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ssage No. 31.
10가지 재앙
“이제 내가 그 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상하게도 하며, 낮게도 하나니”( 출9:14, 신 32:39)
여호와가 이집트를 초토화시켜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만일 여호와를 창조주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이집트 사람들도 하나님의 모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집트가 히브리 사람들을 노예로 삼은 것을 제외하면 그들이 다른 민족과 차별 되어 여호와의 진노를 뒤집어 써야할 만한 이유가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무도 다른 창조물의 노예로 만들지 않았다. 아마 죄가 됐다면 이것이 큰 죄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누군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 사건을 기록한다면 아마 그렇게 기록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법칙뿐만 아니라 우주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를 가지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아무도 그 자유를 뺏어가서는 안 된다. 아무도 그 자유를 사서도 안 되고 팔아서도 안 된다. 이것이 변함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여호와는 애급 사람들이 섬기는 모든 신들을 초토화 시키면서 세상에는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처음 여호와는 모세를 통해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하는 능력을 선보인다. 이것은 재앙이 되지 못한다. 이미 바로의 신하들도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정도의 능력은 이집트 술사 뿐 아니라 웬만한 사람은 다 행할 수 있었다. 정식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오늘날의 용어로 Alchemy 라고 부른다. 오늘날에서 로마에 의해 유실되어버린 이 비급을 얻어 실제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하수와 모든 물이 피가 되게 했다. 이것 또한 바로의 술객들이 따라서 한다. 당시 인간의 능력이 어디까지 발전 되어 있었는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세 번째로 지면에 개구리를 갖다 놓는 재앙을 내린다. 역시 바로의 술객들도 따라서 한다. 그러니까 여기까지는 여호와와 바로의 싸움에서 무승부였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는 이집트 술사들도 뻔히 일으킬 수 있는 이적으로 대결을 벌렸을까?
그러나 네 번째부터가 문제였다. 여호와가 모세를 통해 티끌로 이가 되게 할 때 그때는 이집트 술사들이 더 이상 따라 하지를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항복을 하지 않았고 여호와는 모세를 통해 다섯째로 파리 떼 재앙을 일으킨다. 비로소 이때부터 바로와 모세의 흥정을 시작된다. 바로가 가라고 하면서 그러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할 때 모세가 바로에게 광야 사흘 길 쯤 나가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세의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흥정은 결렬된다. 성경은 바로의 마음을 여호와께서 조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가 홀로 북치고 장구를 친 셈이다.
여섯째로 애급의 모든 가축들에게 독종을 일으킨다. 온역을 일으킨 것이다. 일곱째 우박을 내리게 한다. 여덟째 메뚜기 재앙을 일으킨다. 아홉째 흑암재앙을 일으킨다. 열 번째 장자재앙을 일으켜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난 모든 생명을 말살한다.
하나님께서 애급에 내린 10가지 재앙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로의 술사들이 일으키는 방법과 완전히 달랐다. 바로의 술사들은 우주의 흐름을 이용하여 기술로 (불랙 매직= 흙 술사) 초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여호와는 말씀을 통해 일으켰다. 모세는 말을 했고 여호와는 모세의 말대로 이루었다.
애급 사람들은 모두 다 여호와 앞에서 초토화 되었고 여호와만이 참 신인 것을 알게 된다. 이집트 뿐 아니라 히브리인, 바로 왕 그리고 그 대신들도 알게 된다.
특히 뱀과 나일 강은 이집트의 신이요, 생명의 젓줄이었다. 여호와는 그것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역사다. 이스라엘 역사뿐 아니라 이집트의 역사고 이집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주변 나라의 역사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가짜 신들과 우상들을 대표해서 애급 신들이 화를 당했다. 가짜들의 실체를 직접 보게 하고 느끼게 했다. 가짜 신, 바로 그것이었다. 이집트에서 일으키신 열 가지 재앙은 인류가 섬기고 있는 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계시록엔 이와 비숫한 장면이 나온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고 각종 이적을 행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의 등장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땅에서 기적으로 사람을 모은다. 그러나 곧 하나님의 천사들에게 진압이 된다.
“나만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외에는 참 신이 없느니라.” 그리고 그것을 기록으로 만들어 모든 민족과 오는 세대에게 가르치게 했다. 오직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만 참 신이라는 것을 선포 하고 만대에 걸쳐 전하게 하였다.
