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ssage No. 15.
인간의 실체 (1)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and breaths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The man become living being= dust + God’s breath=흙+하나님의 숨결=인간)
하나님이 영적인 세계의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시고 영적인 세계에 있는 자기의 숨결을 불어 넣어 영혼을 가진 인간 즉 생령이 되게 한 장면이다. 여기서 생령이란 영혼을 지닌 인간을 말한다. 물질로 빚어진 인간의 존재가 하나님의 생령을 품자 영혼을 지닌 생령이 된 것이다. 인간은 두 번에 걸쳐서 창조된다. 첫 번째는 흙을 빗어서 육적인 인간을 만들고 (육) 두 번째는 그 육체적인 창조물에 하나님의 영을 넣어 (잉태) 완성했다.
성경에 호흡을 불어넣다 (Breaths into) 가 다섯 번 나온다. 창세기 2:7절에 ‘하나님이 호흡을 불어넣다’와 에스겔 37장에 9-10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Breath entered into them) 그리고 디모데 후서 3:16절“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에서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 넣어(God -Breaths)’로 표현했다. 모두 다 같은 의미다.
계시록에서 사람을 살릴 때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니”(God Breath)라고 했다. 요한복음20:26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호흡을 불다 (Breathed on them)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물질적인 것에 자신의 한 부분을 생명의 원소로 사용한 장면이다.
창 2: 7 ‘Breath of life’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영적인 세계, 천상에서의 하나님의 숨결이란 성령이다.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은 너무나 고귀하고 엄청난 하나님의 한 위이시고 독립적인 한 지체의 일부이다. 그 영을 육체적 인간 안에 이식하신 것이다. 영적 세계에서 그것은 어쩌면 물질계에서의 피와 살과 같은 것일 수 있다. 그것을 인간 안에 불어 넣으셨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이 창조한 만물보다 더 위대하고 더 정성스럽게 만들었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세상을 사랑하고 다스리고 관리하여야 (rule over)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총 매니저요 청지기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let them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birds of the air over the livestock, over all the earth, over all the creatures that move along the ground”)
하나님은 죽음이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호흡을 넣어주심으로서 인간의 속성을 승격 (upgrade) 시켜 인간이 육적인 본능뿐만 아니라 ‘영적 능력’을 가진 생령(Divine being=육체를 가진 신성)이 되게 했다. 영적 능력이란 너무나 광범위한 능력이다. 요약하여 창조 능력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래서 인간은 창조 능력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보조 능력 (하나님을 보고 같이 대화하고, 하나님의 세계의 being 들과 소통하고…기적도 행하고…)도 가지게 되었다.
신학자들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이것을 “우리와 같이” , “우리의 형상대로” 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계시록엔 하나님을 거대한 빛으로 소개되고 있다. 빛을 인간의 언어로 바꿀때 ‘창조 능력’일 수도 있다.
인간은 본래의 육적 본능에 영적 본능이 덧입혀 졌다. 하나님께서는 합쳐진 두 본능을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사랑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데 사용하게 하셨다. 이성만을 가진 물질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덧입혀져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과 영혼과 양심을 가진 거룩한 실체로 바뀌어 그 능력으로 모든 창조물을 지배하게 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속성도 이 땅의 표현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의 논리 밖의 논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육적인 본능은 육적인 생존에 필요한 능력이다. 육적인 이성은 육적인 생존에 필요한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영적인 본능은 영적인 생존에 필요한 능력이다. 영적인 신성은 영적인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한 인간 안에 있는 두개의 자아라고 했다.(로마서 7장-8장) 이것이 인간의 실체다. 그러나 덧입혀 졌다는 것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가 다치면 다른 하나가 다치는 것과 같다. 영혼이 병들면 육체도 병든다는 것과 같다.
*디모데 후서 3;16절에서는 인간의 말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어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이 손으로 쓰고 있는 글을 거룩한 영이 쓴 글이 되게 했다. 하나님의 책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실제 그것을 입증해 보였다.
그 말씀을 듣고, 들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났다. 병든 자가 건강해 졌다. 가난한 자가 부해졌다. 불행한 자가 행복해 졌다. 영안이 열려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님 시절부터 2천년 동안 성경 밖 인류의 구석구석에서 계속 일어났던 현상이다. 태초의 인간은 바로 그런 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어디서나, 무엇이나 하나님의 숨결 (Breath) 이 닫으면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난다. 그곳이 무덤속이든, 그곳이 감옥이든, 그곳이 불탄 잿더미 속이든 상관없다. 평화의 세상, 평안의 세상이 열린다. 빈곤이나 한계가 없는 사랑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래서 태초의 인간 세상은 평안했다.
Message No. 16.
인간의 실체 (2)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3가지로 나눠서 설명한다. 윤리적 형상, 형태적 형상, 기능적 형상이다. 예수님에 의해 회복된 윤리적 형상은 칭의 부터 시작하여 현재 완성으로 가는 중이며 우리가 죽을 때 완성된다는 논리다.
