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ssage No. 36.
십계명을 통한 교육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출20:1)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자신을 좀 더 자세히 알려 주신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기본 지침을 주신다. 인간이, 인간이 되는 길을 일러주신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은 구약시대에 유대인에게 준 계명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랑의 계명으로 흡수해 버렸음을 알아야 한다.
십계명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갈 때 척도로 삼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지침이다. 누구나가 가지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양심이다. 기본적인 그 양심이 살아나면 하나님과 인간사이 최소한의 관계는 유지된다는 묵시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최소한의 양심도 없을 만큼 인성이 망가져 있었다.
당시 십계명(BC1500년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고 사랑이었다. 또한 죽어버린 인간 마음을 살리는 첫 번째 기초 작업이었다.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가 지켜야 할 교훈이요 짐승과 사람을 구별 짖는 지계표다. 어떤 학자들은 모세의 율법이 바벨론 함무라비 법전(BC 1800년경)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랬을 수도 있고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다.
불교에도 ‘십계(BC 600년경)’라는 것이 있다. 불살생계(不殺生戒):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 불투도계(不偸盜戒): 도둑질 하지 말라. 불사음계(不邪淫戒): 간음하지 말라. 불망어계(不妄語戒): 거짓말하지 말라. 불음주계(不飮酒戒): 술 마시지 말라. 부도식향만계(不塗飾香鬘戒): 향유(香油)를 바르거나 머리를 꾸미지 말라. 불가무관청계(不歌舞觀廳戒):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말라. 부좌고광대상계(不坐高廣大床戒):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말라. 불비시식계(不非時食戒): 때가 아니면 먹지 말라. 곧, 정오가 지나면 먹지 말라. 불측금은보계(不蓄金銀寶戒): 금은보화를 지니지 말라. 등이 그것이다.
종교를 초원하여 십계명은 모든 인간을 인간처럼 살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지침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십계명은 지킴으로서 더 높은 영적 경지로 진화할 수 있다.
사실, 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 죄를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법이 있음이다. 법이 없으면 행동에 대한 제약도 없다. 그것을 무법천지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성문화된 법이 없을 때에 양심의 법이 있었다. 물론 양심이 부패해 버리면 양심의 법은 힘을 잃는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미 부패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은 부패정도가 심각하여 악취가 날 정도였던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 하나님은 시내 산에 나타나서 10가지 법칙을 알려 주신다. 썩은 양심을 의지하게 할 수 없는 인간의 기본적인 계율을 주신 것이다. 적어도 그것은 지키면서 살라는 것이었다. 선택받은 자들의 최소한의 삶의 방법이다. 이것은 지키기 힘들만큼 무거운 것도 거창한 것도 아니다. 그냥 아주 쉬운 기본적인 계율이었다. 거기에 조건이 달려 있었다.
Message No. 37.
첫 번째 계명
“나는 너를 애급의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20장2절)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에게 자신이 이런 계율을 주실 자격이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를 주신 자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고 신의다.
“너를 애급의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종은 돈이나 다른 것으로 매매되는 물건과 같다. 주인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다 팔아버리면 된다.
노예 매매는 다른 물건과 마찬가지로 노예시장에서 거래가 되었다. 노예의 나이 성별 건강 상태에 따라 노예 값이 매겨진다. 누구든 노예 값을 지불하고 나면 그 노예는 노예 값을 지불한 사람의 것이 된다.
물론 힘으로 뺏는 경우도 있다. 여기 등장한 여호와는 애급에서 힘으로 뺏어냈다. 노예로 묶여져 있던 히브리민족 전체였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노예로 거느린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유를 주어 스스로 살아가게 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산다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스스로 어떻게 살아갈지, 삶에 대한 설계를 비롯하여 무엇을 해서 필요한 음식을 취득할지 등, 인간이 스스로 살기 위해선 스스로를 창조하는 창조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정해진 흐름 속에서 정해진 일, 시키는 일만 해온 그들은 그런 기본 능력이 없었다. 짐승처럼 먹고 마시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양심도 없었다.
양심은 스스로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산 장기다. 매일 정해진 틀에서 시키는 일만 하면서 시키는 대로 사는 이에겐 양심은 쓸모가 없다.
이들은 오래 동안 양심을 사용하지 못했다. 스스로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0가지 계명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고치고 수리하는 작업에 착수하신다.
그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고 하신다. 이것이 병든 양심, 아니면 죽은 양심을 살리는 첫 번째 과정이었던 것 같다.
인간은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니라 살아있는 참 신을 섬겨야 우주로부터 지혜가 들어오고 명철이 생기고 양심이 살아난다. “But the wisdom that comes from heaven is first of all pure; then peace-loving, considerate, submissive, full of mercy and good fruit, impartial and sincere.” (야3:17-18)
거짓 신을 섬기면 양심이 죽고 마비된다. 있는 지혜까지 사라져 버린다. 이것은 영의 법칙이다.
이 조건은 히브리인들에게 너무나 합리적이기도 했다. 설마 자신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었는데 다른 신을 섬길까 할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히브리인의 속성은 그 보다 더 부패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계율로 묶어 주셨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 말은 그동안 히브리인들이 다른 신을 섬겨 왔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사실 이는 히브리 민족적으로 뼈속까지 스미도록 체험한 것이었기 때문에 계명으로 묶을 필요도 없는 fact였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의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의리와 신의도 없는 민족이라는 것이 가나안 생활에서 증명된다.
여기서 말한 신이란 무엇인가? 당시에는 수많은 종류의 신들이 있었다. 각 나라마다 각 개인마다 하나 이상의 신들을 가지고 있었다.
히브리인들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자신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찬양하면서 난잡한 파티를 즐긴다. 눈 깜작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특히 10가지의 재앙으로 애급을 치시던 하나님과 홍해바다를 동풍으로 가르시던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일으킨 일이었다.
당시 히브리인들은 무엇이 참 신이고, 무엇이 거짓 신인지 조차도 분간할 능력이 없었던 것 같다. 신성이 죽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만 해도 뱀과 새 등을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뱀이나 새 뿐만이 아니라 염소나 소 그리고 들에 있는 곰 등도 신으로 섬김을 받고 있었다. 가나안의 원주민들도 바알을 비롯하여 몰랙, 일원성신 같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많은 신들이 있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속성이었다. 양심이었고, 정신이었고, 마음이었다. ‘금송아지“ 도대체 믿을 수 없었다.
“섬긴다.”는 뜻은 모신다는 뜻이다. 의지한다는 뜻이다. 의탁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모든 일상과 모든 문제를 의지한다는 것이다. 맡긴다는 뜻이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제 다른 신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돈신, 금신, 명예의 신, 권력의 신, 등등 다른 물체나 힘을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만 의지하라는 말이다. 다른 것들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 아니다.
Message No. 38.
두 번째 계명 (1)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장 4-5)
인류 역사상 신이 나타나서 내가 바로 유일한 참 신이라고 선언한 적은 여호와 외에는 없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이 먼저 와서 길을 닦았다. 사탄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하나님으로 위장하고 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을 섬기는 자들에게 사탄으로 위장하여 임하지 아니하신다.