이는 온 우주를 비롯하여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생명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그 분이 창조주 이시다는 것을 가르치고 알려야 할 지식이고 메시지라는 도그마를 만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유대 백성을 출애굽 시키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역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인류에 존재하는 유일한 참 신이라면 다른 곳에 있는 모든 신들은 자동적으로 가짜가 된다.
가짜는 허상이다. 허상을 숭배하는 세상, 허상이 지배하는 세상, 인간이 만든 그런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표본으로 남겨놓기 위함이 바로에게 내린 10가지 재앙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Message No. 32.
하나님의 교육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출15:22)
홍해를 거쳐 살아계신 여호와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한 히브리인들은 홍해를 나오자마자 수르 광야로 인도된다. 수르 광야는 유대 백성이 가나안 복지로 가기위한 길목이요, 히브리인들의 광야생활의 시작이다. 좁은 문 안에 있는 좁은 길이요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길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복지를 가기 위해서는 꼭 걸어가야 할 길이다. 그 길을 직통으로 뚫으면 3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가나안 복지가 있었다고 한다.
어떤 연유에선지 로마의 콘스탄틴은 시내 산을 시나이반도에 있다고 알렸다. 그리고 그쪽에 그럴 듯한 유물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아마 통치를 위해 그렇게 해야만 할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시내산은 시나이 반도가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곳에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믿는 자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시련을 당할 때, 히브리 사람들의 광야 40년을 비유한다. 인생길엔 누구나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이 있다고 말한다. 양 한 마리 키울 수 있는 풀 한포기 없는 곳, 채소 한 폭 경작할 수 없는 목마른 땅, 곡식 한 톨 농사할 수 없는 혹독한 사막 같은 인생의 여정에 대한 비유로 그만한 것이 없다. 아주 적절하다.
그곳은 뜨거운 햇빛, 목마른 땅, 사람이 산 흔적도, 사람이 지나간 흔적도 없는 땅, 길이 없는 땅, 죽음의 땅, 히브리 사람들이 그 광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그 땅은 죽음의 땅이었나? 그리고 정말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을 들어올 때 통과한 광야 40년 생활이 견디기 힘든 고통의 날들이었을까?
먼저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에 비교하여 광야생활을 숙고해 보자. 애급에 있을 때 히브리인들은 노예였다. 날마다 일을 해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오직 먹고 마시기 위해사만 일을 했다. 그 외에는 생각 할 수가 없다. 애급 사람들이 시키는 일이 그들의 일상이요, 매일 매일의 생활이었다. 일을 잘 못하면 눈에서 불똥이 튀고 등줄기가 찢어지고 피가 터지게 맞아야 했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꿈을 가질 수 없었다. 이것이 자유인과 다른 점이다.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죽어야 하는 것이 정해진 운명이었다.
그들의 운명은 점쟁이를 찾아갈 필요도 없을 만큼 훤히 보였다. 그들의 자녀들은 태어나기도 전 그들의 고된 일을 물려받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들은 맞고, 일하기 위해 태어났고, 맞고 일하기 위해 살았다.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는 인생 이었다.
