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선악과와 실락원이 내게 주는 의미

 Message No. 17.

인간의 실체 (3)

에덴에서 보여 진 인간의 능력을 한번 살펴보자. 요약하면 인간은 사랑, 창조 능력, 관리 능력, 정복 능력의 빛을 가진 생령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딱 둘이다. 육체적 모습이 보이지 않은 영적 하나님의 형상과 같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의 형상이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영을 담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만일 인간이 하나님께서 부어 넣어주신 영을 잃으면 인간은 짐승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격이 짐승의 격으로 떨어진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넣어주신 영의 지닌 능력을 점검하신다. 하나님은 일단 자신이 창조한 모든 창조물을 아담에게 데려 오신다. 그것들의 이름을 짓게 하신다.

작명에는 많은 지혜와 명철이 필요하다. 특정 물체의 성격과 그 물체가 지닌 독특성 그 물체와 다른 물체와의 관계 그리고 미래의 성취 성까지 고려되어 그 물체에 가장 적합하게 붙여져야 한다.

아담은 어디서 무엇을 배운 적이 없다. 그런 그가 그 많은 이름을 짓는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창조 능력과 지혜, 명철이 있어야 해 낼 수 있는 작업이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영이 지닌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 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들에게 이름을 주니라.” (창 2: 10-20)

아담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첫 번째 사역을 거뜬하게 해내었다. 아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능력의 사역이다.

바로 하나님의 숨결(영)이 하나님이 만든 육체에 거함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의 영, 그 영이 지닌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사역이었다.

“우리와 같이, 우리의 형상대로”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미리 상상했음을 말해준다. “흙을 빚어” 말씀으로 빚었건, 영체의 손으로 빚었건 인간의 손놀림을 상상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상상은 인간의 손과 같고 하나님의 생각도 인간의 손과 같고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의 손과 같다. 생각은 상상에서 나온다. 너무 크게도 너무 작게도 아니하신 인간의 체격에서부터 모든 신체의 위치까지 하나님의 창조 기술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생각은 상상에서 나온 무엇을 보다 정교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다듬는 일을 하게 된다. 너무 긴 것은 줄이고 짧은 것은 넓히고 말을 나오게 한다. 생각이 완성되면 다음엔 행동이 일어난다. 아담은 하나님의 기대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게 하나님이 창조한 각각의 창조물과 그 창조물을 만들 때의 하나님의 상상을 상상했고, 생각을 했고, 그리고 말을 했고, 그 말이 이름이 되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물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지어가면서 하나님이 그 창조물을 그렇게 만드신 이유를 알아갔다. 그리고 그가 이름 지은 모든 창조물에 대해 낯을 익혔다. 장차 자신이 다스릴 동식물이이기에 그들을 알아놓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셨다. 하나님의 상상과 생각과 말과 일치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호흡을 넣어놓은 인간의 창조 능력을 점검하신 후 천지 창조를 끝내신다.

인간의 능력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계시록에는 하나님은 아무나 쳐다볼 수 없는 너무 밝은 빛으로 묘사 된다. 그러나 아담은 그런 하나님을 직접 뵙고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천지 창조에 등장하신 하나님은 영체로서 인간의 형상과 같은 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질적인 육체를 가진 아담이 하나님의 존영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암시다.

성경은 종종 인간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들을 만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노아, 아브라함, 롯 다윗 등등. 이때는 대부분 여호와 혹은 그의 사자들이 인간의 형체와 같은 형체를 하고 인간에게 나타난다.

에덴에 나타난 하나님은 태초의 하나님 그대로였다. 아담 하와는 하나님께 직접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보고 있었고, 그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나님의 숨결(Breath)이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지녔는지는 아담이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빛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음에서도 증명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과의 소통, 영의 세계와 소통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타락 후 인간은 많은 능력을 잃었다. 마음의 눈이 나빠지고, 귀가 멀어 하나님의 발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하나님 뿐 아니라 영적인 세계의 천사나 그 소속 존재(Being)들을 불 수 없고 그들의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장기는 사용하지 않으면 나빠진다. 영적 장기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인류의 모든 영적 장기가 망가져버린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이 지닌 장기를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영적 장기든 육적 장기든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망가지지 아나한다. 녹슬지 아니한다. 에너지가 나오고 스스로 재생되어 활력이 드러난다.

창세기 4장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강림하셔서 가인과 대화를 하신 것을 끝으로 인간과 영계와의 소통은 완전히 끊어져 버린다. 이것이 구약의 기록에 의하면 그런다.

Message No. 18.

선악과의 실체.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가로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31-5)

사람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께 벌을 받아 죽은 것으로 오해 한다. 즉 하나님이 자기 말을 안 들어 벌을 내렸다고 추상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선악과가 언약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글쎄 성경을 성경대로 풀어보면, 하나님은 아담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특정 나무를 지명하여 선악과를 심어 그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종종 ‘하나님의 시험’ 이란 단어가 나온다. 그러나 절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일부러 어떤 함정을 파 놓고 인간을 시험하지 않으신다.(야1:13) 그럴 이유가 없다. 인간의 standard로 하나님을 생각하면 안 된다. 물론 훈련 시키시는 (“discipline”) 경우가 있다.  그러나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은 discipline 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시험은 인간의 탐욕이나 집착에 기인한다.(야1;15) 모든 말이나 행위에는 각자 댓가가 있고 말이나 행위가 나가면 정해진 결과(값)를 얻게 된다. 그것이 Cause and Effect의 법칙이다. 에덴에는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열매 없는 나무들도 있었고, 열매를 가진 나무들도 있었다. 생명의 법칙을 관장하는 생명나무도 있었고, 죽음의 법칙을 관장하는 죽음의 나무도 있었다. 일명 선악과 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생명과 죽음은 우주 안에 있는 한 짝이다. 이때 죽음은 멈춰 있었고 죽어 있었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선악과라는 과일나무가 사망의 독을 품고 있는 나무라는 것을 알려주셨다. 먹으면 죽게 된다는 이유도 곁들였다. “동산의 모든 과일을 마음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you must not eat…You will surely die.)