사탄의 속성은 거짓이지만 하나님의 속성은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으로 속일 수가 없다. 빛이 어둠으로 위장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동안 인류는 수많은 종류의 신을 섬겨왔다. 그러나 그들 중 그 어떤 민족도 참신을 제대로 찾아 섬겨보지 못했다. 그것은 인류가 섬겨온 모든 신들이 가짜라는 결론이다. 가짜는 허상이고 우상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분명히 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우상과 하나님과의 차이는 단 하나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형상이 없는 것이고 우상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형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도, 무엇으로도 자기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하셨을까? 형상을 만들려면 먼저 그 신이 인간의 상상에 잡혀야 하고 생각에 잡혀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 속에 잡일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보다 크고 넓다. 그 이름은 광대한 권능이다. 그는 지혜고, 바람이고, 뇌성이다.
계시록에는 너무 찬란하고 거대한 빛이라서 가까이 갈 수도 처다 볼 수 없는 분이라고 했다. 바울은 예수님의 빛을 보고 눈이 멀어버렸다. 그의 본체는 사랑이고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다.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누가 무슨 방법으로 보고 외워서 조각한단 말인가? 그 엄청난 빛을 어느 형상 속에 가둘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형상은 지상의 존재하는 모습이 아니고 지상에서 표현될 수 없는 너무 너무 거룩한 모습이다. (계시록 참조) 구약에서 여호와는 바람 같은, 불같은 모두 상상이 불가능한 모습으로만 자신을 나타냈다.
말씀을 형체와 할 수 있겠는가? 바람도 아니고 바람 같은 분을 형체 화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준 두 번째 계명에는 많은 우주의 법칙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조각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다듬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손으로 새길 수 있는 것은 신이 아니고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신이 아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인간에게 아무 것도 주지를 못한다. 죽은 우상이기 때문이다. 허상을 실상화 하는 것은 우상이다. 허상을 실상으로 믿는 것도 우상이다.
“너를 위하여 우상을 새기지 말라” 새긴다는 말은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자신이 자신의 신을 만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 아닌 것을 신처럼 만들지 마라는 것이다.
허상을 실상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허상을 능력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마음에 분노를 새겨 놓고, 그 분노를 섬기는 경우도 있고, 미움을 새겨놓고, 그 미움을 섬기는 경우도 있다. 원망과 질투를 새겨 놓고 그것을 섬기는 경우도 있다.
“섬긴다.”는 것은 마음을 준다는 것이다. 관심을 준다는 것이다. “절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에 굴복한다는 뜻이다. 그것에 굴복함이 심해지면 모든 이상에 균열이 생기고 결국에는 망가진다.
자기가 만든 것에 자기가 굴복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가? 자기가 만든 분노 앞에 마음이 무릎을 꿇는 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가. “그것들에 절하지 말라” 자신의 마음을 그것에 쏟아 붓지 말라는 것이다. 정성을 쏟아 붓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허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것은 아무런 힘도 없고, 그것은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허깨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증이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모독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자신들의 마음에 많은 신들을 새기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새긴 신을 섬기고 있다. “너희는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 절하지 말라” 경배나 숭배나 목숨을 다해 바치는 대상을 마음에 두지 말라는 뜻이다. 그것을 우상이라고 했다. 성경은 금-은 동을 숭배하는 것도 우상이라고 했다.
“나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그 죄를 자식에게 두어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고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천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실 우상을 숭배할 때 엄청난 댓가를 받게 되어있다. 허상을 섬기면 거기서 파생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거두어야 한다. 두려움을 품으면 그것이 지닌 독성을 맞아야 한다. 분노를 품으면 그것이 일으키는 부작용을 감당해야 한다. 모두 영혼을 죽이는 것들이다 마음의 지옥을 건설하는 자재들이다. 사람의 손으로 새겨진 우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마음을 주면 그곳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움직이고, 눈물을 흘리고, 표정을 짓고, 모두 우주의 신비한 법칙이다.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 아니다.
Message No. 39.
두 번째 계명 (2) 우상의 실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사랑하는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더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22: 2)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이 소년(성년?)이 되었을 때 모리아산에서 재물로 바치라고 한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특별히 점지해 준 하나밖에 없는 아들, 24년 동안 약속을 해 오다가 마지막으로 상수리나무 아래서 송아지 고기와 우유 그리고 버터를 대접받고 확언을 준 후 (“네 아내 사라가 내년 이맘 때 아들을 안으리라”) 얻게 해준 아들, 그것도 모래알 같이 많은 인류의 조상이 되게 하리라는 약속을 품은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려가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이다.
이는 바치는 아브라함 뿐 아니라 졸지에 제물로 지정된 이삭의 멸망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유도 묻지 않았다. 그냥 그 명령을 따랐다. 이삭도 아버지의 명을 따랐다. 아브라함은 많은 갈등을 했을 것이다. 그 명령에 대해 의심도 해 봤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결론은 순종이었다. 다른 기록이 없다.
이때는 십계명도 없었다. 따르지 않아도 어떤 벌이나 부정적인 대가를 겪게 된다는 성문화된 법이 없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법리적이지도 않았다. 윤리적이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은 천상의 법으로도, 지상의 법으로도, 우주의 법으로도 정당하지 않다. 정당하지 않은 일을 시킨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이 살려 주겠지 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해석으로 이 부분을 미화시킨다. 그러나 누가 들어도 억지다. 자연스럽지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신앙이 될 수 없다.
줬다 뺏어가는 것은 선이 아니다. 법칙도 아니다. 더더구나 아비더러 아들을 죽여 재물을 삼으라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도 어긋난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몰라도 일단 태어나면 그 아이가 독립할 때까지는 부모가 보호해 주는 것이 우주의 암묵적(implied) 법이다. 이것은 암묵적인 천상의 계명이다. 천상의 계명은 모든 법 위에 있는 Supreme Law다.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살인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그에게 돌을 던질 신도 인간도 없을 상황이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앞으로 상종을 안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명령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양육하고 있지만 이삭은 자기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것만이 여기서 찾을 수 있는 합리적 이유다.
모든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육신의 주인은 흙이다. 그러나 그 흙도 하나님의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자녀교육에 대한 지침이 들어 있다. 인간 편에서의 죽음은 흙으로 창조된 껍질을 벗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다.
오늘날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교육에 있어서 만족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에게 주어진 자녀가 자기의 것이라는 데에서 기인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의 모든 것을 설계하고, 예정하고, 섭리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지도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인생의 설계도나 지도는 하나님이 그려야 한다. 그분의 소관이다.
모든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모든 영혼은 이 땅에 올 때에 이 땅에서 수행해야 할 목적을 할당 받아 내려온다.
