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50
나는 제사장인가?
“이에 성서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갈라지고……”(마27장 51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나타난 현상 중 하나이다. 성소휘장이 갈라진 것 – 찢어져 버린 것 – 이것을 놓고 두 가지 해석을 한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드리던 제사가 폐해졌다는 것과 제사장 제도가 폐해지고 각 개인에게 제사장권이 넘어 왔다는 해석이다. 부분적으로나마 천상의 일을 보여주는 계시록을 보면 성도가 제사를 드리는 것에 대한 것을 추론할 수 있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히브리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Their sins and lawless acts I will remember no more. And where these have been forgiven, there is no longer any sacrifice for sins” (히 10장 17절)
히브리서 말씀이 사실이라면 구약에서 드리는 제사는 폐해진 것이 맞다. 그러나 신약에서도 바울은 제사에 대해 여러 가지 언급한 것들이 있다. 혼돈을 피하기 위해 바울의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제사에 대해 알아보자.
제사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복잡한 전문 용어를 뒤로하면 히브리서에서 말한 제사란 사람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기도였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예물을 드리면서 하는 기도였다. 대신 제사장이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를 집도 했다. 제사 때 요구되는 청결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사장은 제사를 지내기전 청결함을 위해 많은 자기관리에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신약에는 예물도 없이 우리가 직접 기도를 드린다. 예물은 이미 드려져 있다. 주님의 몸이고 주님의 피다. 우리는 그저 “예수 이름”으로 만 외치면 된다. 그렇게만 해도 우리의 기도는 미사일처럼 하나님 보좌에 도달한다. 그렇게 드려진 우리 기도를 받아 주시고 우리가 구한 것을 들어 주신다고 약속했다.
예수 이름은 예수님의 희생을 의미한다. 갈보리에서 우리의 대속 물로 이미 드려진 그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제물을 사용하여 주께서 알려주신 다른 형태의 제사를 드린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살아있는 제사고 살아있는 기도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요약하면 청결하게 사라는 것이다. 마음도 정신도 청결하게 살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제사장에게 요구했던 제사 요건과 같다. 다른 형태의 제사다. 복잡한 의식이나 절차가 없다. 그러나 마음의 성결은 같다. 신을 찾을 때는 언제나 마음이 성결해야 한다는 의미다.
제사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어떤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 그 제사를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얻고, 그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한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해 왔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민족들이 바로 이런 의미로 신을 숭배했고, 신에게 제사를 드려 왔다. 제사장은 일반 백성들보다 더 성결한 생활을 요구 받았다. 제사장 지파로 선택받은 레위 지파는 분깃을 주지 않고 일반 백성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게 했다. 십일조로 먹고 살게 했다. 성결한 삶을 위해서다. 육적인 욕망을 위해 일을 하는데서 오는 여러 가지 부작용과 부정 타는 것을 방지 하게 하기 위해서다.
먹을 것을 대 주면서 오직 성결한 삶을 살게 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제사일이 다가오면 부부관계도 피했다. 성결함을 위해서다. “내가 저희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였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일이 없느니라.”(히10:16)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제사장으로 만드셨다. 주님이 만드셨으니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제사장으로 지명하신 것이고 임명하신 것이다. 제사장으로 기름 부은 것이다. 성령을 부어주신 것이다.
지금은 만인 제사장 시대이다. 성결의 시대다. 모두가 제사장이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러기 위해선 성결해야 한다. 육적인 탐욕을 버려야 한다. 대신 하나님이 의식주는 책임져 주실 것이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이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우리는 직접 구할 수가 있고 직접 빌 수가 있다. 죄가 있으면 빌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당당하게 요구 할 수가 있다. 죄인 처럼이 아니라 아들처럼 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들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들이라 했다. 그러니 아들이다. 하나님은 천상에 속한 분이다. 우리는 천상에 속한 분의 지상에 있는 아들이다. 때가 되면 우리를 천상으로 데려 가실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에 관심을 갖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답게 살라고 요구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아들이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것 또한 당연한 권리다. 도움을 주는 것은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의무다. 우리는 지상에 사는 동안 무엇이든지 구할 수가 있다. 예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다. 왜 예수 이름을 받쳐야 하는가? 예수 이름이 바로 이 모든 것의 보증이 되기 때문이다.