문맥상으로 ‘아담이 어떻게 하게 될 것이리라는’ 미래적인 결과에 대한 예언적 information을 준 것이다. 그러나 만지지도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와가 뱀한테 보탠 말이다. 선악과는 스스로 있을 때는 악도 아니고 죄도 아니다. 낙원에는 죄가 있을 수 없다. 그저 에덴에 있던 많은 실과나무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인간이 그 과일 나무 실과를 따 먹음으로서 그의 실체가 드러나게 만든 것이다. 물이 있어도 물은 인간한테 생명을 주지만 죽음도 줄 수 있다. 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물은 인간한테 해를 입일 수 없다. 그 누구도 물에 빠져 죽지 않는다.

따라서 말이나 행(act)이 나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옷 나무가 있어도 그 나무를 만지지 않으면 가렵지 않다. 선악과나무는 자신과 관계를 맺지 않았으면 인간에게 아무런 해도 입일 수 없는 나무였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음이 일어났다. 사망이 눈을 뜨고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독사인줄 알면서 독사를 밟으면 독사가 문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만든 동산이었다. 주인도 하나님이셨다. 그곳에는 높고 낮음이 없었다. 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화, 평화만 있었다. 에덴동산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이 없는 곳이었다. 선악과를 먹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에덴동산은 질서정연한 동산 이었다. 인간은 다스리고 지배하는 자였고, 그 외 모든 창조물은 지배받고 다스림을 받는 것들이었다. 뱀은 인간의 조력자(Counselor)가 아니었다. 조언자도 아니었다. 인도자도 아니었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rule over) 하자 하시고”(창 1: 27)

아담은 에덴동산의 총독이요 왕(ruler)이나 같았다. 하와가 하나님께 받은 정보는 선악과는 안에 사망의 독이 흐르므로 먹으면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하와는 죽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죽음의 심각성을 몰랐을 수도 있다.

뱀이 하와에게 말을 한다. “동산의 모든 과일을 먹지 말라 했더냐?” 하와가 대답 한다. “아니 모든 과일을 먹되 선악과만 먹지 말라했다, 그 과일을 먹으면 죽는다고 했다.” 그러자 뱀이 대답한다. “아니야, 죽지 않아, 그것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 같이 되.”

뱀이 하나님이 가르쳐준 정보가 잘못 된 것이라고 말한다. 한 순간에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인 것이다. 하나님은 감히 하와나 뱀이 주고받을 말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창조자였기 때문이다.

이 순간 하와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을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먹어 봤냐?” 그러나 하와는 자신을 에덴의 지배자로 임명해준 여호와 하나님을 대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홀히 여겼다. 그의 지침도 소홀히 여겼다. 하나님의 지침을 소홀히 여긴 자는 결코 시험에 들지 않은 적이 없고, 행복한 적이 없고, 성공한 적이 없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fear the lord)하라고 했다. 그래야 하나님의 가르침을 가벼이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와의 죄는 여기서 시작됐다.

뱀의 말을 듣고 하와가 선악과를 한번 처다 보았을 때, 그것은 정말 지혜롭게 할 만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다. 그러나 동산의 있는 것 중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었을까? 그것은 환상이었다. 탐욕이 만든 환상이었다. 사람이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물의 원형실체를 볼 수 없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환각 속에서 살게 된다.

선은 악과 벗이 될 수 없다. 선은 악한 자를 용서하고, 자비를 줄 수는 있으나 섞여지지 않는다. 섞일 수 없다. 악은 선을 낼 수 없다. 악과 선은 거래를 할 수 없다. 악이 사용하고 있는 껍질(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을 긍휼이 여길 수 있으나 껍질 안에 있는 악을 긍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인간은 악을 물리칠 수는 있으나 죽일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정한 때가 되면 악을 처단 하신다. 인간은 거룩한 성령의 전인 자신을 부정 타지 않게 관리해야 한다. 마음의 순결성(purity)을 지키라는 것이다. 부정한 것이 들지 않도록. 하와는 자기관리에 실패했다. 마음이 뱀에 부정 타니까 탐욕이 서식하기 시작했다.

Message No. 19.

신성과 이성의 전쟁.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중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노라.” (7:21-23)

인간안에는 신성도 이성도 있다. 둘을 합쳐 그 사람의 인성 혹은 인격이라고 말한다. 신성은 하나님께로 왔고 이성은 흙으로부터 왔다. 이성은 육체적 삶을 위해 사용되고 신성은 영적인 삶을 위해 사용된다. 둘이 조화를 이루면 평화가 되고 둘이 충돌을 일으키면 불화가 된다. 모든 충돌은 평화를 깨뜨린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평화를 깨드리는 것은 악이다. 선이 악을 만나면 불협화음이 나타나고 그것은 죄가 된다. 둘은 충돌하지 않을 수 있다. 이성 안에 탐욕이 들지 않으면 된다. 탐욕이 없으면 육적 이성은 신적 신성을 따르게 되어 있다.

반대로 이성에 세속의 탐욕이 들면 신성을 거부하게 되어 있다. 탐욕은 영적 양심까지 오염을 시킨다. 그러면 영육에 불협화음이 생겨 평화를 잃는다. 생이 일그러진다. 항상 탐욕 뒤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가 있다.

영적 자아는 사탄의 직접적인 유혹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적 자아는 유혹을 받는다. 뱀의 유혹을 받아(외부세계)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한 것은 육적 자아, 즉 이성이다. 이성은 흙에서 온 요소다.

이성은 육적인 인간의 상상과 생각을 조종하는 기관이다. 상상은 지울 수 있으나 말과 행동은 지울 수가 없다. 말과 행동에는 결과가 따라서, 그 결과를 직면해야 하게 된다. 상상은 생각의 뿌리다. 성경은 인간의 생각까지도 보관이 된다고 했다.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을 이간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과 분리시켜 놓는 것이다. 일단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면 평화를 잃는다. 불행을 함께 살다가 영원한 형벌의 불구덩이 안으로 던져져야 한다.

이것은 법칙이다. 육과 영의 분리도 죽음이고, 영과 하나님과의 분리도 죽음이고, 영육과 하나님과의 분리도 죽음이다. 가지가 나무에서 꺾어지면 죽는 것과 같다.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는 상상을 했다. 상상을 통해 죄를 짓기 시작했다. 피조물이 조물주가 되겠다는 것은 탐욕이다. 탐욕은 악이다. 하와가 상상을 굴리는 동안 계속해서 탐욕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하와는 아무런 까닭 없이 필요 이상을 탐한 것이다. 하와의 이성은 뱀과 말을 섞는 동안 급속도로 부패해 갔다. 이성은 탐욕에 삼킨바 되고 있었다.