육신의 부모는 영혼의 거처를 만드는데 기여 했을 뿐이다. 그들의 자녀들은 가능하면 빨리 하나님께 부여받은 바로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훈련받고 현장으로 파송되어 그 일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끝까지 그들의 아이들을 붙들고 있음으로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참 성업을 방해 한다면 그들 속에서 영과 육의 균열이 생기게 되고, 그래서 그들은 불행을 겪게 될 수도 있다.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신의 뜻을 찾아 자기들이 가야할 길을 가도록 해 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일이다. 부모들이 설계한 설계도를 이루게 하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이 아니다. 부모는 그 아이의 주인이 아니고 아이는 부모의 아바타가 아니다.
인류의 불행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착각에서 일어났다. 인간은 빈손으로 왔고 빈손으로 간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들은 다만 청지기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자녀도 마찬가지고 부도 마찬가지고 명에도 마찬가지다. 갈 때는 다 내려놓고 가야 한다. 농부가 농토에서 일을 하다가 해가 저물면 모든 연장을 내려놓고 집으로 가는 것과 같다.
그것을 알리려온 모든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종국에는 주인과 주인의 상속자까지 죽여 자기들이 인생의 주인노릇(마음의 주인)을 하려 했다. 누가? 지도자들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진실을 알고 축복으로 대신한다. 이는 아브라함을 통해 인류가 바로 알아야 할 사랑에 대한 교훈을 만드신 것으로 봐야한다. 우상의 대상, 경배의 대상에 대한 정의를 주신 것이다.
단순히 어떤 형상만이 우상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아비나 어미를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기고 하나님보다 더 중히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더 관심을 갖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라는 의미다.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 아니다.
Message No. 40.
세 번째 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You shall not misus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장 7절)
여기서 “망령되이” 가 영어로 misuse 다. 아마 abuse도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즉 신의 이름을 잘 못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잘 못 사용하다”란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져볼 수 있다. 인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신의 이름을 사용해야 잘 사용하는 것일까?
보통 인간이 신의 이름을 부를 때는 기도를 할 때다. 기도를 할 때 신의 이름 앞에 혹은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기도를 한다. 악한 자든 선한 자든 기도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 대상이 다를 뿐이다. 이것은 수 십 만년 아니면 수 만년 인류와 함께 내려온 인간의 본성적 종교행위다.
이것은 우리 마음에 내재되어 있다가 인간의 부패로 인하여 미아가 된 영이 본향(original divine home)을 향해 내는 구슬픈 진동이요, 꿈틀거림이요, 울음소리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인간의 종교성이라고 부른다.
기도란 이런 종교성에서 나온 행위다. 인간이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어떤 일을 위해 초자연적인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본능적인 행위다. 신의 이름은 바로 이때 사용된다. 신의 이름은 육적인 자아가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 영적 자아가 사용하는 용어다.
특히 어떤 위기 상황을 겪게 되면 신의 이름이 본능적으로 터져 나온다. 이것은 영의 소리다. 어린 아이가 위급한 상항에 처하면 “엄-마 아!” 하면서 달음질로 도망을 하는 것과 같다. 울면서 엄마를 부르는 것은 본성적인 행동이다. 별 의미가 없다. 종교적인 사람도 위기가 올 때 본능적으로 신의 이름을 부른다. “아이고 하나님!”, “아이고 주님!, 모두 긴급 상황에 처했을 때 내는 내면의 소리다. 이것은 인간의 권리고 특권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신의 도움을 꺼내 쓸 수가 있다. 이런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의 도움을 체험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신의 이름이 인간에 의해 사용될 때는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될 때다. 이는 허락된 사용이다. 그리고 인간의 권리다. 아무도 나무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잘못 이용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말 그대로 악을 위해 사용하는 행위다. 탐욕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탐욕에 대한 판례는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아담하와의 사건이다. 그들은 사랑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을 탐했다.
탐욕이란 분수 이상, 필요 이상을 탐하는 것을 말한다, 밥상 앞에서 더 큰 밥상을 탐하는 것도 탐욕이다. 명예 앞에서 더 큰 명예를 탐하는 것도 탐욕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용량은 70인데 100을 탐하는 것도 탐욕이다. 권력이 있는데도 더 큰 권력을 탐하는 것도 탐욕이다.
사랑 앞에서 다른 사랑을 탐하는 것도 탐욕이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욕심 부리는 것도 탐욕이다. 작으면서도 큰 체 하는 것도 탐욕이다. 인간이 인간 이상이 되려고 하는 것도 탐욕이다. 단테는 이 탐욕을 두꺼비로 비유했다.
음란으로 연결된 것을 꿈꾸는 것도 탐욕이다. 단테는 이 음란을 염소로 비유했다. 더러움과 연결된 것을 탐하는 것도 탐욕이다. 방탕함과 연결된 것을 탐하는 것도 탐욕이다. 시기와 분노 미움과 거짓, 불화의 분파 파당과 이단과 연결된 것을 탐하는 것도 탐욕이다.
이런 것을 위해 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misuse 이다. 이것을 위해 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misuse이다. 이런 것을 위해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misuse 이다. “나 기독교 신자야” “나 가톨릭 신자야.” 이런 것은 말이 아니라 삶을 통해, 말을 통해, 행동을 통해 보여주면 된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남발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발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리라. 하나님은 이름 자체가 거룩하다. 거룩한 것은 거룩한 것을 위해 거룩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방언을 하고 이적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그때에 내가 밝히 말하되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느니라.” (현신애 권사 천국에서 예수님께 부인당한 사건도 그 한 예다)
신의 이름으로 아무나 축복하고, 대가로 축복 헌금을 수령하고, 신의 이름으로 안수하고, 대신 안수 헌금을 수령하고, 신의 이름으로 형제를 심방하고, 대신 심방 헌금을 수령하고, 신의 이름으로 상담을 하고, 대신 상담 헌금을 수령하고, 신의 이름으로 은사 기도를 하고, 대신 은사 헌금을 수령하고, 신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대신 치유 헌금을 받아내고, 신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대신 권능 임함 헌금을 받아내고, 신의 이름으로 방언이 터지게 하고, 대신 방언 은사 헌금을 받아 내고, 신의 이름으로 병을 고쳐주고, 대신 치료 헌금을 받아낸다.
신의 이름으로 은사를 팔고, 신의 축복을 팔고, 신의 은총을 팔고, 신의 성탄을 팔고, 신의 고난을 팔고, 신의 십자가를 팔고, 신의 부활을 팔고, 신의 사랑을 팔고, 신의 이름을 팔아서 돈을 빌리고, 신의 이름으로 사기를 치시고, 신의 이름을 팔아 돈을 걷으시고 신의 이름을 팔아 간음을 하시고, 신의 이름으로 선거를 하시고 …. 모두 이런 분들이 주의해야 할 계명이다.
Misuse 란 육신의 정욕을 위해 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욕을 위한 사용” 우리는 기도를 할 때도 자신의 기도가 정욕을 위한 기도가 아닌지(wrong motive) 한번쯤 생각하고 기도해야 된다. 죄를 위해 신의 이름을 상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 아니다.
Message No. 41.