“Because we(you) are sons, God sent the spirit of his son into our hearts the spirit who calls out Abba Father. So you are no longer slave but a son and since you are son, God has made you also an heir.”(갈 4장 6-7) 당당하게 청하라는 의미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자요,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자다. 이는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선지자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제사장이요, 아들이다. 우리는 자유하다. 누구의 간섭도 필요 없다. 어떤 족쇄도 우리를 옭아맬 수가 없다. 모든 제도는 우리 발아래 있다. 그런 제도가 나를 죄의식에 가둘 수 없다. 나의 본능적 죄의식은 주님이 가지고 가서 십자가 밑에 장사지내 버렸다.(골2;13-14) 나는 주님과 함께 부활한 자유만 있다. 영생만 있다. 성령이 보증하고 계신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51
믿음의 법칙.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를 간절하게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것이니라.” (11장 6절)
믿음의 두 가지 큰 가지를 살펴보자. 1. 보편적 믿음과 2. 구원의 믿음이다. 본문에서 말한 믿음은 구원의 믿음이다. 구원의 법칙이라고 말해두겠다.
구원을 위한 믿음에서 3가지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이시다.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말한 믿음에서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존재에 대한 믿음 없이는 예수님도 성령님도 믿을 수가 없다. 믿는다면 이는 거짓말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둘째는 하나님이 자신을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여기서 말한 ‘상’이란 아무런 조건도 없이 내리는 순수한 선물이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믿는 믿음에서 끝을 낸다. 주님을 믿는 믿음 하나로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맞다. 그러나 믿음에는 믿음 이상의 믿음이 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렇다면 그 선물은 무엇일까? 왜 선물을 주시는 분으로 믿으라는 것일까? 그것이 하나님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실체는 주시는 것이다. 사랑을 주시는 분, 영생을 주시는 분, 축복을 주시는 분, 어머니처럼 – 아버지처럼 주시는 분이다. 그렇게 믿는 것이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 기뻐하신다고 하셨다. ‘선물’이란 좋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물 보따리는 무조건 좋은 것이다. 은총이다. 그를 찾는 자에게 선물 보따리를 주시는 분으로 믿으라고 한 다. 구약에서 뭐라 했건, 선지자가 뭐라 했건, 제사장이 뭐라 했건, 모세가 뭐라 했건, 엘리야가 뭐라 했건, 이사야가 뭐라 했건, 이제는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주님이 말하신 대로 선물을 주시는 분, 복을 주시는 분, 용서를 주시는 분, 사랑을 주시는 분으로만 믿으라는 말씀이다. 할렐루야.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보혜사 성령 그가 오시면” 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주시는 자로 표현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보혜사 성령은 자신의 영이다. 그 영까지 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그가 활동하신 모든 영역에서 기회가 있을 때 마다 하나님을 무엇이든지 후하게 주시는 자로 소개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주시는데 제한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치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 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라.”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주님은 하나님의 역할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주셨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주시는 분,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 하시고 보증하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하나님께 구해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자격 요건까지 말씀 하신다. 그 사람의 자격이 거창한 직책이나 거룩한 생활에 있지 않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으면 이라고 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채점을 우리 자신이 해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점수를 우리 자신이 매기라는 것이다. “아, 나 이정도면 합격이야.”
어떤 분이 한의사 시험보고 와서 다 맞았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떨어졌다. 그분이 만일 self 채점을 했다면 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self 채점을 인정해주시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If our hearts do not condemn us, we have confidence before God and receive from him anything we ask”. “우리 “양심에 거슬릴 것이 없으면” 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양심에 가책이 없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것이다. 만일 내가 육체의 정욕을 위해 구하고 있다면 이는 분명이 양심의 저항을 받을 것이다. 그 외에 우리가 우리 삶에 필요한 의로운 소망이나 의로운 꿈을 위해 비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이루어 주신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역사를 통해 그려낸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셨다. Cause and Effect에 의해 잘못을 하면 반드시 그 대가를 3-4대까지 물리는 하나님이셨다. 그렇게 충성을 다하던 모세가 화를 한번 낸 것으로 벌을 내리신 하나님이셨다.