탐욕의 배후에는 뱀, 뱀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다. 상상이나 생각이 이렇게 중요하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때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때로부터 얼마의 기간이 지난 후였느냐다.

본문을 보면 하와는 뱀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한다. 뱀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는 다르다. 그렇다면 뱀과 인간은 어떤 언어로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 대화를 했을까?

하와만 뱀과 대화를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뱀과 대화를 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라.”(창3장 14절) 그렇다면 하나님은 뱀과 대화를 할 때 뱀의 언어를 사용하셨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언어를 사용하셨을까?

뱀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은 뱀도 흙으로 하여금 낳게 했다. 인간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모두 물질세계에 사는 피조물이다. 그러나 종(kind)이 다르다.

태초의 인간은 물질계에 있는 모든 종들(kinds)과 대화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가게 하는 장면이 뱀과 하와의 대화다. 이는 태초의 인간이 얼마나 큰 능력이 있었느냐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와는 뱀과 대화를 했고, 하나님도 대화를 했다. 인간은 하나님과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Science Fiction에 자주 텔레파시 (“심령 대화”)를 통한 communication이 등장한다. 하와가 뱀과 대화를 할 때 텔레파시와 같이 언어를 직접 입으로 내 뱉지 않는 소통 수단 를 사용했는지 아니면 다른 소통 수단을 사용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태초의 인간이 다른 창조물과 소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지배하고 관리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부여해 주신 것이다.

심령대화란 마음에서 마음으로, 마음에 있은 생각이 생각의 형태로 전달되고 전달 받는 것을 의미하다. 이것은 주로 인간이 영계의 어떤 Being 과 소통을 할 때 사용하는 소통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영매들도 이런 방법을 통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과 대화를 한다고 전해진다.

1200년대 성 프란시스코도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육축과 그리고 공중에 나는 새들과 대화를 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새를 불러 오기도 하고, 만져 주기도 하고, 무서운 사자나 호랑이를 불러다가 쓰다듬어 주기도 하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오늘날 그러한 기록의 진위를 확인 할 수 없으나, 많은 이들이 그래서 그분을 평화의 사도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와는 자기가 가진 능력을 악용했다. 잘못 사용했다는 의미다. 죄를 짓는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우리가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하면 이런 능력을 회복하게 된다. 우주와 소통을 하고 하나님과 소통을 하고 필요한 것을 창조하고 평화를 누리고 평화를 가꾸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

Message No. 20.

수치심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가 나무 잎을 엮어” (37)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나타낸 현상은 자신들의 벗은 몸에서 흘러나오는 수치에 대한 느낌이었다. 이것은 전에는 없던 증상, 전에는 보지 못한 증상이었다. 부족하지 않은 상태서 부족을 본 것이다.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보인 것이고,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을 느낀 것이다. 헛것이 보인 것이다.

그들은 이 수치를 무화과 잎으로 가렸다. 그러나 수치심은 가려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수치심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벌거벗은 것은 수치가 아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그대로가 벌거벗은 상태였다. 벌거벗은 상태는 진실한 상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옷을 입히지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솜씨가 서툴러서가 아니라 옷이 필요하지 않아서다. 그러므로 아담의 수치심은 진실에 대한 왜곡이었다. 진실이 거짓처럼 비친 것이었다.

다음으로 일어난 것은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이나 수치심 그리고 원망은 아담이 에덴동산으로 초대한 악이었다. 세상의 최초의 악은 이렇게 하여 탄생하였고 그 창조자는 아담의 이성이었다.

베드로는 풍랑 앞에서 떨었다. 주님 안에 있는 이에겐 풍랑은 곧 사라져버릴 허상이다. 그 풍랑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배 안에 주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허깨비 같은 풍랑의 외형적인 모습에 겁을 먹었다.

롯데 월드에 가면 공룡 나오는 장소가 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금방이라도 삼킬 것처럼 달려든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공룡이나 괴물은 인간에게 아무 해도 줄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을 구경하던 아이가 무서워 아빠에게 달려들면 아빠는 그 아가를 안고 웃으며 “허허, 괜찮아 저것들은 가짜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라고 안심 시킬 것이다.

두려움은 흩어져 버릴 환영에 불과하다. 두려움은 우리의 두려움을 먹고 강해진다. 만일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두려움은 굶주림에 말라죽을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사자는 상대의 두려움을 먹고 강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 품으로 들어와 우리를 해할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리요.” “세상 끝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이는 약속이다. 그 분은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약속을 의심하게 되면 그 약속은 힘을 잃게 된다. 그 약속을 소홀히 여기는 순간 두려움이 일게 된다. 이것은 법칙이다.

두려움은 악의 근원에서 나온다. 사망의 독에서 나온다. 두려움은 의심에서 시작한다. 불안은 미움과 원망을 부화한다. 원망에서 시기와 질투가 잉태된다. 이들은 서로 얽히고 설켜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 따라 붙는다. 감기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면 콧물이 나오고 기침이 나오는 것과 같다. 결국은 인간의 생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사탄이 원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죄이고, 평화를 좀먹는 벌레고, 기생충이다. 암세포다. 지금도 사탄은 평화의 마음을 헤집고 뒤엎어 불행의 영역, 암흑의 영역을 만들려 하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에는 두려움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날마다 그 숫자가 불어나고 있다. 사탄은 여기서 힘을 얻어 인간의 마음, 마음에 두려움을 심고 미움을 심는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놓고 인간 마음속에서 벌이는 선과 악의 전쟁이다. 양심과 비 양심, 신앙과 불신앙의 전쟁인 것이다.(로마서 7: 17-14)

하나님은 종국에 그들을 처벌하신다는 것이 계시록에 선언되어 있다. 두려움은 사탄으로부터 에너지를 전송받는다. 받는 실체를 없애버리면 사탄은 에너지를 보내고 싶어도 보내지 못한다.

두려움은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빛은 마음에 구름이 없어야 들어온다. 빛이 아무리 강해도 의심의 구름이 짙게 깔려 있으면 약해진다. 들어올 수가 없다.

마음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이성의 본능, 생각, 판단 이것들이 유혹자들이라면 그들이 곧 사탄의 영이고, 악이고, 마지막 심판 때 심판당할 대상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로 태우리라고 하셨다.