네 번째의 계명: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들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옛 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20장 8-11)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이 계명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진다. 전반부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이고 후반부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외형적인 차이는 유대교는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고, 기독교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킨다. 그렇다면 안식일과 주일은 어떻게 다를까?
어느 나라나 건국일이 있다. 그리고 그 날을 기념한다. 미국은 독립 기념일, 한국은 개천절이 그 날이다. 안식일은 단순히 안식하는 것에 국한 되시킨 것이 아니라 천지창조를 기념하라는 뜻도 담겨 있다. 우주의 개천절을 기념한다는 뜻이다. 그날을 공유일로 지정하여 쉬라는 뜻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쉬셨다” 는 것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쉬셨다는 것은 반대로 피곤이 있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절대 자”라고 표현했다. 그런 절대자에게 피곤이 있었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쉽게 이해 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인격체로 설명했다. 우리처럼 감정이 있다는 말이다. 구약은 하나님을 ‘슬프고’, ‘후회하시고’, ‘분노하시고’, ‘진노하시고’, ‘질투하시고’, 모두 풍부한 감정을 나타낸다.
물론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인격체이시되, 완벽한 사랑의 ‘원’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한 위이신 그분의 아들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분의 영이신 성령이 그렇게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이는 절대 틀릴 수가 없는 사실이다. 일점일획의 분노도 없고, 미움도 없고, 질투도 없는 완벽한 사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과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왜 이렇게 다른가?
구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록한 그들의 기록이다.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에게 소개된 하나님, 그들만의 하나님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들만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 후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남긴 기록이다. 그 많은 악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심은대로 거두는 자연의 법칙을 거슬리지 않고 그들만의 하나님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런 하나님이었을 수가 있다.
그러나 신약은 천상에서 오신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친히 만민이 볼 수 있도록 모든 창을 열고 보여주고, 들려주고, 입증해 보여주신 기록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틀릴지 모르나 신약을 틀릴 수가 없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을 주었다고 했다 안식일을 복을 주었다는 것(The Lord blessed the Sabbath day and made it holy”은 그 날을 재수 좋은 날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역으로 복 받지 못한 날도 있다는 말이다. 속된 말로 재수 없는 날도 있다는 말이다. 어떤 날은 좋은 일이 일어나고 어떤 날은 나쁜 일이 일어난다. 그것을 흔히들 일진이 좋은 날, 일진이 나쁜 날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 안식일을 축복 하셨을까?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으려면 축복이 필요하다. 일을 하지 않고도 즐겁게 보내려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받아야 한다. 어차피 인간은 일을 해야 식물을 얻을 수 있도록 운명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바꿀 수 없는 운명의 골격이다. 뼈대다.
“거룩히 지내라.” 아무렇게나 보내지 말고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고 깨끗이 하라는 뜻이다. 마음을 purify 하라는 말이다. 신약에서 purify는 ‘정결케 하다’이다. 회개를 의미한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6일 동안의 세속의 생활과 성별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마음에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 미움을 품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 분노를 품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 거짓을 품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일을 지켜야 하나 안식일을 지켜야 하나?
특정 교단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사람들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죽여 땅속에 묻어버린 날을 안식일로 기념하기도 한다. 인류의 구세주가 땅속에 묻혀버린 절망과 슬픔과 통곡의 날이 안식일이 될 수 있겠는지 영적 상식이 있으면 생각해볼 일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여 묻어버리고 안식일을 지켰다. 눈에 가시 같은 예수를 죽여 묻어버린 그날이 그들에게는 기쁨과 안식과 평안의 날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던 주의 백성들에겐 절망과 고통과 슬픔의 날이다. 어둠의 날이다. 주님을 잃어버린 날이다. 주님이 무덤에 있는 동안은 인간에게도 죽음의 순간이다. 복된 날이 아니라 저주의 날이다. 안식이 없는 날이고, 쉼이 없는 초상집이다. 슬픔과 비통함과 불행의 날이다. 절망의 날이다.
그러나 주님이 부할 하신 날은 희망의 날이고, 완성의 날이고 기쁨의 날이다. 길이길이 기념해야 할 날이고 잔치를 해야 할 날이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주일을 지켜야 한다. 주님이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심으로서 구속사역을 완성한 날이기 때문이다. 영혼 구원의 기념일이고, 우리 마음에 천국을 건설한 건국일이다. 이 기쁜 날을 즐거워하고 기념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다. 개인이 받은 환상도 개인이 받은 계시도 이 진리를 뛰어 넘을 수 없다. 할렐루야.
이 세상 어떤 계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슬릴 수 없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율법의 얽매임에서 벗어나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외치고 또 외쳤다. 모든 율법과 규례는 십자가에 못을 박아 버렸다.(골2:13-14) 유대인들도 짐 지지 못한 율법이요, 사망의 법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율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은혜의 법 안으로 들어오라고 외쳤다.
물론 그의 말은 할례를 주제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율법은 단순히 할례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율법을 의미한다. 모든 율법, 절대로 없어지지 말았으면 하는 율법까지도 포함한다. 그의 말에 얼마나 깊고 오묘한 뜻이 들어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든 율법의 행위는 십자가로 흡수되었다. 모든 제도, 모든 유전, 모든 절차, 모든 의식, 모든 형식이 십자가로 완성되었다.
옛 계명을 폐하고 새 계명을 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 아래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은혜다. 형식에 얽매이는 그 어떤 것도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을 띄어 넘을 수는 없다.
모든 율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믿음이고 은혜라고 바울은 가르쳤다. 사랑과 은혜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은 그 어떤 행위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우리는 자유하다.
죽음의 날은 안식이 될 수 없으며 기념이 될 수도 없고 건국일이 될 수도 없다. 구속사역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안식이 있을 수 없다. 천국이 창건되지 않았는데 창건일이 있겠는가?
영혼구원이 미완성인데 안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다. 주님이 땅속에 있을 때는 이 땅에 절망만 있을 뿐이었다. 비통함만 있을 뿐이었다.
주님이 당당하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날이 인간이 기념해야 할 날이고 기뻐해야 할 날이고 축하하고 축복받은 날이다. 이는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 아니다.
Message No. 42.
다섯 번 째 계명 부모를 공경하라.
“너희 무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이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장 12절)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다른 계명과는 달리 확실한 결과까지 들어있는 계명이다. 장수의 비결 중 하나 이기도 하다. 이는 신약 성경에도 확인 되어있는 언약이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엡 6장 1-2) “약속 있는 계명.” 보장된 계명이란 뜻이다. 부모 공경이 보장된 장수의 비결 뿐 아니라 부(wealth )의 원인이라고까지 했다.
“이 땅에서 잘되고” 는 물질적인 부 뿐만 아니라 성공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신약에서는 성공의 비결 중 하나로 부모 공경을 든 것이다.
사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뿐 만 아니라 누구라도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하고 성공하게 된다.
어느 나라 어떤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법칙이다. 반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하면 어느 나라 어떤 사람이라도 장수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 또한 우주의 법칙이다.
