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ssage No. 26.
하나님의 출현 (1) 노아의 믿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8-9)
인간을 불쌍히 여긴 하나님은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 자신의 창조를 한탄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세상에 악을 행하는 자들로 가득 했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수천 아니 수만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랜 수십만 이상의 시간이 흘렀을 수가 있다.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이는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함으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Now the earth was corrupt in God’s sight and was full of violence. God saw how corrupt the earth had become, for all the people on earth had corrupted their ways.” (창 6:11-12)
그동안 인류는 타락의 극을 달렸고 하나님은 그 인류 가운데서 갱생의 희망을 잃는다. 그런데 성경은 이때 하나님께서 노아와 동행 하셨다고 했다. 인간 세상의 악이 가득차서 하나님이 그가 창조한 인간을 물로 심판을 하시려는 때였지만 의가 있는 곳에는 여지없이 임하셔서 함께 계신다는 암시다. 그 시대의 악이라 함은 도덕적 타락을 의미했다. 성적 타락 뿐 아니라 폭력, 폭행도 성했다. 양심이 없는 무법천지를 연상하면 된다.
성경은 성적 타락의 예를 동성과의 음란 행위로 설명한다. 그들을 음란의 노예라고 말한다. 음란이 그들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음란은 인류의 멸망을 부르는 나팔소리다. 성이 타락하면 나라가 망하고 시대가 망한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 한다.
다음은 불의다. 불의는 의가 없는 것, 정의가 없는 것을 말한다. 역시 사람들이 불의의 노예로 살고 있었다. 기준이 없다는 의미다. 사회구조가 한쪽으로 치우쳐 총체적으로 의가 없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담기 위해 자기와 같이 만든 인간 마음에, 사탄이 자기의 영을 담아 놓고 자기 종으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참담한 상황이 된 것이다. 다행히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노아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나님과 동행 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과 소통했다는 뜻이다. 노아와 동행한 하나님이 인간의 형체를 입으셨는지 아니면 천상의 형체 그대로 였는지 알 수가 없다. 천상의 형체를 입고 계셨는데도 노아가 하나님을 알아본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상의 형체를 입고 노아에게 나타나 그와 동행을 하셨든, 인간의 형체를 입고 노아에게 나타나 동행을 했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노아가 하나님의 실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체를 본다는 것은 영의 눈이 있었다는 증거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나타나도 영의 눈이 열려야 인간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볼 수 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여 바로 함께 가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몰라봤던 것과 같다. 영의 눈은 탐욕이 없어야만 열린다. 마음이 수정처럼 청결해야만 열리는 장기다.
그동안 인류는 타락 후 오래, 오래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던 신성(Divine nature or spiritual integrity)을 상실한 체 살아왔었다. 그러나 노아는 달랐다.
성경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만 표현했다. 타락 후 의로운 사람이 없다가 어떻게 갑자기 의로운 노아가 태어나게 되었는지, 노아의 부모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것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의로운 노아를 통해 인류의 맥이 이어졌던 것을 감안하면 노아는 하나님의 특별 섭리에 의해 태어나신 분이 분명한 것 같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이 의고 구원에 이르는 빛(지식)이라고 말한다.(고후 4:6) 그래서 노아와 그 가족들은 홍수로 세상이 침몰할 때 구원을 받는다. 노아의 구원은 노아의 구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가족의 구원이고 인류의 구원이다. 만일 노아가 없었으면 인류도 없었을 것이다. 인류의 맥이 끊겼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노아의 구원은 오늘 우리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그가 우리의 조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노아는 천상에서 내려온 하나님을 보고 듣고 그분과 소통을 하고 그분의 말을 믿었다. 그것이 구원의 발판이 되었다. 그의 믿음에는 엄청난 노동이 뒤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생 전체를 포기하고 산에 들어가 땀을 흘리며 노동을 해야 하는 힘든 사역이었다. 그러나 그는 믿었고 행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필요한 방주를 하나 뚝딱 말씀으로 만들어 선물해 주실 만도 하건만 그렇지 않고 노아에게 직접 만들게 했다. 노아도 그런 것을 요구(기도)하지 않았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가르침이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엄청난 방주를 지었겠는가? 또 하나님이 그동안은 노아와 쭉 동행 하시다가 방주를 지으라고 해 놓고 돌아가 버리셨겠는가?