악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악이 또 다른 악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성경은 악은 결코 선(신성)을 이길 수 없음도, 두려워할 대상도 아님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의 유혹을 먼지를 털 듯 털털 털어버리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들은 무화과 잎을 엮어 자기들의 수치심과 두려움의 근원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가렸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무화가 잎으로 가린 곳이 근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망의 독이 내 뿜는 허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죽음의 법칙에는 불안, 미움, 두려움 그리고 다른 부정적인 악들이 들어있다. 질투, 시기, 원망, 육적인 욕망 등이다. 이것들이 죽음의 법칙에 열린 열매고, 가지고, 이파리다. 그리고 서로 얽혀져 있어 어느 하나가 앞으로 나오면 줄줄이 따라서 나오게 되어 있다.

두려움도 수명이 있다. 수명이 다하면 사라진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사라지면 또 다른 두려움이 나타난다.

오직 벌거벗은 것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나타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부르시자 아담이 대답한다. “내가 벗었음으로 숨었나이다.” 하나님이 다시 물으신다. “네가 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먹었느냐?”

두려움이 어떻게 인간안에 오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Message No. 21.

심성의 변화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이는 내 살 중의 상이요 뼈 중의 뼈라)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핑계, 원망)” (11-12)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

“내 살 중에 살이라”던 하와에 대한 격이 “저 여자”로 전락했다. 미움과 원망이 줄줄 흐르는 문맥이다. 아담의 마음에 어느새 미움과 원망이 들어온 것이다. 아담이 괴물로 변했다는 입증이다. 죄가 들어 온 후 인간이 자가 자신을 천히 여기는 것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귀한 창조를 모독한 것이다.

그래서 인성이 회복하게 되면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부터 달라진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된다.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게 된다. 천하보다 귀하게 관리하게 된다.

악은 이렇게 소리 없이 사람에게 들어온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마음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단번에 알았다. ‘저것들이 선악과를 먹었구나.’

하나님은 왜 먹었느냐고 책망하지 않았다. 그냥 “네가 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먹었느냐?” 라고 물었다. 아담에 겪고 있는 증상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어서 하나님이 물으신 것이다. 아담이 해야 할 대답은 Yes, 아니면 No,다.

그러나 직답 대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게 하신” 이라며 하와에 대한 미움 섞인 말로 하와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하나님은 하와를 아담을 위해 창조하셨다. 결국 하나님까지 원망을 한다.

선악과를 어떻게 먹었건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않을 안전한 자유와 권리가 있었다. 그들은 뱀의 유혹을 물리칠 자유가 있었고 힘이 있었다. 뱀은 그들의 지배를 받는 하등 동물이었다.

모든 앎에는 책임이 따른다. 낙원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는 선악을 알아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죄에 대한 지식, 악에 대한 지식, 그 지식은 오히려 인간이 몰라야 할 것이었다.

세상엔 인간이 몰라야 할 지식이 너무 많다. 알아서 죄가 되는 지식, 알아서 불행이 되는 지식, 알아서 실패가 되는 지식, 인간에게 평안을 주지 못한 모든 지식은 악이다. 노아의 아들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대가로 저주를 받았다.

만일 우리의 눈이 현미경처럼 밝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마시는 공기 속, 먹는 음식 속, 우리가 서 있는 장소에서, 수십억의 병균, 박테리아 세균 등등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살기에 필요한 만큼의 시력을 주셨다. 이것이 지혜고 창조 과학이다.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 중 지극히 미세한 것에 불과하다. 뱀은 그런 미세한 것이 전부인 것처럼 믿게 했다.

아무리 높은 지식을 갖고 있어도 그 지식을 생활 속에서 사용하지 않으면 무다.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못한다. 하와는 뱀의 말을 무시해 버릴 완벽한 자유와 완벽한 권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서 하와 그리고 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행위에 해당하는 형벌을 내린다. 이것은 우주의 공의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혀 일방적이지 않았다. 분노도 없었다. 책망도 없었다. 그냥 행위에 대한 댓가를 그대로 지불하신 것이었다.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에 의해서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형벌을 내리신다. 하나님이 내린 형벌은 공정했다. 아무도 이의를 제시할 수 없었다. 아담, 너는 땀을 흘려서 식물을 먹고, 땅은 쉽게 식물을 내주지 아니하고,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고, 방해하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말은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함을 의미 한다. 어쩌면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선택과 그 결과로 인해 존재하게 된 새로운 생존의 법칙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는 가지려고 하고, 하나는 주지 아니하려 한다면 하나는 뺏기 위해, 하나는 뺏기지 않기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식물을 얻으려 하는데 엉겅퀴가 나온다는 것은 내가 기대하고 원하고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 없고 원하지도 않은 결과가 산출 된다는 것이 아닌가. 가시 때문에 쉽게 처낼 수도 없는 것이 나온다는 얘기다. 끊임없이 그 엉겅퀴를 제거해야 식물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전에는 먹을 것을 위해 애 쓸 필요가 없었는데 이제 먹는 문제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제한된 능력으로 모든 자연과 더불어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인간,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한 창조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자가 아니가 경쟁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육체까지 잃어버리게 되리라 했다. (Dust) “흙에서 왔으니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와, 너는 해산의 고통을 겪고, 남편을 그리워하고… 정신적 고통이다. 이 세상에 사랑에 대한 그리움보다 더한 고통은 없다. 거기서 또 수많은 고통이 파생된다. 미움, 의심, 좌절, 절망, 시기 질투 등 등 등. 석가는 인간의 8고중 두가지 고통이 바로 애정에서 나온다고 했다.

뱀- 일평생 기어 다니고,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어, 화해할 수 없는 관계가 되리라. 악과 선은 결코 화해할 수 없다. 평화할 수 없다는 뜻이리라. 악과 악도 평화 할 수 없다. 악에게는 평화가 없기 때문이다.

성 어거스틴이나 오리겐 등을 비롯하여 많은 고대 교부들 그리고 칼빈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이성이 완전히 부패했고 그것이 모든 기관에 전이 됐다고 말한다. 지성의 완전 부패와 양심의 완전 부패를 주장했다.

이때부터 인간의 이성은 두 개의 힘을 섬기게 된다. 선과 악, 악의 능력과 선의 능력, 긍정과 부정, 두려움과 용기를 섬기게 된다. 양다리를 거친 것이다. 인간의 이중성이 만들어 진 것이다. 이중인격과 이중 양심.