형태적 형상도 우리가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해 가는 중이며 주님 재림 때 완성된다고 한다. 그리고 기능적 형상은 땅에 대한 지배력인데 주님 재림 때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학적인 설명을 뒤로하고 ‘형상’이나 ‘같이’ 란 물질화된 상태의 어떤 모습이나 형체를 뜻한다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영적인 세계는 물질화된 육체가 없다. 그러나 속성을 담을 그릇(육체)은 없지만 속성은 있다. 그것이 윤리적이든 형태적이든 기능적이든 상관이 없다. 어쩌면 그것이 영적 육체인지도 모른다.
전기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방팔방에 흐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속성은 사방팔방에서 스스로 존재한다. 성경은 그 속성을 창조성이라고 말한다. 성령의 속성이 창조성이기 때문이다. 난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랑도 창조성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인간 속에는 양심, 사랑, 지성, 공의, 창조능력 등등이 들어있다. 이것으로 인간은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 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숨결이 하나님의 형상인가? 무형의 형상이 물질적인 유형의 형상으로 convert 되었을 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동물은 문화가 없다. 문화를 만들 능력이 없어서다. 동물은 신이 없다. 신성이 없어서다. 우리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브갓네살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인간의 실체를 볼 수 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영이 떠나자 그는 사람에게서 쫓겨나 들판에서 짐승과 같이 풀을 뜯어 먹으며 이슬을 맞으며 7년 동안 짐승으로 생활했다. (다니엘 4장 34절)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넣어 놓으신 영을 잃으면 느브갓네살처럼 된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다. 그분의 속성도 스스로 존재한다. 그분의 모든 것들은 스스로 존재 한다. 속성이 껍질이고, 껍질이 속성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여호와의 이름이 권능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이나 지혜, 사랑을 인간이 자기의 지식으로 가장 잘 이해 할 수 있는 단어는 바로 “우리와 같이,” “우리의 형상” 이다.
우리 육체는 영과 혼을 담는 집이다. 하나님의 영(숨결)이 그런 능력을 지녔기에 하나님의 숨결을 통해 우리 영혼이 새로 탄생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이런 창조능력이 생긴다.
물론 그것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 할지라고 영적인 세계, 영적 존재들의 활동이나 사역들은 쉽게 인간의 단어에 묶이지 않는다. 표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름 자체가 능력이라는 것은 이름 자체가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논리가 아니다. 논리가 될 수 없다. 논리 위의 영적 논리인 것이다.
계시록엔 하나님의 존영을 너무너무 밝아 처다 볼 수도 없는 거대한 빛의 덩어리고 표현했다. 하나님의 존영이란 공상 영화에 나오는 눈만 크게 달린 짐승 같은 것이나, ET 나 괴물 같은 우주인의 모습도, 짐승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 어떤 무리들이 만든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오는 추한 우주인들의 모습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 빛은 우주인도 지구인도 감히 처다 볼 수가 없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 빛에 대해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창조능력 그 차체든, 아니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실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눈에 보이시지도 않는다. 그러나 만일 물질화 되었을 때 인간의 언어로 표현 한다면 하나님은 이 세상 그 어떤 것 보다 눈부시고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고 고운 형체이실 것이다. 인간의 눈높이에서 인간보다 더 아름다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의 본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항상 아름다운 것이다.
그분은 4차원, 5차원, 아니 차원 밖, 모든 차원을 초원하여 계시는 존재시고 육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분이다. 그분은 너무 어마어마하셔서 상상 자체가 불가능한 분이다. 인간이 바로 처다 볼 수 없는 거룩하시고, 밝고, 찬란한 빛에 둘러싸여 있고, 하나의 형체이면서 하나의 형제가 아니시고 하나이면서 삼위이신 분이 그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볼 수 있다고 했다. 마음에 하나님을 보는 눈이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마음 자체가 눈이라는 뜻이다. 그 눈에 때가 끼어 앞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을 못 본다.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온 몸이 캄캄 하다.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그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보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많은 민족에 의해, 각각 다른 이름과 다른 모습으로 상상되고 불러져 왔다. 물론 그것은 틀리게 조각된 것이고, 틀리게 새겨진 것이고, 틀리게 숭배된 것일 수 있다. 심지어 천국을 갔다 왔느니 지옥을 갔다 왔느니 하는 사람들마저도 하나님을 봤다는 이는 거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3층천에 대한 간증을 자제했는지도 모른다.
요한복음엔 하나님을 “소리, 로고스”라고 표현했다. 그 뜻은 무엇일까? 소리는 이 세상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이 세상의 존재하는 형체로 묘사해 내거나 상상해 낼 수 없다. 로고스는 말씀을 뜻한다. 말씀이란 주체가 있어야 한다.