그에게 맡겨진 일은 인류에 대한 구원사역이었다. 인류의 구속과 연결이 되어있는 사역이었던 것이다. 모든 믿음에는 행이 따른다. 행이 뒷받침 되지 않은 믿음은 없다. 믿어야 할 것을 믿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지 않는 것은 복이지만 믿고 행하는 것이 복이다.
그런데 노아에 대한 이야기에서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할 만큼 의로운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다가 그것을 봤다고 친 아들을 저주했다는 부분이다. 그 결과 흑인이 만들어 졌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창조주의 직접적인 후손으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했었을 수가 있다. 그렇게 해야 흑인과 황색인종에 대한 근원(origin)이 정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부분만큼은 성경에 묘사된 노아의 의인의 성격 그리고 하나님께 충성하면 수 천대까지 축복을 내리시는 여호와의 속성상 너무 억지스러움이 바쳐지는 기록이다. 더더구나 축복받은 노아의 후손이 몇 대 지나지 않아 하나님과 대적하여 바벨탑을 지은 것에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Message No. 27.
하나님의 출현 (2) 아브라함의 중생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1-2)
노아 홍수 후, 또 수백 수 천, 수만, 아니면 그 이상의 세월이 흐른다. 시간 간격을 이렇게 잡는 것은 지구상에 또 다시 인간이 많아 졌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그 중간에 바벨탑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이야기들이 고대 점토판에 수록되어 있다.
그 점토판은 오래 동안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던 구전을 옮겨 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 시간을 어떤 숫자에 집어넣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다. 만일 그 숫자가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태초부터 노아 때까지, 노아 때부터 아브라함 때까지, 연대기를 측정한다. 문자 없는 시대에 구전에서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조각들을 모으고 붙여 점토판에 기록한 것을 가지고 지금 와서 그 연대를 뽑아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탐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고고학이 됐건, 역사학이 됐건, 인류학이 됐건, 천지 창조는 천지 창조로 남겨놔야 한다. 신비에 접근, 숫자로 풀어보려고 그 위에 올라타는 것 자체가 탐욕이요 교만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개요는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지워진 속살을 어떻게 재생시킬 수 있겠는가?
현대인들이 미개의 산물이라고 터부시하는 재래식 지혜가 결여된 교만하고 오만한 현대의 모든 학문들의 협공 앞에서도 이집트의 피라미드의 신비는 변함없이 꿋꿋하기만 하다. 이것이 그 예다.
현재 있다는 것은 어느 때엔가 그 원인이 있었다는 것의 증명이다. 이것은 보편적 우주의 법칙이다. 이것을 우연으로 돌리는 것은 우주 전체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거미줄처럼 깔려있는 그러나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정확하게 움직이는 우주의 법칙들이 어떻게 우연히 형성될 수 있겠는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묘한 창조였음을 욥기 36, 37, 38장만 봐도 이해 할 수 있다.
특히 성경 밖에 존재했던 수많은 인류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가 있다. 어떤 이류가 지구상에서 사라졌든지 아니면 어느 행성으로 이주를 갔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현대 사람들이 고대의 모든 연대기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 거대한 바위덩어리 같이 버티고 서 있는 과거를 파헤치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과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성경에 충분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냥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도 영혼의 만수무강에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든, 노아홍수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인류는 또 다시 창대해 진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난다. 처음 아브라함에게 나타날 때에 하나님이 인간의 형체를 입으셨는지 천상의 형체 그대로였는지에 대해선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그냥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소리만 있었는지,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소리만 듣고 하나님의 소리인지 알았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비와 친족을 떠나 그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한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인생의 Structure가 새로 짜여 진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중생이다.
그 이유를 설명한다. “앞으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물질적인 세상의 해석으로 이 말씀은 복이다. 아주 큰 복이다.
아브라함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본다.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하나님의 소리를 아브라함이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신성이 있어서다.