Message No. 22

생존에 필요한 공급이 차단되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는 종일토록 수고 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8)

인간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배고픔도, 목마름도, 없었다. 질병도 늙는 것도 없었다. 불행도 없었다. 모든 필요는 필요한 순간 옆에 있었다. 그래서 에덴은 낙원이었다. 하나님은 태초의 인간에게 모든 것을 식물로 주신다. 먹고 마시는 문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그의 양식이었다. 모든 필요를 공급받고 있었다.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40주야를 물도 마시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는 빛까지 났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충만한 에너지가 이글거린다. 모두 생명의 에너지다. 이 세상이든, 저 세상이든, 그 에너지 권 안에 들면, 충만한 생명의 에너지를 받게 되어 있다.

모세뿐 아니라 요즈음도 깊은 영성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초대교회 후 교회사에 들어오지 않은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깊은 영성 생활을 통해 그것을 경험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물도, 음식도 없이 계신 적이 있다. 광야란 사막이다. 사막에서 물 없이 40일을 버틴다는 것은 인간 육체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완전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은 버티셨다.

모든 음식은 몸속에 들어가 에너지가 된다. 인간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음식이 아니라 에너지다. 에너지만 있으면 음식이 필요 없게 된다. 예수님은 음식을 먹지 않으셨다. 물도 마시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광활한 우주로부터 필요한 에너지를 어떻게 끌어냈을까? 이승의 표현법으로 이해시키기 힘든 주제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다.

그것을 떠나서라도 하나님이 숨결로 차 있는 우주 공간 속에는 생기로 충만하고 에너지로 충만하다. 햇빛 속에 들어있는 비타민을 비롯하여 수 없는 생명의 요소들이 땅에 있는 것이나 공중에 있는 것들, 심지어 물속에 있는 것들에 까지 제공해 준다.

영적 에너지를 물질적인 에너지로 바꿔서 썼을 것이라는 얘기다. 고대 성자들도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에덴에서의 삶의 한 부분일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의 교부들이나 수도자, 은둔자(성자)들 중 많은 이들이 사막이나 깊은 산속 동굴에 들어가 묵상 기도만으로 몇 년씩 하나님과 영적 교류를 했다는 문헌들이 있다.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다. 천국이 오면 인간은 비로소 잃어버린 신성을 회복하게 된다. 흙의 본능이 아니라 영의 본능이 살아나게 된다. 모든 필요를 공급받게 된다.

이성은 모든 부정적인 에너지의 노예다. 모든 사물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부정적은 것을 먼저 보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육체는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한계고 법칙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법칙을 저항하기도 한다. 그 한계를 넘기 위해 수 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지금도 가능하면 더 오래 이 땅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하늘과 땅과 우주를 뒤지기도 한다. 바로 그런 갈망이 주님을 오시게 하는데 어떤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성은 인간이 ‘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솔로몬은 인간이 무이기에 ‘무(nothing)’인 인간에서 나온 모든 행(deed)이 ‘무(nothing)’라고 했다. 그는 무에서 해탈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약간 비논리적이긴 하지만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무’에서 해탈 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그 경외에는 무진무궁한 신비가 들어있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일단 하나님을 경외하면 거기서 방출되는 커다란 빛에 의해 여러 가지 지혜와 명철, 원리와 법칙을 알게 된다. 평안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지식 너머의 지식을 얻게 된다. 그러나 부패한 이성은 계속하여 의심, 두려움, 불안, 초조, 빈곤, 미움, 시기, 질투, 원망, 핑계 등을 일으킨다. 인간은 결국 이런 질병상태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바울은 이것을 죄의 노예 상태로 표현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인간은 이런 노예 생활에 익숙해 져서 영생을 향해 어떤 조치도 할 수 없게 됐다. 자유의 유전자는 노예의 유전자로 바꿔져 버렸고, 모든 진리와 진실이 왜곡 되고 자유의 의미도 완전히 왜곡 되어 버렸다. 내가 자유라고 하는 것이 남의 자유를 훼방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악이다. 악을 자유로 착각한 것이다.

인간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이해한다. 심지어 자유의 이름으로 프리섹스를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다. 그러나 에덴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 밖에는 자유가 없다. 악의 세계에는 자유가 없다.

인간의 이런 질병을 고치는 방법은 사망의 독을 해독하는 방법밖에 없다. 반드시 그 독을 해독할 해독제를 구해야 한다. 우리 몸이 사망의 독에서 해독이 되면 자연히 그 독에서 온 증상들은 사라지고 치유된다. 이것이 원인 치료다. 그럼 그 해독제를 찾아보자.

Message No. 23.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었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음에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고”(3;22)

인간은 선악을 아는 부분에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러나 악에 대한 앎은 인간에게 불행을 일으켰다. 모든 부정적인 앎의 문이 열려버린 것이다. 가슴에 악을 끌어올 수 있는 속성이 심어져 버린 것이다. 쇠붙이가 지남철에 따라붙는 것과 같은 원리다. 사망의 독으로 명명되는 대표적인 악 – 교만, 탐욕, 질투, 음행, 분노, 나태, 탐식 – 등을 끌어당기는 힘, 거기서 파생되는 미움, 원망, 빈곤, 등등 … 그들이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고, 그들이 마음대로 머물 수 있는 거처(Dwelling place)가 된다.

선과 악은 공존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 마음은 한순간에 선과 악의 전쟁터가 되어버린다. 악은 이미 있던 악을 몰아내려 하고 선은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악을 막으려 한다.

악에 대한 앎은 악을 불러온다. 우리가 향락을 모르면 향락을 갈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명예를 모르면 명예를 갈구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을 불러들일 수는 없다. 더러움은 더러움을 낳고 더 많은 더러움을 낳는다. 미움은 미움을 낳고 더 큰 미움을 낳는다. 음행은 음행을 낳고 더 큰 음행을 낳는다. 질투는 질투를 낳고 더 진한 질투를 낳는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더 강력한 분노를 낳는다.

선(긍정) 하나만 알 때와 비교하여 악(부정)까지 합쳐서 둘을 알 때의 인간상은 엉망이 된다. 선과 악에 대한 이중성이 생성된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알게 되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두려움으로 변한다.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한 것이다. 자신의 완벽함이 수치의 근원, 즉 빈곤으로 보인다.