고대에는 거의 모든 가족들이 함께 살았다. 우리나라도 그런 사회제도가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 다 함께 모여 사는 사회였다. 지금도 그런 사회가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가정의 위계질서가 중요하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만 평안한 가정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각 가정 가정이 평안해야 각 부족들이 평화롭고 모든 민족이 평화롭다. 가정이 삐걱거리면 그 가정이 속한 부족이 삐걱거리고 그리고 온 나라가 삐걱거리게 된다.
하나님은 우주 안에 흐르는 우주의 법칙을 약속으로 묶어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그 법칙을 이용하여 장수하고 성공하게 해 준 것이다.
공경이란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고 존경 한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3가지의 부의 법칙이 나와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부모공경이다. 성경이 보장하는 부와 장수의 비결이다. 구약에도 보장을 했고 신약에도 보장을 했다. 성경에 이렇게 확실하게 직설적이고 명료하게 밝혀준 진리는 많지가 않다.
부모 공경은 신구약 성경에서 밝혀준 가장 확실한 부의 길이고, 장수의 길이다. 성경이 보장 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보장 한 것이고, 주님이, 성령님이 보장을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라기 3장을 근거로 십일조가 하나님이 보장한 부의 길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엔 그런 조항이 없다. 이는 어떤 분들에게는 슬프겠지만 진실이다.
신약에서 보증한 부의 법칙은 십일조가 아니다. 부모에 대한 효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소득 10분의 일을 자선이나 남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우주 안에 있는 부의 원칙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율법에 그것을 담아 왔다. 그리고 자선에 신경을 쓴다.)
특정 종교를 떠나서 부모님께 효도한 사람들이 잘 된 경우는 너무나 많다. 일일이 셀 수도 없다. 현대인들이 점점 불행하게 사는 것은 가족이 깨지고, 흩어지고, 부모와 자녀들이 남남처럼 살기 때문이다. 바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아주 가까운 한 친구는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장남이 아닌데도 부모 공경에 최선을 다 했다. 일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는 엄청난 구조조정의 열풍을 견디어 냈고, 미국의 굴지의 미사일 만드는 회사 엔지니어로 있다가 지금은 보잉사의 이사가 되었다. 한국 사람으로서 그가 거기까지 올라가게 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영적, 우주적 도움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이는 그 자신이 하는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또 다른 분 역시 효자다. 부모님 모시기를 옛날 우리 조상들이 하던 것처럼 모셨다. 그가 부자가 되자 건전하지 못한 사업(카지노)에 손을 댔다가 완전히 망하게 된다. 갑자기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사업에도 실패를 하고 쉽게 일어날 수 없는 낭떨어지까지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다시 제기하여 지금은 여전히 성공한 갑부로 살고 있다. 우리 주위에서 효자가 성공한 사례는 너무나 많다.
특별히 나는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아주 자세히 Research 해야 할 이유가 있어서 깊이, 아주 깊이 연구하고 조사한 적이 있다.
한국 충남 한 시골 마을에 아주 가난한 모자가 살고 있었다. 얼마나 가난 했는지 보리 고개가 되면 끼니를 이을 식량이 없어 굶을 정도였다. 어느 날 그 엄마가 영양실조로 쓰러져 누웠다. 이때는 보통 이렇게 드러누우면 일어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코스였다. 이에 아들이 자기 엉덩이 살을 베어 그것으로 고기 국을 끓여 엄마에게 먹게 하여 가운을 차리게 만들었다. 전설 같은 효심으로 어머님을 일으킨 것이다.
그 후 그 아들이 군대를 가게 됐다. 홀어머니 혼자 남게 된 것이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동네 한 유지가 그 효자 아들이 복무하는 대대장에게 그 사연을 편지로 알려 아들을 제대 시켰다. 그런데 그 아들의 자손들이 얼마나 잘 됐는지 지금은 대 재벌로 살고 있다. 효도는 부의 법칙이고 장수의 법칙이다. 이것은 수 천 년 우주가 보장했고 성경이 보장했다. 이는 하나도 어려움 계명이 아니다.
Message No. 43
여섯 번째 계명 *살인하지 마라.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장 13절)
살인이란 무엇인가? 살인이란 사람의 생명을 없애는 것이다.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말한다. 짐승을 죽이는 것은 살생이라고 말한다. 죽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만물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모든 물질은 자연적으로 소멸할 때가 있다. 사람도 죽을 때가 있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육체와 영이 갈라질 때다.
흙에서 온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에서 온 영혼이 그 본향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죽음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사라지는 것을 소멸이라고 부르고, 다시 오는 것을 생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자연의 순리요, 흐름이다. 그래서 법칙이다. 태초에 창조된 이 법칙은 이 우주 안에 설치되어 있다. 흙으로 태어난 우주안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 누구도 이런 생명과 죽음의 법칙을 건들 수 없고 침해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창조자에 대한 도전이다.
“살인하지 말라” 는 것은 사람이 그 흐름을 무시하고 때가 되기 전에 갈라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의 주인은 단 한분이다. 짐승이 됐건, 인간이 됐건, 참새가 됐건, 곤충이 됐건, 네 것, 내 것이 없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필요에 의해 허락 된 것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소유물을 탐할 수 없고, 건들 수 없다. 신의 주권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내 생명이든 네 생명이든 생명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 다른 인간의 생명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피카소가 그린 그림을 마음에 안 든다고 욕을 하거나 특정 부위를 물감으로 덧칠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의 작품이다. 살인을 한다는 것은 그 작품을 훼손하는 것과 같다. 뱃속의 태아도 마찬가지다. 내 것이 아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욕을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향해 욕을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뭔데 피카소의 작품에 대고 욕을 하고 미워한단 말인가?
그리고 피카소가 우리의 마음에 맞춰서 그린 그림이 아닌데 왜 그 작품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야 한단 말인가?
왜?
하나님은 피카소보다 위대한 창조자시다. 모든 것은 만세전에 세우신 계획과 목적을 위해 움직이게 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알 수가 없다. 본인 자신도 본인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알 수가 없다.
인간을 영어로 Human Being 이라고 한다. 진행형이다. 인생은 진행형인 것이다. 인생은 계속하여 만들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진흙으로 반죽을 하고, 유향으로 색깔을 만들고, 계속 손을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형이 부서졌다 만들어지고, 부서졌다 만들어지기를 반복한다. 처음에는 찰흙 덩어리, 반죽, 쪼그라진 형태, 펴진 형태, 그것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아주 예쁜 그릇의 형태를 갖는다.
그리고 가마 속에 넣어 굽게 된다. 마지막 가마 속에서 나올 때 도공이 원했던 모습을 한 도자기는 정품, 아닌 것은 비품으로 버려진다.
인생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 나라로 올라갈 때 완성된다. 그때까지 인생은 계속 진행형이다. 도공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나올 때까지 계속 만지고 계신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성화 과정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그 누구도 평가 될 수가 없다. 보여 진 모습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공만 생각한, 만들려고 하는 다음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어떤 모습을 거쳐, 어떤 과정을 거쳐 도공이 원하는 모습으로 다듬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자연히 흐르도록, 어떤 법칙으로 묶어 놨다. 하나의 생명을 건들면 다른 생명이 영향을 받아 파장을 일으킨다. 모든 생명은 이렇게 엮어져 있다. 이것이 자연이다.