대부분의 고대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는 문제는 생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는 먹기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노동 없이 그 문제가 해결 되었다. 물론 뜨거운 햇빛과 길이 없는 땅을 유리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뜨거워서 죽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다음으로는 얻어맞지 않아도 되었다. 육체적으로 얻어맞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학대를 당하는 것이다. 자괴감을 만드는 일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처절한 상처다. 그들은 이집트에 있을 때 존엄성이 없었다. 창의성도 없었다. 그냥 종이요 노예였다. 짐승처럼 주인에 의해 팔리고 주인에 의해 팔려가는 물건일 뿐이었다. 주인이 주면 먹고, 주인이 주지 않으면 굶고, 주인이 자라하면 자고, 주인이 일하라 하면 일하고, 그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창의성을 필요로 하지 않은 삶, 그것이 노예의 삶이다. 오늘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들의 존엄성을 짖밟는 이집트인이 더 이상은 없었다. 그 누구도 그들을 채찍으로 내리치지 않았다. 무엇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탐욕을 부릴 이유도 없었다. 그들이 살아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었음으로 땅이 척박하든 아니하든 별 상관이 없었다. 그곳에다 무엇을 쌓아놔야 할 이유도 없었다. 잠깐 지나가면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서 살아야 할 땅은 따로 있었다. 가나안 복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바로 자신의 땅을 갖는다는 희망, 자신의 나라를 갖는다는 꿈, 그 땅을 자신의 자손들에게 영원히 남겨 줄 수 있다는 희망, 이런 희망이 이었다. 이런 환경이면 기쁨과 감사가 충만할 환경이 아닌가? 이 세상에 이보다 더 나은 환경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고, 행복해 하지 않았고, 감사하지 않았다. 사실, 나무 하나 풀 한포기 없는 사막, 바위 덩어리만 이곳저곳에서 뜨거운 해 빛을 받아 더욱 뜨겁게 반사하고 있는 사막, 외형적인 모습만 볼 수 있는 인성의 눈으로 볼 때 절망이 맞는 결론이다. 두려웠고 불안한 것도 당연한 증상이다. 그러나 이런 증상은 하나님이 멀리 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인간이 죄의 법칙 아래 있을 때 일어나야 할 증상이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과 같이 사는 시대다. 하나님과 같이 있을 때 그런 증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도대체 먹는 물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양식은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걸 왜 저희가 걱정을 하고 있을까? 사막에 서서 내리쬐는 햇빛을 보니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들은 선과 악을 봤다. 그것은 이성적인 상황판단 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옳게 보였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들이 구하기 전에 그들의 필요를 먼저 주시지 않으셨을까? 사실 히브리 사람들은 나라를 건국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수 천대가 지나도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굳건한 나라를 창건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나라를 건국해야 할 사람들에게는 가져야 할 정신적 요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높이로 봤을 때 히브리 사람들은 나라는 고사하고 짐승의 우리도 건설할 자질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너무 오래 동안 노예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히브리이 자신이 그동안 가르쳐준 지식을 실생활에 나타내는지(demonstration) 나타내지 못하는지 보고자 했다. 자기 자신을 자신이 알려 준대로 알고 있나 없나를 보고자 하셨다. ‘너희는 어제의 노예가 아니다. 너희는 과거의 너희가 아니다. 너희는 지금 바로의 곁이 아니라 하나님 곁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경이롭던 창조주 신 하나의 능력에 대한 체험을 과거로 장사지냈다. 믿음을 생활에 활용하지를 못했다. 단 한 발짝도 믿음으로 나아가지를 못했다. 그들의 경험은 죽은 경험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뿌려주신 씨앗이 증발해 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경험이 없는 사람처럼 이성의 지배 아래서 허우적거렸다.
홍해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런 엄청난 시현을 망각해 버렸을까? 이들은 영적인 세계에 대해 무지 했다. 인간의 이성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초 의식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님께는 죽음도 목마름도 부족함도 염려도 없다는 것을 몰랐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 인성으로는 나라를 창건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있었다.
Message No. 33.
원망의 결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출15:24-25)
히브리인들이 가나안복지로 향하는 광야 길에서 처음 만난 장애물은 쓴 물이었다. 물은 있었으나 마실 수 없는 물, 그림의 떡, 그래서 그들은 원망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원망은 창조자의 자세가 아니다. 원망은 지도자의 자세도 아니다. 원망은 희망을 품은 자의 자세도 아니다. 원망은 미움에서 나온다. “네 탓, 네 탓,” 애급에서 사용하던 삶의 패턴이었다, 이집트서 배우고 체득한 생활의 구습이었다. 종의 근성, 노예의 근성이었다. 그들은 원망했다
이것은 정확하게 에덴에서 선악과를 먹은 후 아담에게서 일어났던 증상이다. 노예는 자기의 의지로 어떤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일을 시킨 사람에게 핑계하고 원망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유인은 그렇지 않다. 주체자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안 해도 되는 완벽한 자유와 권리가 있는 상황에서 자기 스스로 (자유의지로)한 일은 자기가 주체자다. 자기가 그 행동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 행동의 책임은 주체가 져야 한다. 그러므로 죄는 아무에게도 핑계할 수 없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있었고 꿈이 있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든지 평화고 사랑이다. 40년의 광야 생활은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시간이었다. 하루 내내 먹고 그리고 하나님만 찬양하면서도 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없었다. 신성이 부패해 버려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힘들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