선악과에 대한 사탄의 유혹을 놓고 하와가 상상했던 것과 사탄이 말했던 데에는 차이가 있었다. 하와는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이 원인 없이 존재하는 전능자가 되는 것인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합리적이지 않다. 이미 ‘창조’ 라는 원인에 의해 있게 된 존재가 어떻게 원인 없는 자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지?

이는 원칙이 아니다. 피조물이 과일 하나에 의해 조물주가 되는 것도 원칙이 아니다. 모든 원칙은 자연스럽다. 흐름이 있다. 탐욕에 홀리지 않고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꿈이었다. 에덴동산에서의 사랑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그것은 아담의 절대적인 권리였고 완전한 자유였다. 하나님만을 사랑할 때 아담부부는 평안 했다. 에덴동산도 평화의 동산이었다. 지상 낙원이었다. 악이 없고 미움이 없고 사랑과 평안만 있는 자유의 동산 이었다. 평안이 없는 자유는 완전한 자유가 아니다. 하와는 아차 하는 순간 뱀의 유혹의 빠진다.

많은 사람들은 왜 하나님은 인간을 죄를 짓게 만들었느냐?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완전한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아무도 아담 하와에게 죄를 지으라고 협박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 선악과를 탐했다. 예수님께서 그 예를 보여줬다. 사탄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의 의지로 사탄의 휴혹을 털어버렸다. 명예를 가지고 유혹을 할 때도 그의 의지를 사용하여 거부했다. 하와와 아담도 뱀이 유혹을 거절할 자유와 권리가 있었다.

천사 루시퍼는 하나님의 보좌를 탐하다가 천상에서 쫓겨났다. 그 역시 하나님과 대적하지 않을 완전한 자유와 권리가 있었다. 사탄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 탐욕을 거절할 자유와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거절하지 않고 탐욕의 명을 수행했다. 탐욕의 종이 되었다. 결과 그들은 타락하여 사탄이 되고 귀신이 되었다. 반대로 가브리엘과 미카엘 등 다른 천사들은 탐욕을 부리지 않아 하나님과 더불어 의를 지키고 의를 이루는 의의 사자로 살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사랑이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긴 결과는 참혹 했다. 순식간에 속성이 변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매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 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 22)

만일, 아담이 부패한 상태(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원망하고)에서 영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사탄과 함께 떠도는 영원한 사탄의 노예로 살아야 했을 것이다.

선악과 안에는 사망의 독이 들어 있었다. 사망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단절이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다. 사망의 독은 평안을 깨드렸다. 부끄러움, 두려움, 미움, 원망을 분출한다.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원망하는 것은 귀신의 속성이다. 수치와 두려움이라는 질병을 품은 체 영생을 하게 되면 괴물이 되고 악마가 된다. 귀신은 원망과 두려움 덩어리다.

만일 그때 인간이 생명과일을 먹었다면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구천을 떠도는 악귀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그 생명과일을 먹지 못하게 막으셨다. 영생은 각종 악을 분출하는 사망의 독을 제거 한 후에 있어야 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구원은 반드시 정해진 방법으로, 정한 때, 정한 법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든지 나의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자는 도둑이요 강도니” 이것이 아담이 반드시 치유가 되어서 영생을 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주님이 회개를 외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권능을 받을 수 없다. 사탄의 능력을 받게 된다. 그래도 자신이 가진 능력이 하나님께로 온 것으로 착각하고 무작위로 그 능력을 행하면서 세상을 어지럽힌다.

우리는 종종 우리 주위에서 그런 인물들을 본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괴물, 의의 종의 옷을 입은 악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악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완전히 성화가 되어야 한다. 성화는 신적 양심으로 세상을 살 때 일어나는 자연적인 성장현상이다. 신적 양심은 생의 지팡이다. 생명은 움직인다. 생명이 영적 지팡이가 지시하는 대로 호흡을 하고 움직이면 성장을 한다.

Message No. 24.

에덴을 떠난 인간의 여정?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4)

여기서 먼저 3가지를 주목해 보자. 첫째 ‘그룹들’이다. 그룹들은 영체를 입은 영계의 being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에덴의 동편을 지키게 한 것이다. 둘째 ‘화염검’이다. 그룹과 마찬가지로 화염검도 영계의 무기다. 그런데 그것도 에덴의 동편에 배치시킨 것이다. 셋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다. 계시록에 보면 생명나무는 천상에 있는 과일나무다. 에덴 동편에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생명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 천상으로 옮겨 갔을까? 아니면 죽었을까?

이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영계의 being 들이 물질계에 내려와 에덴의 동편을 지켰다는 것이 된다. 아니라면 에덴이 영계에 있었어야 한다. 아니면 영계와 물질계의 중간? 연구해 볼만한 주제다. 하나님이 물질적인 인간 무대에서 사라진 후 인간은 수 천 년, 수 만년, 어쩌면 수 억 년, 사망의 독을 품은 체 죽음의 법칙 아래서 불안, 두려움, 허무, 질병 등에 시달리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유리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지구의 연대를 6천년 정도로 생각한다. 그런다 해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그럴 경우 1만 2천 년 전에 태평양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무 대륙(도시)은 어떻게 처리할 방법이 없게 된다.

어쨌거나, 에덴을 떠난 후 인간은 수많은 것들을 만들고 창조한다. 문화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고, 전쟁을 만들고, 사회와 제도를 만들고, 삶의 패턴을 만든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것 중 그 어느 하나도 완전하게 선한 것이 없었다. 부패한 창조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고 신을 찾아본다. 그러나 죄가 신을 찾는 것을 방해해 왔다. 사탄은 그런 인간을 이용한다. 사탄은 인간에게 상상력을 사용하여 가짜 신을 만들게 한다. 제법 그럴 듯 해 보이는 조언이었다. 그러나 사탄의 모든 가르침은 인간을 불행과 파멸로 이끈다. 인간은 자신들의 상상으로 가짜 하나님을 만들고, 상상으로 가짜 하나님의 형상을 조각하고 그것들을 숭배 한다. 신들의 이름도 자신들이 지어준다. 이것도 창조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모두가 허상이기 때문이었다.