하나님과 수 만 년 아니면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년 수 동안 교류가 끊긴 상태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나타난 여호와의 소리를 하나님의 소리로 알고 아니면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더구나 수많은 가짜 신들이 난무한 상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들린 하나님의 목소리를 믿는다. 그리고 그 믿는 것을 행동으로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의 아비와 친족의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나 여호와께서 지시해주실 땅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육체를 입은 인간으로서는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완벽한 신뢰다. 이것이 모든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다.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표현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선물 또한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선민으로 삼은 것이다. 일방적 선택, 일방적 결론. 일방적 약속, 일방적 언약이었다.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댓가 (consideration)도 없었다. 계약법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일방적 약속이라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버리면 없어져 버리는 약속이기도 했다. 그런 약속을 아브라함은 행동을 통해 파 할 수 없는 약속을 만들었다.
시대가 아무리 추악한 악에 파묻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을 찾는다. 그 사람을 찾아오신다. 천상의 형제를 입은 상태로, 혹은 인간의 육체를 걸치고, 혹은 소리만으로 찾아오신다. 이렇게 찾아오실 때는 꼭 선물을 가져 오신다. 말할 수 없는 축복을 가져 오신다. 누구도 줄 수 없는 진귀한 것이다. 그 축복이 하나님이 다녀가신 흔적이다.
Message No. 28.
하나님의 출현 (3) 롯의 믿음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창19:1-2)
롯이 천상의 사자들을 보고 자기 집으로 초청하는 장면이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다. 그가 어떻게 해서 천사들을 보자마자 천상의 사자임을 알아봤을까?
천상의 사자들은 소돔으로 오던 길에 아브라함의 거처를 경유 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천상에서 내려온 사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후한 대접을 한다. 후한 대접을 받은 천상의 사자들은 자기들이 지상에 온 목적을 공개한다. 소돔의 멸망의 멸망이다.
그런데 이들이 왜 소돔으로 직접 오지 않고 먼 곳으로 내려와 아브라함을 거쳐 가야했는지 모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말한다. 소돔에 의인들이 있다는 것이 멸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의인 10명이 없는 이유로 아브라함은 반론은 끝낸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17:33)
아브라함은 롯이 소돔에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사가 소돔을 멸하려고 방금 떠나신 것도 알고 있었다. 이는 아브라함은 롯도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멸망당할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을까? 아니면 종을 말에 태워서라도 방금 천상에서 온 두 사자들이 소돔을 멸하려고 떠났음을 알려 주었을까?
롯은 머리 회전이 빠르고 세속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으로 묘사됐다. 그는 아브라함을 따라 고향을 떠나 유목민 생활을 하게 됐지만 땅 때문에 아브라함과 갈라졌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가로되 우리는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거로 다투게 말자. 내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 하겠고 네가 우 하면 나는 좌 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창 13: 8-10)
아브라함은 롯에게 기름지고 비옥한 땅을 선택하게 하여 떠나보냈고 그 연유로 롯은 소돔에 살게 된다. 성경 기록상으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할 ‘의’가 별로 보이지 않은 사람이다. 물론 아브라함과 함께 등장하는 조연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롯은 성문에 앉아 있다가 천상의 사람들이 성문으로 들어오자 그들을 만난다. 그런 롯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알아보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 한 것이다.
여기서 롯이 천상에서 온 천사의 사자들을 천상의 능력을 가진 천상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도움을 주려 했는지 아니면 자기 지붕아래 든 손님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보호하려 했는지, 아니면 아브라함에게 어떤 기별을 미리 받아서 그랬는지 확실히는 모른다. 그러나 롯은 필사적으로 이들을 보호하려고 애쓴다.
“소돔 사람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저녁에 네게 온 자를 이끌어 내라 우리가 상관하리라. 롯이 이르되 청하노니 —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라.”(창 19: 4-8)
이것은 롯의 새로운 인간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이는 당시 소돔 사람들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성적 타락, 음란, 간음, 불법, 폭력, 이런 것들을 성경은 우상숭배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런 악의 종말은 유황불이라는 기록이 계시록에 나온다.