예수님이 이 법칙에 대한 해석을 해 주셨다. 마음속에서 잠깐 일어났다 사라지는 미움까지도 살인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그분의 솜씨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욕하고, 미워하고, 살인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모상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메랑의 법칙에 따라 그 자신도 미움을 받게 된다. 또 이제는 우리가 성령이 거하는 전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전에서는 미움이 나갈 수 없고, 들어 올 수도 없다. 살인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부수는 것이고 파괴하는 것이다. -살인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Message No. 44.
일곱 번째 계명: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지니라.”(출20장 14절)
간음, 사실 성경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분야가 간음이다. 가능하면 리버럴하게 해석하고 싶은 것이 이 부분이기도 하다. 간음에 대한 기준치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어물쩍하게 기록한 이 간음죄를 주님이 아주 명확하게 정리했다.
간음이란 무엇인가? 간음죄란 생육과 관련된 ‘성’을 이용하여 자행되는 범죄 행위다. ‘성’과 관련하여 필요 이상을 탐하는 행위를 간음이라고 할 수 있다. 간음과 연결된 죄들은 음행, 행음, 음란, 사음이다. 성경은 간음을 3가지로 나누고 있다.
주님은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것” 까지도 간음죄에 포함시켰다. 주님이 주신 눈높이로 보면 이 간음죄의 그물에 걸리지 않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인간에게는 4가지 본능이 있다 그 중 한간지가 애 욕이다. 이 애욕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생육 그리고 번성함을 이루는 도구다. 사람은 10대부터 생리적 현상에 의해 신체의 발육현상이 나타나난다. 동시에 그것은 마음의 모든 이성적인 의지를 접수하고 순간이지만 사람을 감정적이게 만든다.
10대를 지나는 동안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이고 경험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는 20대까지도 계속된다. 그러나 20대 때는 그만큼 강해진 의지가 자아를 지킴으로서 생육에 대한 본능은 온순해진다. 이 과정을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간음이라는 죄를 마음에 묻히게 된다.
그러나 간음죄는 두 가지 방법으로 범하게 된다. 구약의 방법과 신약의 방법이다. 먼저 구약의 방법부터 알아보자.
구약에서는 ‘성’과 관련하여 3가지 형태의 간음 행위가 자행되었다. 첫째는 근친상간이다. 구약 시대 유대인들 사이에는 근친 상관이 있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첩과 상관하는 것을 비롯하여 아버지가 며느리와 상관하는 일 등, 가족끼리, 가까운 친족끼리 상관하는 일들이 암암리에 자행되고 있었다. 다윗의 아들이 다윗의 딸을 강간하는 일을 비롯하여 다윗의 장자 압살롬이 다윗의 첩 10명을 겁탈한 사건이 있었다.
다음은 음란(사음)이다. 이는 동성끼리 혹은 짐승과의 교미(debauchery,=호색, orgies= 음탕함)다. 구약시대에도 동성끼리 상관하는 일들이 있었다. 신명기 기록을 보면 동성애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까지 하고 있다. 여기에는 짐승과의 교미도 포함된다. 고대 유대인들은 유목민들이었음으로 들에 나가 짐승을 칠 때 양이나 다른 짐승들과 교미하는 일이 있었다. 이것을 금한 것이다.
다음은 남의 여인을 탐하는 간음(adultery)이다. 여기서 남의 여인이란 정의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 때 하와를 만들었다. 그리고 둘을 짝을 지어 에덴에 있게 했다. 그 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부부라고 했다.
하나님은 생육의 법칙에 의해 사람이 잉태를 할 때 그 잉태된 사람의 영혼을 보내게 된다. 하나님이 사람의 영혼을 이 땅에 내보낼 때 그 짝이 될 영혼도 내 보낸다. 물론 시간적인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각자에게는 하늘이 점지한 짝이 있게 된다.
그 짝 아닌 자들과 행하는 모든 성적 교류가 간음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짝을 찾았든, 찾지 못했든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점지해 준신 자신의 짝 아닌 모든 이성과의 성적 교류 아니 그에게 성욕을 품는 것이 간음이라고 했다.
그것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사건에서 잘 나타난다. 그녀는 5명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중 누구도 그녀의 남편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점지해준 자기의 짝이 아니면 간음이다. 하나님께서 점지해준 남자가 아닌 여자와 살았다면 간음이다. 직업여성이든, 상대가 미혼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자기 짝 외의 모든 이들과의 성적 행위가 간음이다.
앞에서 언급 했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마음에 남의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것까지 간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남에게 성적 욕구나 충동을 일으키는 행위는 어떻게 될까? 가증한 행음이다. 이는 계시록에 설명되어 있다.
그것을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서 일으켰건, 스포츠라는 이름 아래서 일으켰건 상관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럽고 가증한 행음이다. 다른 이의 시선을 끌기 위해 노출시켜서는 안 되는 부분을 노출 시키는 것도 가증한 행음이다.
성경은 그것을 이세벨의 행음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를 음녀라고 했다. 그래서 신앙인은 직업이나 취미를 갖는 것도 성령(The Counselor)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거룩하게 사는 길이다. 세속의 물결을 따라가지 않는 길이다.
“간음하지 말라” 우리는 마음을 관리해야 한다. 우리 마음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소유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물을 깨끗하게 관리하고 청결하게 보존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까?” 탐욕에서 벗어나면 된다. 필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됐든 죄가 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제공해 준다. 그것은 인간의 권리다. 그래서 하나님은 짝을 보내 주었다. 그런데 그 짝을 버리고 아니면 그 짝을 찾지 않고 아니면 정욕으로 눈이 어두워 짝을 잘 못 찾아 간음을 하면 안 된다.
회개해야 한다. 자기 것하고만 해야 한다. 어떤 외경에서는 하나님이 다른 이의 짝으로 보낸 이를 정욕이나 다른 이유로 자기 짝으로 착각해서 결혼한 것 까지 간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혼은 깨질 것이라고 했다. 간음은 우주의 질서가 깨지게 하고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그래서 오늘날은 이렇든 혼자 사는 사람이 많은 지도 모른다. 지키기 힘들 수도 있는 계명이다. 그러나 탐욕이 없으면 어려운 계명이 아니다.