허상은 영적 능력이 없다. 허상은 항상 인간을 목마르게 하고, 허기지게 하고, 지치게 한다. 그래서 인간은 또 다른 신을 조각한다. 신은 점점 많아진다. 사람은 계속하여 신을 만들고, 신의 이름을 작명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다른 신을 만든다. 그 이름과 숭배 방법도 그 지역과 환경 그리고 숭배자의 인간성에 맞추어 다양해진다.

상상이 많은 민족일수록 많은 신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에는 신이 많았다. 인간은 신의 이름 뿐 아니라 신들에게 족보까지 만들어 준다. 이러는 과정에서 인간은 숭배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무엇인가를 숭배하고 무엇인가를 갔다 바치지 않고는 불안하여 살수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짐승의 피를 흘리고 종국에는 사람의 피까지 흘리는 제사를 드리게 된다. 거기서 한 술 더 떠 사탄까지 숭배하게 된다. 사탄 숭배란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만든 제사다. 사탄은 보편적으로 악마에 대한 대표적인 이름이다. 악마 그 자체다. 성경은 루시퍼, 사탄, 마귀,  용, 옛 뱀 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직접 혹은 그의 무리들을 통해서 행하는 모든 사역은 악이고, 파괴고, 불의다. 인간이 그런 악마를 자진하여 선택한 것이다.

왜? 그만큼 사람이 악해져서다. 사탄의 영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태어나서다. 많은 그의 종들이 그와 함께 역사해서다. ‘그래,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 에덴 아니어도 이 땅에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를 건설 할 수 있다. 차라리 사탄의 힘을 빌리고 사탄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하리라. 하나님께 도전을 할 만한 힘을 가진 사탄의 그 힘을 얻어서 하나님 없이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리라.’

지금까지 사탄 제사는 수 천 년 비밀리에 계승 되어온 의식이다. 영화나 문헌을 보면 사탄제사는 깊은 동굴이나 일반인이 모르는 비밀 장소에서 은밀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지금은 고관대작이나 대 재벌의 대 저택에 그 재단이 있다고 한다. 대부분 어린 아이나 소년 소녀 등 깨끗한 인간을 제물로 쓰인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비밀리에 사탄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일까?

이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가 재물로 바쳐진 어린 아이들의 비명소리에 질려 그 세계에서 탈출한 증언자에 의하면 이들이 사탄 제사를 드릴 때 실제 신비로운 표적과 기적과 이적을 체험한다고 한다. 소리가 들리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계시가 내려오고, 환상이 나타나고, 바람이 불고, 병들이 고쳐지고, 누가 봐도 초자연적인 역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 제사를 집도한 제사장은 엄청난 영적 힘을 얻어 사람들 앞에서 그 힘을 나타내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제사 의식에 참석했던 거의 모든 참석자들도 엄청난 영적 능력을 얻는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곳에 참석한 참석자들이 대부분 세계의 유명 인사들이라는 점이다.

이런 사탄 제사가 드려지고 있는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한다. 지금은 수많은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 최근 페루에서는 10 세기경에 제물로 드려진 어린 아이 유골 수 백 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사탄제사. 우리는 한때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스캇 피터슨의 재판 때 그의 변호사가 만삭의 스캇의 부인은 비밀스런 사탄교도들로부터 납치되어 사탄제사로 받쳐진 희생양이라고 주장했던 것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사실여부를 떠나 사탄 제사가 그만큼 공공연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거물들이 개입되어있고 그들의 세력 또한 워낙 큰데다가 이들의 조직이 베일에 쌓여있어 이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해도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전모는 노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참고)

그래도 사탄제사는 미국 뿐 아니라 유럽, 남미 세계 각국에서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고 대중이 상상할 수 없는 인물들이 관여하고 있어 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류, 스스로 악을 선택한 인류, 그러나 아직도 신의 은총을 얻기 위해 쪼그리고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인류, 세상은 이렇게까지 다양하게 변해 왔다.

Message No. 25.

인간은 자유한가?

“See to it that no one takes you captive through hollow and deceptive philosophy, which depends on human tradition and the basic principles of this world rather than on Christ” (28)

어디선가,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 한다면 사람들은 웃어버릴 것이다. 지금처럼 사방팔방이 자유로 충만한 시대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을 조금만 더 크게 열고 보면 인류가 요즘처럼 자유 없는 살았던 적도 없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자유하다고 믿지만 자유하지가 않다. 우리가 자유라고 믿는 것들이 자유가 아닌 자유의 탈을 쓴 허상이다.

물론 나는 차가 있다. 그러나 그 차가 내 차인가? 아니다. 은행의 차다. 당장 돈을 내지 않으면 은행이 차를 끌어간다.

나는 집이 있다. 그러나 그 집이 내 집인가? 아니다 은행의 집이다. 당장 은행에 돈을 내지 않으면 나는 내어 쫓긴다.

나는 차를 타는 대신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나는 그 차를 몰고 아무데나 갈 수가 없다. 어디를 가도 빨리 돌아와야 한다. 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서 사는 대신 노동을 해서 집값을 내야 한다. 이것은 시스템이다. 그리고 나는 이 시스템을 거부할 수가 없다. 이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 시스템의 노예다. 내가 자유라고 하는 자유는 돈에 중독되어있다. 중독이란 질병이다.

그러면 이 시스템의 controller는 누구일까?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니면 하나님?

세상엔 조직이 있다. 국가도 조직이고, 직장도 조직이이다. 사람들이 이 조직에 들어가면 조직의 사람이 된다. 조직이 그 사람을 지배한다.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문화다. 선진의 문화, 흐름, 유행, 이런 향락에 길들여지거나 그런 선진적인(?) 생활 패턴에 중독이 되면 사람은 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문화생활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벌려면 노동을 해야 한다. 이것은 시스템이다. 나는 이 시스템의 노예다.

그렇다면 이 문화의 controller는 누구일까?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니면 하나님?

사람들의 습관과 생활 패턴에 따라 국가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문화시설이나 사회 보장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국가는 돈이 필요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런 국가에게 돈을 빌려줘서 국가를 개발 시키고 발전시킨다. 모든 국가는 안보라는 변수 아래 있다. 권자들의 탐욕이나 부정도 변수 중 하나다. 그래서 국가는 항상 extra 돈이 필요하다. 그 돈은 세금을 걷어서는 감당 할 수 없다. 이것을 빚으로 충당한다. 이것은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의 controller는 누구일까?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니면 하나님?