왜 소동사람들은 이처럼 방종하게 되었을까? 성경은 그것을 물질적인 풍요로 설명한다. 소돔은 다른 성에 비해 물질이 풍부한 곳이었다. 여러 가지 고대 문서에도 소돔은 물질이 풍부하고 성적 향락이 극치를 달린 도시로 기록되어 있다. 신성이 결여된 사람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풍요는 곧 화를 불러들인다는 좋은 예이다
잠깐 동안의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도시의 수명은 이렇게 짧았다. 화려한 생활, 풍족한 생활 은 신성의 방어벽을 치지 않으면 인간을 타락시키는 마력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건이다.
그런 도시에서 천상에서 온 사자들을 보호하려는 롯의 노력이 ‘의’로 여겨져 롯과 그의 식구들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다니면서 체득한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롯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뿌리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아브라함과 함께 다니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여러 가지 사건과 그분의 말들을 들었을 수가 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대한 믿음이 싹텄을 수가 있다. 그래서 참 믿음은 전이력이 있다. 디모데의 믿음은 그의 조부에게 전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쓴 장면이 롯의 믿음을 설명해 준다. 소돔 사람들이 천상에서 온 하나님의 사자들을 상관하려 했을 때 시집도 가지 않은 자기의 딸을 내주겠다면서 그들과 deal을 하려한 장면은 그의 진심어린 마음을 보여준다. 인간 입장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것이다. 이것이 롯의 의로 평가된다.
그동안 그가 어떻게 살았든, 그가 무엇을 했든, 그의 모든 과거가 덮어진 채 그가 천상의 사자들에게 베푼 그 하나의 ‘의’로 구원을 받게 된다. 우리도 한번쯤이라도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을 탐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애써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상관이 없다. 일단 신성이 우리 속에 들었으니 우리는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고, 권리가 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19:24-25)
Message No. 29.
하나님의 출현 (4) 야곱의 믿음.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되 나는 여호와이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창 28:13)
하나님은 그 후 야곱에게 나타난다. 야곱은 하나님을 3번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 만남은 벧엘에서 이루어 졌고 두 번째 만남은 삼촌한테서 머슴살이 할 때다.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기 부인들을 불러 설득하는 중에 한 말이므로 실제 야곱이 이런 꿈을 꾸었는지 아니면 그냥 지어 내어 한 말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야곱은 진실성이 떨어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세 번째는 약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 뼈를 치매 …네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창32:24-28)
세 번째 야곱에게 나타날 때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다. 어떻게 해서 야곱이 사람의 육체를 입은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사람의 육체를 입고 사람인 야곱과의 씨름에서 하나님은 백기를 드신다.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람한테 패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천상에서 온 사자라 할지라도 인간의 육체를 입으면 인간이다. 육체의 법을 따라야 한다. 인간이 지닌 한계 속에 갇히게 된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한계 속에서 모든 의를 드러내셨다.
야곱은 이 육체를 입은 하나님을 붙들고 날이 새도록 싸웠다. 환도 뼈가 부서져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것이 야곱의 근성이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근성, 그 근성이 야곱을 부자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사람의 형체를 입은 하나님이 항복을 하자, 야곱이 승리의 대가로 축복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을 묻는다.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이는 야곱이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 싸웠다는 의미다. 그 사람이 하나님인 줄 모르고 싸웠다는 의미다. 야곱은 승리의 대가로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 새 이름이 이스라엘 이다. 그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오만해 보이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 이름을 하나님이 지어주셨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유대인들이 히브리인 혹은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이름을 버리고 야곱한테만 부여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자신들의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승복하지 않고 기회만 나면 그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항하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오만하고 경망스럽고 루시퍼 적 motive가 있어 보인다.
야곱은 약속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약속을 품은 사람처럼 살지를 못했다. 그는 평생을 거짓과 속임수로 살았다. 평안한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 항상 경쟁적 방식으로 곁에 있는 사람을 속이려 했고, 실제 속였다. 물론 자신도 속았다. 그런데 그런 야곱의 이름을 버리게 함으로서 야곱의 인생의 패턴을 바꾼 것이다.