은혜에는 두려움이 없고, 은혜의 영토에는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이 그들의 Counselor였고, Supplier였다. 광야로 들어오기 전 히브리사람들은 일용할 양식과 마실 물을 얻기 위해 삶 전체를 바로에게 바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거저 주셨다.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렇게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빈곤을 느꼈다.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 평화의 신 앞에서 허깨비 같은 환경을 두려워했다. 그 많은 체험과 그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면서 의심했다. 불평했다. 원망했다. 날마다 음식을 제공해 주는데도 염려했다. 오늘 두려워할 것이 없으면 내일 것을 끌어다가 하기도 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상상하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공급받았다. 광야 40년 동안 단 한명도 목말라 죽지 않았고 배고파 죽지 않았다. 단 한명도 음식을 위해 땅을 판적이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부족이 있을 수 없다. 단 한명도 길을 잃은 적이 없다. 하나님은 친히 목자가 되어 장막을 칠 장소와 가야할 방향을 제시 했다. 그들은 이미 옥토에 있었으나 옥토인줄을 모르고 광야로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항상 귀하고 귀하다. 이들의 광야생활은 항상 경이로웠고, 항상 기적적이었고, 항상 신비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40년 생활이 고통의 날들로 묘사되고 있는 건 무슨 연유일까?
히 11: 6절에는 이 믿음을 첫째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아는 것이요 둘째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거저(선물) 주시는 분임을 아는 것이라고 해석 했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 우리의 구세주로 아는 것, 그를 찾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 등등을 아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요17장 3절)아는 것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나와의 접촉이 있어야 한다. 그 고리에 따라 행동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운동력있는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만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취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그의 말씀의 능력을 통해 그가 천지를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신 것을 입증하려 하셨다. 히브리인들에게 좀 더 쉽게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유대 백성이 광야를 거치는 동안에도 계속 말씀의 능력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신뢰의 법칙, 인정의 법칙을 가르쳤다. 하나님은 자신이 체험시킨 사건들을 히브리인들의 뇌에 깊이 뿌리박게 하려고 애쓰셨다. 마라에서 쓴 물을 단물로 바꾸는 것을 비롯하여 르비딤에서는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게도 하였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게도 하였고, 멀리 있는 메추라기를 몰아와 먹게도 하셨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는 소리를 사용했고 사방팔방에서 경이로운 능력을 경험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역사는 인간 세상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창조주가 아니면, 우주의 주인이 아니라면, 신중의 신이 아니라면, 참 신이 아니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능력을 보여 주셨다. 인간의 눈앞에서 그것들은 모두 기적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통해 인간에게 요구하신 단 한 가지는 의심 없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지식이 그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 했다.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기다렸다. 그러자 하나님은 곁에 있는 나무 가지를 꺾어서 던지게 했다. 그러자 쓴 물이 단 물로 변했다. 쓸 모 없는 죽음의 물이 생수가 된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해결 방법은 바로 그들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모든 악조건도 하나님은 기회로 만들 수 있고, 모든 절망도 한 순간에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 나뭇가지 하나면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나뭇가지는 무엇일까? 신뢰다.
Message No. 34.
인류의 사막
“이스라엘 온 화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급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16:2-3)
히브리인들이 내뱉은 소리다. 사막은 왜 사막인가? 정말 사막은 존재할까? 생각해 볼만한 주제다. 사막, 히브리인들의 가나안을 향한 여정에는 사막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만일 히브리 사람들이 물질화된 사막의 여정을 영적인 여정으로 영적 화 했다면 평화의 여정으로 변했을 것이다. 영적인 여정에는 사막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것을 원했는지 모른다.
예수님은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이는 영적인 것을 물질화시킨 것이다. 오병 이어도 그렇다. 물질적인 것을 영적으로 변형시키고, 영적인 것을 물질 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 세계에는 사막이 없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목마름도 없고 갈증도 없다. (목마른 자 다 이리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마시라) 사업이 사막이 되고, 건강이 사막화 되고, 가정이 사막이 되고, 직장이 사막이 되었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 기도를 하든지 엘리사와 상의를 하면 된다고 했다.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육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왕 하 3: 17) 사막에 강이 생기면 더 이상 사막이 아니다. 목마름이 없다면 사막은 사막이 아니다.