Message No. 44
여덟 번째 계명:도둑질 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도둑질이란 무엇인가? 일단 만물의 소유주는 하나님이란 것을 전제로 풀어 보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모든 창조물을 맡기신 것 까지는 창세기에 잘 나와 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난 후 인간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된 것이 없다.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계속 창조물의 지배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빼앗겼는지 아니면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양도했는지 아니면 그냥 흐지부지 됐는지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땅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라는 문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창조물, 보시기에 아름다웠다고 좋아하셨던 그 창조물도 아담과 함께 부패하여 버려졌을 것이라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가 하나님의 소유라고 인정해야만 하는 것은 그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숨소리 때문이다. 우주 속에는 하나님의 숨소리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로 충만하다. 그 우주 속에는 생성의 법칙이 있다. 자생의 법칙이라고 도 할 수 있다. 스스로 치유하고,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 소멸하고, 스스로 생성을 반복한다. 다 땅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즉 땅이 가진 능력이요, 땅이 가진 창조력이다. 비록 땅이 저주를 받았다 할지라도 땅은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자신을 지탱해 왔다. 땅이 저주를 받았든 아니 받았든 소유주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도둑질이란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것을 말한다. 썩은 것이든, 저주를 받은 것이든, 벌을 받고 있는 것이든,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든, 소유주는 하나님이다.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잘못을 하여 집밖에 쫓겨나서 벌을 받고 있다고 해서 그 아이가 고아가 되는 것은 아니고 그 부모가 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아이를 데려가는 것은 유괴고, 그 아이를 때리는 것은 폭행이고, 그 아이의 소유물을 훔치는 것은 도둑질이다. 억지로 뺏어가는 것은 강도질이다. 거짓말로 주게 하는 것은 사기다.
사람은 자기 것이 없다. 태어날 때 알몸으로 왔다. 그러나 부모는 알몸으로 왔다고 알몸으로 기르지 않는다. 올 때는 알몸으로 왔으나 알몸으로 와도 되기 때문에 신은 알몸으로 오게 한 것이다.
그 아이에게 필요 물자는 이미 예비시켜 놨다. 부모를 통해, 부모의 친척을 통해 필요한 것을 제공받도록 예비해 놓으셨다. 모든 물자는 흐르고 돈다. 그것을 흐름이라고 부르고, 순환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내가 필요로 한 것이 다른 이의 관리 하에 있을 때 내가 필요로 함에 따라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든 내게 흘러오도록 되어 있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또한 그것을 필로로 하는 다른 이를 위해 흘러 보내야 한다.
흘러오고, 흘러 보내는 과정에서 나의 역할은 나의 필요가 끝나면 그것을 다시 흘러 보냄으로서 흐름을 계속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물의 주인이 법으로 제정해 놨기 때문이다.
만일 내게 흘러온 것을 다시 흘러 보내지 않고 꽉 붙들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도둑질이 형성된다.
도둑질은 흐름을 차단하는 행위다. 우주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앞으로 받을 사람의 것을 훔치는 행위다. 흘러 보내려고 하는 사람의 의무를 방해하는 행위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흐름이 차단되면 그것을 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리고 우주의 흐름은 꼬이게 된다. 불협화음이 생성된다.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얻어 쓰고 있는 것이다. 남는 것은 흘러 보내야 한다.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것도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든 것도 우리 것이 아니다. 모든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그분의 물건들이 돌고 돌도록 해 줘야 한다.
신약은 남의 것을 탐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으로는 이미 도둑질 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 세상에 나의 것은 없다. 영적으로도 없고, 육적으로도 없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나는 그것들의 경유지로서, 그것들이 나를 거쳐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해 줘야 하는 통로다.
경제는 순환이다. 순환을 차단하거나 막는 것은 도둑질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둑질이요, 둘째는 그 재물을 받아야 할 사람에 대한 도둑질이다. 이것은 법칙이다.
이 법칙을 어기면 처벌을 받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부와 세상이 주는 부는 차이가 난다. 하나님이 주신 부는 평안하다.
소위 재벌이라고 하는 이들이 감옥에 들어가는 이유는 모두 이 법칙을 어겨서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아직 내게 주어지지 않은, 도착하지 않은 물질, 아직 남의 수중에서 흐름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물질을 탐을 내거나 강제로 끌어다 쓰는 것도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흘러야 한다. 그 법칙을 어기는 모든 행위는 도둑질이다.
남의 집 소가 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모르는 때에 내가 모르는 방법에 의해 내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순리대로 (Right time, right way) 로 내게 와야 한다. 그 순리를 거스리거나 벗어나서 갖는 것은 도둑질이다. 남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도 도둑질이다.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 아니다.
Message No. 46.
아홉 번째 계명: 거짓증거 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False Testimony, 거짓 증거란 남을 해할 목적으로 하는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란 사실 아닌 말을 사실처럼 하는 것이고, 사실에 거짓을 섞어서 하는 두 의미의 말이다.
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고, 안 한 말을 했다고 하고, 듣지 않은 말을 들었다고 하고, 들은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고 하고, 보지 않은 것을 봤다고 하고, 본 것을 보지 않았다고 하고–모두 거짓증거다.
세상은 거짓말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지금이 진실 보다 거짓이 더 많은 시대인지도 모른다.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두 가지 법칙에 유의해야 한다.
첫 번째는 말의 법칙이다. 말에도 말의 법칙이 있다. 말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 하실 때 인간을 제외하고 거의 다 말을 사용해 만들었다. 말을 함으로서 그 말이 이루어지는 방식이었다. 이는 말이 말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이 있음을 말해준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Divine Power 가 들어있다. 그것은 능력이다. 그 능력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 “말이 씨가 된다.”도 말이 말대로 되는 Self-Power 가 있음을 암시한다.
앞에서 많이 언급했지만 유대인들은 광야 40년 생활을 하면서 여러 순간 몰살을 당하게 된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그들이 ‘말로 그들의 죽음을 불러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원망을 통해서다. “차라리 애급에서 죽었더라면 좋을 번 하였도다.”
말대로 된 것이다. 믿으면 믿는 대로 되는 것은 믿음의 법칙이다. 말을 하면 말을 한 대로 되는 것은 말의 법칙이다. “내가 한 말이 어디를 가든지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말로 축복을 하면 축복이 이루어지고, 저주를 하면 저주가 된다. 예수님이 열매가 없는 무화가 나무에게 저주를 했을 때 그 무화과 나무는 곧 말라져서 죽고 말았다. 말은 이런 능력이 있다. 그래서 말을 조심해야 하고 말을 주의해야 한다. 말에 대해 깊이 연구한 어떤 분은 사람이 말을 할 때 “축복”과 “사랑과” “평화”란 주제로만 말을 해야 한다고 한다.
성경을 보면 거짓 증거에 대한 예들이 나온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재판할 때 거짓 증거를 사용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을 잡기 위해 거짓 증거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 거짓 증거에는 왜곡도 들어 있다.
말을 할 때 주의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내가 하는 모든 말을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만일 내 속에 주님이 계시다면 내가 말을 하기 전 상상을 하고 생각을 하는 순간, 주님이 먼저 그 상상이나 생각을 보고 들었을 것이고 말을 한다면 그 말을 먼저 들을 것이다. 주님이 내가 한 거짓말을 맨 먼저 듣게 된다는 것이다.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이 먼저 듣게 된다는 것이다.
다메섹 길에서 바울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주여 뉘 시니이까?” 묻는 바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라고 대답한다. 바울은 예수를 핍박한 적이 없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울이 핍박한 예수께서 핍박받는 성도들 안에 계셨음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이 주님이 계신다. 성령님이 계신다.