일평생을 속이면서 살아온 삶의 패턴을 부숴 버리고 새로운 이름아래 새로운 structure를 짜게 한 것이다. 이는 야곱의 의식구조의 보수공사, 혹은 의식의 새판 짜기다. 그의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새 이름이란 야곱의 깊고 깊은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생활 패턴을 바꾸는 방법이다. 이는 중생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자 말자 혹독하게 유대인 민족을 책망한다. 그러나 하나님과도 싸워서 이긴 민족사상으로 뼈 속까지 세뇌되어 있던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직접제자가 아니면서 유대인 선호사상이 강했던 바울은 더 했다. 로마서를 보면 그가 유대인 선민사상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는지 나와 있다.
그들이 진리의 성령을 받아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하나님은 그들의 철학이나, 역사나, 논리나, 생각이나, 전통, 어떤 예언 속에 가둘 수 없는 태산보다 더 큰 사랑덩어리요 너무 너무 거대한 빛이요, 인간의 머리로 담을 수 없는 창조주라는 것을 깨닫는다.
구약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책이고 거기에 나온 모든 이야기는 자기들 민족만을 위해 기록한 것들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면 큰 무리가 없다. 더 큰 진리를 캐겠다고 모든 것을 현미경으로 보게 되면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 있다. 그것이, 성경이 성경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발산하는 영력이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야곱의 생은 둘로 나눠진다. 중생하기 전과 중생한 후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다고는 하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꿈을 통해서다. 비몽사몽간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접촉을 하였던 것은 세 번째의 만남이다.
야곱의 생은 여기서 둘로 쪼개진다. 얍복강 가에서의 만남을 기준으로, 그 후 삶을 새로운 생의 시작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첫 번째 정착지는 세겜이었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딸의 강간 사건과 그의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속여 할레를 받게 한 후 몰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무자비한 보복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브엘세바로 도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것을 야곱의 중생이라고 해석한다. 이해가 안 간다. 야곱은 중생한 삶을 살지 못했다. 중생이란 새로운 계절의 시작이야 한다. 시간의 시작이요, 영적 자아의 시작이야 한다. 어쩌면 야곱은 옛 구습을 벗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야곱은 육체의 가장 중요한 환도가 부서질 때가지 하는 struggle을 했다. 그러나 그는 옛 구습을 벗기 위한 용트림, 새로운 자아를 해산하기 위한 산고, 못된 인성을 버리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인성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는 흔적이 없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축복으로 치장한 야곱의 생이 그처럼 비극의 연속이었는지 모른다. 이것이 야곱이 보여준 축복의 아이러니다. 주여, 평화를 주소서!
Message No. 30.
하나님의 출현 (5)모세와 바로.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 ”(출3:4)
출애굽이란 무대 위로 올라오지 않았던 모든 인류가 그랬듯이 애급도 가짜 신들을 숭배하는 종주국이었다. 각종 신들이 대우 받고 호강하는 곳이 애급이었다. 신들뿐만 아니라 각종 마술이나 술수들(witchcraft)로도 앞선 나라였다.
고대 이집트는 물리학과 수학의 원산지였고 모든 것이 과학이었다. 이집트는 교육의 나라였다. 왕족이나 귀족들이 다니는 미스테리 학교가 그것이다. 이집트는 도덕적으로도 건전한 나라였다.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낼 정도로 정확한 천문학도 있었다. 동방 박사들도 이집트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현대에 날마다 터져 나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입자 물리학도 이미 이집트에 있었던 이론이라고들 한다. 솔로몬도 많은 지식을 이집트에서 배웠고 많은 철학 사상들이 이집트에 뿌리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고대에 세워진 피라미드는 지금까지도 그 신비를 들키지 않고 서있는 불가사이 중의 불가사이다. 그들에게는 당시 유대인과 다르게 부활사상이 있었다. 죽었다가 다시 온다는 사상까지 현 기독교와 비슷한 사상들이 많았다.
이집트에는 고대부터 문자가 있었다. 그들은 많은 우주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이집트의 고대 문명은 외계인으로부터 전수받은 외계인의 학문이라고 할 정도로 높았다. 모세는 이미 이런 모든 학문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이집트는 몇 백 년 동안 유대인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었다. 개인이 아니라 한 민족 전체를 노예로 부리고 있을 정도로 부강한 나라였다. 이집트는 여호와 하나님도 없이 수 백 년, 수 천 년을 그렇게 부강한 나라로 내려왔다.