이는 전쟁에 나간 3왕이 사막에서 물이 없어 죽게 되었을 때 엘리사하고 상의를 하자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3왕에게 하신 말씀이다. “구덩이를 파라” 하나님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기초를 놓으라는 말이다. 갈멜산에서 엘리아는 마른하늘의 구름 한 조각을 통해 엄청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았다.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불가능할 때, 그 어떤 돌파구도 보이지 않을 때, 사방이 꽉 막혀 돌파구가 없을 때 돌파구를 창조해주신다. 돌파구를 창조할 수 있도록 기초를 놓으면 된다.
유대인이 먹을 것이 필요하게 되자 만나를 내려 주셨다. 누구에게나 만나가 필요할 때가 있다. 만나는 히브리 사람들이 전혀 상상도 하지 않는 음식이었다. 지구상에 존재 하지 않은 음식이었다. 시간 밖에 있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의 광야 40년은 인류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에덴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들에게도 먹을 것이 제공 되었다.
이는 단순히 히브리 사람들의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장차 인간이 하나님과 일체(united with)가 되거나 교류가 이루어 졌을 때의 의식주 문제에 대한 그림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일단 하나님과 소통을 하게 되면 먹고 마시는 것에 구애 받지 않게 해준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아이는 태어나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모른다.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면 인간의 의식주 문제는 하나님의 몫이 된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 복지의 법칙이 있다면 영적인 세상에도 복지의 법칙이 있다. 인간 세상에 있는 모든 제도나 법칙은 우주에 흐르는 법칙이다.
우주 만물은 태어나면 어디에나 필요한 물자가 있게 된다. 원망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영어로 Birth Right이라고 말한다.
만일 이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나 이상의 더 좋은 것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도 바로 쉽게 자기 양식을 찾아 먹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4천명의 사람들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3일 동안이나 함께 있는 장면이 나온다. 3일 동안 굶주렸으나 굶주림 때문에 아무도 다치거나 상하지 않았다. 음식을 달라하거나 원망하는 이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전 이들에게 먹을 것을 먹게 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함께 있을 때는 먹지 않아도 될지 모르나 그리스도를 떠나면 먹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들을 음식을 남기도록 먹이신다. 그것이 바로 오병 이어의 기적이다. (막 마8장 1-9)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만나로 만족을 못 하고 고기를 못 먹게 되었다고 또 불평 하였다. 그것도 애급 생활과 비교를 했다. 그것도 죽음을 담보로 한 원망이었다. 완전히 잘못된 방법이었다. “차라리 애급에서 죽었더라면 …”
이 세상에 목숨보다 더 중한 것은 없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고기 한 덩어리 때문에 목숨까지 업신여기게 된 것이다. 왜 그냥 달라고는 하지 않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한 것일까?
구하는 것은 자유다. 구해서 받는 것은 특권이고 권리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원망 없이 구해야 한다. 원망은 악이고 원망으로 구하는 것은 악으로 구하는 것이다. 우주에는 거미줄 같이 많은 법칙이 흐르고 있다. 선과 악의 올무들이다. 원망을 하면 반드시 저주의 덫에 걸려든다. 모든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결과를 부르게 된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은 마법의 생활이 될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그들은 그 귀하고 귀한 생활을 귀한 줄 몰랐다.
Message No. 35
부메랑의 법칙.
“고기가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음으로 그곳 이름을 기르롯하다아 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 이었더라” (민11:33-34)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것이 우주에 흐르는 부메랑의 법칙이다. 사람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알고 있는 법칙이기도 하다. 특수 상황을 제외하고는 그 법칙이 우주의 실증법이다. 그러나 이 법칙에도 몇 가지 예외가 있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고” “미움을 쓰는 자는 미움으로 망하고.” “분노하는 자는 분노로 망하고” 이것은 부메랑의 법칙이다. 욥은 누구나가 인정한 의인이었다. 천상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그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한 것으로 나와 있다. 재산도 많았고 자녀들도 많았다.