잘하면 은혜를 수 천대까지 갚겠다고 했지만 하나님께 잘해서 수 천대까지 복을 받은 사람은 없다. 복 받았다는 모세의 후손 이야기도 없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다. 자기들이 로마에 나라를 잃고 세계에 흩어져 방랑생활을 하는 것도 모두 자신들의 조상들이 잘못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들 자신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의식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 전혀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선포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예수님은 크신 사랑을 입증하기 위해 독생자이신 자신까지도 대속의 재물로 이 세상에 보내주셨음을 외쳤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다. 그러나 믿음이 깊어지면 지식이 되고, 지식이 깊어지면 아는 것이 되고, 아는 것이 깊어지면 살아있는 현실이 된다.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 축복을 내리시는 하나님, 사랑을 내리시는 하나님, 자신의 영을 내리시는 하나님. 유대인들이 그린 하나님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장 24절)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52
예수님에 대한 믿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믿음은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일까? 구원은 멸망의 자리에서 구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을 상으로 받는 믿음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의 육체를 입고 나타난 천상의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분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순전히 영적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것을 알고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없는 기적을 베풀었고, 죽은 자까지 살리셨으며, 자신이 직접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믿음은 지상의 사전적 의미로 국한시킬 수 없는 사전적 의미 그 이상이 있다. 믿음은 살아있는 신적 ‘무엇’ (something divine) 이다. 마음에 믿음이 있어야 천상의 존재들이 들어오고 나갈 수가 있다. 소통할 수가 있다. 믿음이란 창조의 에너지고 도구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것 이상이다. 믿음은 예수라는 이름을 향했을 때만 살아있는 신적 ‘무엇’ (something divine) 이 된다.
성경은 적어도 2가지 차원에서 믿음을 말하고 있다. 영혼 구원과 육체의 구원이다. 이 세상에서의 구원과 저 세상에서의 구원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의 구원은 죄의 (세상의 탐욕)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의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영생을 소망하고, 영생을 위해 이 땅에서도 성령과 더불어 사랑과 평안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육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육적인 욕망만을 위하여, 육적인 욕망의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이 육적인 욕망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의로운 욕망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그것을 구원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사슬처럼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 육체의 구원이 영생의 구원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바울은 육체의 구원 없이는 영혼의 구원이 없고 영혼의 구원이 없으면 육체의 구원도 없다고 했다. 육체의 구원이란 육체의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 사람을 덧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적인 욕망이란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 나와 있고 에베소서 5장 4-5절에 보충 되어 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9절, 고전 6장 16-19절에도 나와 있다. 탐욕, 교만, 투기, 방탕, 나태, 식탐, 음행, 거짓말, 음담패설, 추한 농담, 저속한 말, 등등. 이런 것들을 성경은 육체의 정욕이라고 말한다. 이것들은 사람을 가두는 성향이 있다. 꼼짝도 못하게 묶어버린다. 모든 자유를 빼앗아 버린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아니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많은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양심에 따라 그것을 행한다. 그런데 양심이란 모두 같은 것이 아니다. 태어난 환경과 자라난 환경 그리고 교육, 종교, 나이, 성별, 이런 것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오늘의 선이 내일엔 악으로 변하고, 오늘의 악행이 내일엔 선행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인간은 그렇게 살아간다. 아내가 있는데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들 수 있다. 사춘기가 되면 야한 그림만 봐도 이상한 생각이 든다.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다. 누구를 만나면 남의 얘기를 한다. 모두 악으로 간다.
자기만을 위한 생각, 본능이 하라는 대로 하고 싶은 생각, 해서는 안 될 일인 줄 알면서도, 해서는 안 될 말 인줄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과 말, 거짓말, 시기, 질투, 미움, 원망,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삶의 구습이요, 습관이다. 구원이란 바로 그런 생활의 구습과 패턴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다. 의를 행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이다.
주님은 이 두 가지 측면에서 구세주 였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죽는다. 죽으면 흙으로 간다. 이것은 정해진 이치다. 자연의 법칙이다. 우주의 법칙이다. 지금까지 모든 인류가 그랬다. 그런데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라고 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 물론 부활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이 있어야 일어날 수 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그동안 사람들은 죽었다. 영생을 하는 대신 그 육체가 죽어 땅으로 돌아갔다. 땅으로 돌아가면 그 사람의 육체는 해체된다. 불은 불로, 바람은 바람으로, 물은 물로, 흙은 흙으로, 분해되어 버리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라문교의 교리) 물론 부활 때 그 육체가 다시 모아진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우주의 보편적 죽음이란 육과 영과의 분리를 의미한다. 육은 영혼의 집이고 옷이다. 죽으면 영혼은 자기의 옷을 벗는다. 옷이 다 낡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천상에서는 물질적인 세상의 옷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물질계의 옷을 벗은 영혼은 천상에서 필요한 천상의 옷을 입게 된다. 그것을 성경은 예복, 세마포 옷 이라고 표현한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육체를 벗을 때, 우리 영혼이 천상에서 입어야 할 옷으로 바꿔 입게 된다면 우리의 생은 삶과 죽음 사이의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된다. 즉 우리 속에 있는 생명 (영, 혹은 마음과 영혼) 이 이 세상의 옷을 벗고 천상의 옷으로 갈아입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죽음을 맞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죽음을 맞보지 않고도 바로 천상으로 가는 삶을 영생이라고 한다.