집이나 차를 떠나서 은행은 직접 개인에게 빚을 지게 한다. 빚을 져서라도 그들이 짜놓은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한다. 빚을 얻어서라도 누릴 것 누리면서 사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이라고 가르친다. 유치원 때부터 아이들에게 그런 삶의 패턴과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을 세뇌시킨다. 잠재의식을 이용한다.

스스로 자립을 할 수 있는 자영업을 없애고 대형화하여 모든 이들을 월급쟁이로 만든다. 평화가 깨지고 희망이 사라진다. 꼭대기에서 자기들이 꼭두각시를 세워놓고 자기들은 모든 이익금을 가져간다. 사람들의 저축성을 막기 위해 신용카드제도를 만들어 막대한 이자를 뜯어간다.

소비성을 만들기 위해 게임을 만들고, 문화를 발전시키고, 유흥을 진화하게 하고, 스포츠를 이용한다. 소비가 유행이 되게 홍보한다. 거리에서 노숙을 해도 농사일 같은 것을 피하는 게으른 사고방식을 심어 놓는다. 인간의 의식이 육체적인 것에 고정되어버리게 한다. 인류가 집단으로 나태하게 한다.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기 위해 마약을 먹게 하고, 미움을 일으키고, 원망을 일으키고, 두려움을 조장하고, 시기하게 하고, 불신을 창출해 낸다. 흑백을 가르고 평화가 없게 한다. 희망이 없게 한다. 세상을 깡마른 사막처럼 만들어버린다. 이것이 사회의 structure 다. 그렇다면 이 structure를 창조한 이는 누구일까?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니면 하나님?

그 structure 아래서는 행복에 대한 가치관을 바꿔야 한다. 창조주가 심어놓은 신성, 신성이 제공해주는 가치관은 거기에 fit 하지 않는다.

그림자 같은 어떤 세력에 의해 장악된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계속 인간의 의식을 바꾸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에 마취가 되었는지 자기 자신이 변하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몇 몇 그룹들이 내세에 대한 희망이라도 품고 신의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아 평화롭게 살아갈까봐 과학을 왜곡 하여 신이나 내세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만들고, 종교 속에 세속의 문화를 밀어 넣고 홍보해서 종교를 타락시키고 부정적으로 보이게 한다. 사람들이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믿음도, 신앙도, 하나님도, 기도도, 모두 웃음거리로 만든다. 인종과 인종이 섞이게 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없애 버린다. 주체성 자리에 인류애가 자리한다.

학생의 인권을 빙자, 학생의 정신을 파괴하고, 여자의 인권을 빙자, 여자의 정신을 파괴하고, 인간의 인권을 빙자하여,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고, 편리를 빙자하여 가정을 파괴하고, 인간의 모든 정신세계가 망가질 수 있는 유행을 만들고, 노래를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심지어 음식까지 만들고….이것은 진보고 흐름이고 유행이고 문화다. 인간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것의 최종 controller는 누구일까?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니면 하나님?

그들은 세계의 모든 부를 손에 쥐고 나라와 나라를 대상으로 인종과 인종을 대상으로 성과 성을 대상으로 인간 장기를 둔다. 영화 헝거 게임 (Hunger game)에 묘사된 것과 비슷하다. 인간의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이 현상은 누군가의 창조일까? 자연일까? 만일 창조라고 한다면 인간의 모든 자유를 죽이고 있는 이 창조자는 누구일까?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니면 하나님?

만일 그것이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한다면 그 자연적인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서로 미워하고 서로 불신하고 서로 경쟁하게 하면서 세계의 99%의 부를 가지고, 세계 99%를 노예화시켜 그들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한 조직, 힘, 문화와 정치, 경제라는 방편을 사용하고 있는 shadow, 그들은 누구일까?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니면 하나님?

세계는 평화를 외친다. 자유를 외친다. 사랑을 외친다. 세상의 골목, 골목에서 거리, 거리에서 종교, 종교 속에서 자유와 평화가 메이라 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점점 더 노예화되고, 불행하다. 인간은 자유와 평화의 이름으로 침략을 하고 뺏고, 뺏기도, 전쟁을 치룬다. 세계 제 1차 대전이 그랬고 제 2차 대전이 그랬다. 전쟁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들고, 뺏고, 뺏길 수밖에 없게 만들고, 미움을 품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 모든 흐름의 최종 controller는 누구일까?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니면 하나님?

목격자들에 의하면 사탄 제사를 드리는 자들은 사탄으로부터 가공할 만한 영적 능력을 받는다고 한다. 그들은 천리 밖에 앉아 마인드 코트롤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고, 명령하고, 지시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똑 같은 마음을 품게 하고, 서로 미워하게 하고, 싸우게 하고, 오해하게 하고, 불화하게 하고, 전쟁하게 하고, 재앙이 일어나게 하고 사람들을 죽게 한다고 증언한다. 사람이 불행하면 불행 할수록 그들의 능력은 더 파괴적이고 강해지고 인간이 악해지면 악해 질수록 그들의 영적 파워가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들의 만족감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평화와 자유를 흡입해 가는 힘, 그들은 누구일까?

계시록에는 하나님을 흉내를 내고, 그의 아들 예수님을 흉내 내고, 성령님을 흉내를 내는 사탄의 (삼위일체) 조직체와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제자를 흉내 내는 사탄의 제자들의 행적이 묘사되어 있다. 삼위 하나님의 능력을 흉내 낸 사탄의 영적 능력, 그들의 영적 능력을 받은 그 제자들이 일으키는 이적과 기적이 얼마나 장엄한지도 설명되어 있다.

세속의 한줌 영화 때문에 인간은 악을 경배하고 문화를 경배하고 돈을 숭배하고 평화라는 탈 앞에 고개를 숙인다. “내가 어디 사는 것을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위가 있는 데라.”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라”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지니”

사탄 제사도 부패한 이성의 업적이다. 인간 속의 이성이 악과 거래를 했다. 악은 쌓이면 더 큰 악이 되고, 더 큰 악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로부터 더 큰 영적 힘을 얻는다. 인간은 평안하지도 자유하지 않다.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평안하지도 자유하지 않다. 내가 나의 운명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자유를 찾는 것이 부를 얻는 것 보다 났고 평안을 찾는 것이 정금을 얻는 것 보다 나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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