그의 자녀들은 부잣집 자녀들답게 자주 모여 파티를 즐겼다. 그러면 욥은 뒤에서 혹시 그 자녀들이 파티에서 흥에 취해 저질렀을지도 모를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리곤 했다. 그 만큼 신앙심이 깊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의는 하나님으로 부터까지 인정을 받기에 이른다. 마침내 그의 그런 의로운 신앙이 천상회의에서 거론된다. 사탄이 욥을 먹이로 삼은 것이다. 그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든 그의 의가 그를 지옥 같은 고통 속에 빠뜨리는 원인이 된다.
“네가 내 종 욥을 보았느냐. —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그가 까락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오리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였음이니이다.”(욥1장 9-10)
이에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의 소유를 친다. 욥은 한순간에 모든 소유물을 잃는다. 가족을 잃는다. 아내를 잃는다. 건강을 잃는다. 이유를 몰랐다. 그가 그렇게 그의 모든 소유를 잃은 것에 대해 적용 시킬 법칙이 우주에는 없었다. 부메랑의 법칙을 적용할 수 없는 특수 상황이었다. 그냥 하나님과 사탄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믿었다.
욥이 모든 것을 잃고 한 순간에 실패하여 고통을 격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 욥을 찾아온다. 그리고 자기들 생각보다 훨씬 더 비참해진 상태에 앉아 있는 욥을 목도한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욥이 그 후에 자기 생일을 저주 하니라….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이들은 욥에게 위로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부메랑의 법칙으로 회개를 촉구한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가 운데서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욥 4장 7-8)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부메랑의 법칙으로 풀려고 했고 욥은 그 법칙이 자기에게는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말싸움이 된다. 그 말싸움을 기록한 것이 욥기다.
유대 사람들은 육신적인 양식을 놓고 스스로에게 저주를 불러들였다. “차라리 애급에서 죽었더라면 좋을 번 하였도다.” 노예로 살았지만 먹고 마시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땅에 온 거대한 목적이 있다. 태어나서 먹고 살다 죽는 것은 짐승에게 주어진 삶이다. 인간은 단 하루를 살아도, 때론 굶어도, 목이 말라도, 인간으로 살다 가야한다.
노예로 살든, 종으로 살든 배만 부르면 된다는 생각에 질려버린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이되 잇가에서 씹히기도 전에 구시렁거리던 사람들을 몰살시킨 장면이다. 그것은 우주의 원칙이다. 이 원칙을 모르는 히브리인들은 그것을 하나님이 몰살시킨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아니다. “차라리 애급에서 죽었더라면 좋을 번 하였도다.” 라는 그들의 말에 의해 몰살된 것이다. 이것은 말이 씨가 되는 법칙이다.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불행을 끌어온다. 이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법칙이고 우리 생활에 적용해야 할 법칙이다. 부정적인 에너지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온다. 긍정적인 에너지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끌어온다. 우리가 말을 하면 그 말은 어디에선가,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진다. 자신에게 한 말은 자신에게서 이루어진다.
남을 축복하든, 자신을 축복하든, 축복은 축복을 내리게 한다. 저주는 상대에게 전달이 되기 전 자기가 먼저 듣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이루어져버린다. 이것은 말의 법칙이다.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이다.
하나님은 이 여정을 통해 히브리 사람들의 인간성을 회복시켜 보고자 했다. 긍정적인 마음은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이다. 기본적인 양심의 회복은 긍정적인 신뢰를 낳는다. 신에 대한 긍정적인 인정과 경외를 잉태한다. 인간에게서 상실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모세에 대한 신뢰, 가족에 대한 신뢰, 이웃에 대한 신뢰가 양심의 기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신뢰심은 중요하다. “어련히 알아서 하실 라고.” 그것은 인간 사회를 형성하는 기본적인 태도다.
하나님은 인간의 죽은 장기를 살리고 녹을 벗김으로서 양심의 감각을 깨어나게 하려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서 바로 여기에 등장하신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고 그 외에는 신이 없으며 바로 이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의식을 심으시려 했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이 척박하여도 좋고, 옥토여도 좋고, 생존의 법칙으로 무장된 아마존의 정글이어도 좋고, 사자 굴이어도 좋고, 다니엘서의 풀무 안이어도 좋다. 그 곁에,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성령이 계시기만 하면 된다. 그리스도 안에는 사막이 없다 하나님 곁에는 사막이 없다 성령 안에는 사막이 없다. 그분이 계시면 사막도 옥토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