주님은 우리가 한 말은 우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축복을 말하면 축복이, 저주를 말하면 저주가 온다. 이것은 법칙이다. 사랑을 말하면 사랑이, 평화를 말하면 평화가 이루어지는(manifestation) 곳은 맨 먼저 그 말을 들은 우리 자신이다. 그 다음, 그 말이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말이 지닌 창조성이고 능력이다.
다음으로 거짓에 대해서다. 모든 거짓은 악을 불러들인다. 거짓말을 하는 자는 반드시 거짓말을 듣게 되어 있다. 속이는 자는 속게 되어 있다. 거짓말은 한 자에게 아니면 다른 이에게 즉시 아니면 후에 당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법칙이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고 거짓을 쓰는 자는 거짓으로 망한다. 거짓의 원천은 마귀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고” 이는 우주의 이런 법칙이 있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누구를 해하려고 거짓 증거를 하면 그 거짓 증거를 맨 먼저 듣고 보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 5:3절을 보면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을 성령을 속인 것으로 간주하여 책망한 장면이 나온다. 이들은 베드로한테 땅 값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베드로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물론 베드로는 성령이 아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이 성령을 속였다고 책망 했다. 무슨 뜻일까? 이들의 말을 그들 속에 있는 성령이 먼저 들었으니 그들 속에 있는 성령을 속인 것이 되고, 베드로 안에 있는 성령이 그들의 말을 들었으니 베드로 안에 있는 성령을 속인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것은 좋다. 그러나 잘 못 살았을 때 바로 이런 결과가 나타난다. 감당해야 한다. 자신을 거룩하게 관리해야 한다. 귀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지킬 줄도 알아야 한다.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우리가 가진 말의 능력은 소중한 것이다. 소중한 것은 소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소중한 것이 오게 된다. 인생은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영과 더불어 주님과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듣고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보고 우리 일을 알고 계신다.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고 신앙이고 성공이다. 여기서 “이웃”이란 나 아닌 모두다.
Message No. 47.
열 번째 계명: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지니라.” (출20장 17절)
이웃의 소유물은 하나님이 그분들에게 하사한 물건들이다. 이웃의 아내도, 소도, 말도, 그리고 그것들을 하사 하신 데에는 목적이 있다. 그들에게 부여된 이 세상에서의 어떤 일(삶)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사하신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은 서로 서로 명주실처럼 촘촘히 얽혀 있다.
그러므로 이웃의 것을 탐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탐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성업을 방해하는 것이고, 마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주의 모든 것에 파장을 준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음에 남의 것을 탐하는 죄를 품는 순간 마음의 평온은 깨어지고 엉망진창이 된다.
우리는 신의 경륜에 의해 내 것이 된 것만 욕심내야 한다. 그것은 결코 부족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넘치고 말 것이다.
“Covet” = 탐내다. 탐욕은 죄고 또 다른 죄의 시작이다. 이는 마음의 죄를 말한다. covet란 행동이 있기 전 마음 상태를 말한다. 마음에 이웃의 것에 대한 탐욕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아합 왕은 느봇의 포도원에 대한 탐욕을 품었다. 그리고 그의 탐욕은 곧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전이가 되었다. 두 탐욕이 모아져 더 큰 탐욕이 되었고 그 탐욕은 여러 군데서 파장이 일어나게 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탐하는 순간 그의 인생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우리아도 죽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를 양 99마리 가진 부자로 우리아를 양 1마리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책망을 했다. 책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용서받았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길고 깊은 불협화음의 수렁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의 가정엔 평안이 없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사랑하는 딸을 강간하는 일을 비롯하여 사랑하는 장자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킨다. 압살롬이 그의 첩들을 대중 앞에서 겁탈하는 사건을 비롯하여 아들을 죽여야 자신의 왕권이 지켜지는 비극적인 삶, 그리고 아들들끼리의 보복과 살육, 그의 생은 결코 평안이 없었다. 이 모두가 명주실처럼 얽혀진 눈에는 보이지 않는 파장이다.
유대인은 그의 삶을 축복받은 자의 상징으로 미화하고 있는지만 어쩌면 그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더더구나 그가 왕위를 물려준 솔로몬의 삶은 일평생 우상과 여자들의 품속을 기어다니는 벌레 같은 삶이었다. 음행의 열매, 그러면서도 일평생 허무를 노래하다가 마지막에야 잠깐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는 짧은 진리 하나를 남기고 독창(매독?)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것을 어찌 우리아를 탐한 불협화음의 표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탐욕에 붙어있는 댓가는 이렇듯 무섭다. 이는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가 이미 자연의 법칙으로 심어 놓으셨다.
행동이 있기 전, 마음속에 담지 않아야 할 물건에 대한 지침이다. 행동이 발생하기 전 탐욕을 제거 해버리면 행동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남의 것을 탐하는 마음을 품는 순간 모든 자아는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 관리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메시지다.
마음에 울타리를 쳐서 이웃의 것들을 탐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삶을 경솔하게 살지 말라는 뜻이다. 매사에 주의 하라는 뜻이다. 이웃의 집도, 이웃의 아내도 탐하지 말라. 남의 재산도 그의 육축도 그의 종도 그의 모든 소유를 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자기가 할당받은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 타고난 삶이 있다. 그리고 각자 가지고 온 일이 있다. 이웃은 이웃대로 나는 나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성업을 위해 이웃의 것을 인정해 주고, 보호하고, 지켜줘야 한다.
그들도 그들이 관리하고 있는 재물의 일부를 다른 이에게 흘러 보내야 할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흐름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이웃이란 누구인가? 주님은 이웃에 대한 예를 강도만난 사람을 통해 정의해 주셨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자신 아닌 모든 사람이다.
유대인들을 전제로 할 때 그들의 부족이고, 그들의 민족이고, 그들 중 한 가정이다. 여기서 “네 이웃의 집과 아내와 종 그리고 그의 소유물”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남의 가정의 명예도 그 가정의 소유재산이다. 무형의 재산도 여기에 속한다. 사랑이나 화평은 무형의 재산이다.
남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도 이웃의 소유물을 탐하는 것도 포함 된다. 남의 집 가축이나 짐승을 탐하는 것도 해당한다.
우리가 회전 스시바에 가면 접시에 담긴 스시가 돌아간다. 그러면 자기가 먹고 싶은 것만 골라서 접시를 집어 자기 앞에 놓고 먹으면 된다. 나머지는 그대로 흘러 보내면 다른 사람들이 먹는다.
우주에도 회전 스시바처럼 물질들이 돌아간다. 그러면 내게 할당된 것만 가지면 된다. 나머지는 흘러 보내면 다른 이들이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태어날 때 누구에게나 삶에 필요한 것을 점지해 놨다. 그것은 인간의 Birth Right 이요 복지다. 순전히 선물이다. 하나님에 의해 제공된 남의 소유물을 탐하는 것은 죄다. 지키기 쉬운 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