히브리인의 신 여호와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소돔이나 고모라처럼 불법이 성하고 성적으로 타락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꼭 우상숭배를 한 나라이기 때문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 유대인들도 우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무슨 짓을 하다가 민족 전체가 노예가 되었는지 모른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그들의 기록인 구약에는 그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집트가 유대인을 노예로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호와의 진노를 받은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이집트는 문명국가였다. 비록 그들이 노예였지만 상당한 자유가 있었음이 광야 길을 가면서 토해낸 그들의 말에서 나타난다.
“차라리 애급에서 죽었더라면….” 그들은 비록 노예 생활을 하기는 했으나 먹는 것이 풍족했다. 고대 시대에 마음껏 고기를 먹고, 빵을 먹고, 마늘을 먹고, 다른 식물을 먹었다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삶 이상을 살고 있었음을 추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노예였다, 노예, 하나님은 인간을 다른 인간의 노예로 창조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여호와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여호와는 모세를 불러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는 유대 백성들을 해방시키겠다고 말한다. 모세는 거부한다. 그러나 거부하는 모세를 반 협박하고, 반 억압하여 바로에게 보낸다. 여호와는 모세의 입을 통해 바로에게 히브리인들을 풀어주라는 명령을 하게 한다. 더불어 히브리인들이 여호와가 선택한 여호와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린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히브리인의 신 여호와의 말씀이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모세는 여호와가 시키는 대로 한다. 모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세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임을 분명히 한다. “내가 하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 보내신 이의 말이니라.”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여호와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보냈다고 했을 때 쌍수 들고 환영을 했을 만 하건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로 나타난 모세도 여호와도 기쁘게 영접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의 비위를 건들게 될까봐 걱정했다. 그것이 그들의 생존 방법이었다.
인간은 악에게 아부 하면서 살 수 없다. 아부해서도 아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하나님의 능력의 수혜자가 된다. 성경은 그것이 언약 때문이라고 말한다. 언약 . . . 하나님의 약속.
안다는 것 자체가 자동적으로 그 능력의 수혜자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과 함께 그 능력을 직접 목도한 바로의 군단은 그 능력의 피해자가 되었던 것이 잘 말해준다. 아브라함이 가진 언약 하나가 수혜자와 피해자로 갈라놨다. 인간이 신의 안에서 교류를 하게 되면 언약 없이도 하나님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신적 본능이 있을 때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지녔던 능력이다. 그러면 왜 여호와는 더 일찍 그런 약속을 이행하지 아니하셨을까? 무려 400년 동안이나 가만있다가 왜 갑자기 이스라엘을 해방하려 하신 것일까?
성경은 여호와가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전에 그들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을까? 계절 때문일 것이다. 우주의 모든 만물은 보이지 않은 여러 가지 법칙에 의해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 이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생각지도 않는 쪽에도 파장이 일어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항상 때를 타고 움직이셨다. 하나님은 후손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했다. 그리고 처음 약속으로부터 무려 25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에 그 약속을 이행하신다. 솔로몬은 모든 것엔 때가 있고 계절이 있다고 했다. 그 동안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완전히 늙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하나 태어나고 죽는 것이 우연히 아니라는 진리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이 신의 때를 일컫는지 아니면 이스라엘의 때를 일컫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시간이다. 이스라엘이 해방되어야 할 자기의 계절에 든 것이고 바로는 떠나보내야 할 계절에 든 것이다. 만일 바로가 그 때를 알고 히브리인들을 미리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류 역사는 많이 바꿔졌을 것이다. 어떻든,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는 자로, 바로는 그 능력의 피해자가 된다.
하나님은 한 순간에 바로의 마음을 변화시켜 유대인을 해방 시킨 것이 아니다. 아주 잔인하게 바로의 마음을 강팍 하게를 반복하면서 무려 10가지 재앙, 그것도 장자를 죽이는 살인 재앙까지 내린 후 보내주게 한다. 여기서 여러 가지 의미를 만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