 갔다. 황금과 유황과 몰약은 아주 귀한 보물이었다. 그런데 그 귀한 것들을 아무 조건도 없이, 기대도 없이 바친 것이다.
청결한 마음은 신앙이다. 청결한 마음은 믿음이다. 청결한 마음은 종교적 형식이나 종교적 격식 밖에 있는 믿음이다. 종교 밖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신성이다.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과 통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종교 단체는 여러 가지 기대를 판다. 사람들은 기대를 가지고 헌금을 하고, 기대를 가지고 봉사를 하고, 기대를 가지고 출석을 한다. 기대 안에는 온갖 탐욕이 들어 있다. 출세, 명예, 성공, 축복, 등등 대부분 얻지를 못한다. 돈과 에너지와 시간만 낭비한다.
동방 박사들은 세속적 기대가 없었다. 그냥 인류의 왕이신 메시야를 뵙고 싶은 마음, 경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 순수한 (pure) 그 마음뿐이었다.
그들은 선지자도 없었고, 예언도 없었다. 오직 순결한 마음만 있었다. 청결한 마음만 있었다. 이런 마음은 육의 속성이 아니라 영의 속성이다. 하나님 안에는 선민도 이방인도 없다. 하나님 안에는 틀이 없다. 차별이 없다. 예수가 인류의 왕이면 그들의 왕이다. 이 청결한 마음이 모든 선지자와 예언자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뵙는 영광을 안게 했다. 2천년이 지나도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 그들의 학문,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뵙고 경배 드린 장면, 예물을 드린 장면은 계속해서 전해진다.
만일 우리가 이런 청결한 마음을 갖는다면, 순수한 마음을 갖는다면,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이 자연이나 밤하늘 혹은 우주 만상에 띄워주신 그분의 메시지를 볼 수 있으며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