로고스는 주체가 없다. 주체 없이 존재한다. 말씀이 곧 주체다. 하나님의 형상이 껍질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속성인 것처럼 이 말씀도 주체 없이 스스로 존재하며 육의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이 세상의 존재하는 모습으로 표현해 낼 수 없다. 이 소리와 말씀이 생명이고, 영생이고, 길이고, 진리다.
Message No. 17.
인간의 실체 (3)
에덴에서 보여 진 인간의 능력을 한번 살펴보자. 요약하면 인간은 사랑, 창조 능력, 관리 능력, 정복 능력의 빛을 가진 생령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딱 둘이다. 육체적 모습이 보이지 않은 영적 하나님의 형상과 같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의 형상이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영을 담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만일 인간이 하나님께서 부어 넣어주신 영을 잃으면 인간은 짐승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격이 짐승의 격으로 떨어진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넣어주신 영의 지닌 능력을 점검하신다. 하나님은 일단 자신이 창조한 모든 창조물을 아담에게 데려 오신다. 그것들의 이름을 짓게 하신다.
작명에는 많은 지혜와 명철이 필요하다. 특정 물체의 성격과 그 물체가 지닌 독특성 그 물체와 다른 물체와의 관계 그리고 미래의 성취 성까지 고려되어 그 물체에 가장 적합하게 붙여져야 한다.
아담은 어디서 무엇을 배운 적이 없다. 그런 그가 그 많은 이름을 짓는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창조 능력과 지혜, 명철이 있어야 해 낼 수 있는 작업이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영이 지닌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 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들에게 이름을 주니라.” (창 2: 10-20)
아담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첫 번째 사역을 거뜬하게 해내었다. 아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능력의 사역이다.
바로 하나님의 숨결(영)이 하나님이 만든 육체에 거함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의 영, 그 영이 지닌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사역이었다.
“우리와 같이, 우리의 형상대로”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미리 상상했음을 말해준다. “흙을 빚어” 말씀으로 빚었건, 영체의 손으로 빚었건 인간의 손놀림을 상상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상상은 인간의 손과 같고 하나님의 생각도 인간의 손과 같고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의 손과 같다. 생각은 상상에서 나온다. 너무 크게도 너무 작게도 아니하신 인간의 체격에서부터 모든 신체의 위치까지 하나님의 창조 기술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생각은 상상에서 나온 무엇을 보다 정교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다듬는 일을 하게 된다. 너무 긴 것은 줄이고 짧은 것은 넓히고 말을 나오게 한다. 생각이 완성되면 다음엔 행동이 일어난다. 아담은 하나님의 기대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게 하나님이 창조한 각각의 창조물과 그 창조물을 만들 때의 하나님의 상상을 상상했고, 생각을 했고, 그리고 말을 했고, 그 말이 이름이 되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물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지어가면서 하나님이 그 창조물을 그렇게 만드신 이유를 알아갔다. 그리고 그가 이름 지은 모든 창조물에 대해 낯을 익혔다. 장차 자신이 다스릴 동식물이이기에 그들을 알아놓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셨다. 하나님의 상상과 생각과 말과 일치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호흡을 넣어놓은 인간의 창조 능력을 점검하신 후 천지 창조를 끝내신다.
인간의 능력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계시록에는 하나님은 아무나 쳐다볼 수 없는 너무 밝은 빛으로 묘사 된다. 그러나 아담은 그런 하나님을 직접 뵙고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천지 창조에 등장하신 하나님은 영체로서 인간의 형상과 같은 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질적인 육체를 가진 아담이 하나님의 존영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암시다.
성경은 종종 인간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들을 만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노아, 아브라함, 롯 다윗 등등. 이때는 대부분 여호와 혹은 그의 사자들이 인간의 형체와 같은 형체를 하고 인간에게 나타난다.
에덴에 나타난 하나님은 태초의 하나님 그대로였다. 아담 하와는 하나님께 직접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보고 있었고, 그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나님의 숨결(Breath)이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지녔는지는 아담이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빛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음에서도 증명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과의 소통, 영의 세계와 소통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타락 후 인간은 많은 능력을 잃었다. 마음의 눈이 나빠지고, 귀가 멀어 하나님의 발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하나님 뿐 아니라 영적인 세계의 천사나 그 소속 존재(Being)들을 불 수 없고 그들의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장기는 사용하지 않으면 나빠진다. 영적 장기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인류의 모든 영적 장기가 망가져버린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이 지닌 장기를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영적 장기든 육적 장기든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망가지지 아나한다. 녹슬지 아니한다. 에너지가 나오고 스스로 재생되어 활력이 드러난다.
창세기 4장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강림하셔서 가인과 대화를 하신 것을 끝으로 인간과 영계와의 소통은 완전히 끊어져 버린다. 이것이 구약의 기록에 의하면 그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