생명은 신비다. 변화무쌍 하고 내가 이렇다 저렇다 결론 내릴 수 없다. 그 생명이 그리스를 통해 거듭나 성령이 지배하는 빛과 소금의 삶을 살다가 성화되어 더 큰 빛이 되어 천상으로 옮겨 간다면 이것이 바로 영생이고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최종적인 상급인 것이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서만 가능해지는 구원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53
성령님에 대한 믿음.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자가 없으리라.”
성경은 성령에 대한 믿음을 따로 취급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성령의 대한 믿음은 너무나 중요하다. 주님은 영이지만 한번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던 분이시다. 그러나 성령님은 한 번도 인간의 육체를 입은 적이 없다.
인간의 육체를 입지 않은 분이 어떻게 인간 세상에서 일을 하신다는 것일까? 본래 존재하는 인간의 육체 안에서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체를 빌려서 살고 있는 영이시라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분에 대한 바른 믿음은 더욱 절실하다. 성령은 믿음을 따라 믿음만큼 움직인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도 허탕이다.
성령이 없으면 부패한 육체의 정욕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육체적 정욕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소유할 수가 없다. 가시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시들어버리고 말라버린다. 거듭난 영혼을 기르시는 분이 없다는 것은 거듭난 영혼이 없다는 것이다.
“성령도 친히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성령은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을 찾게 하신다. 주시는 하나님께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구하게 하신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이를 자가 없느니라.” 성령은 우리에게 육체의 정욕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신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 전 5장 19절.) 성령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이다. 성령은 공중에 떠다니는 혼령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하나님의 영이시오, 하나님의 정신이다. 우리는 성령을 믿어야 한다. 성령이 우리 속에 임하여 계심을 믿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숨을 쉰다.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여기서 권능이란 능력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이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망하겠느냐?”(갈 3장 3절) 성령의 역사가 멈출 수 있다는 의미다.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이 탈선할 수 있다는 얘기다.
“But God has revealed it by His Holy Spirit”(고전 2:10) 성령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는 뜻이다.
“If the spirit of him who raised Jesus from dead is living in you, he who raised Christ from the dead will also give life to your mortal bodies through his spirit who live in you.” (로 8장 11절) 육체 안에서 살고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육체에 생명을 넣어 주실 것이라는 말이다. 에덴에서 하나님이 생기를 코에 불어 넣어주시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말씀이다.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2) 구원에 대한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말이다. 성령을 주셔서 우리를 기르고 양육하고 천국의 법도를 가르치고 알려주고 몸에 베게하고 익혀서 영원한 천국에 데려가겠다는 약속의 증표로 천국 백성으로의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성령을 약속의 증표로 주셨다는 뜻이다. 주님은 이미 자신의 약속을 시작하셨다.
“Having believed, you were marked in him with a seal, the promised Holy Spirit who is a deposit guaranteeing our inheritance until the redemption of those who are God’s possession to the praise of his glory.”(엡1:13-14)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구원의 순간까지 성령으로 도장을 찍었다는 의미다. 성령으로 사인을 했다는 의미다.
“So not grieve the holy spirit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Get rid of all bitterness, rage, and anger, brawling and slander, along with every form of malice. Be kind and compassionate to another, forgiving each other, just as in Christ God forgive you.” (엡4장 30절) 우리의 구원의 순간까지 우리를 인치고 계시는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믿고 인정하라는 뜻이다. 성령도 한 인격체라는 말이다. 성령도 감정이 있다는 말이다. 성령도 기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 것일까? “너희는 모든 악독과 분노와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과 모든 악의를 함께 버리고”
악독을 버리라고 한 것은 악을 품고 있을 때 성령은 고통스러워 우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마음에 분노를 품고 있을 때 성령은 고통스러워 구슬프게 우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남을 훼방하고 비난 할 때 성령은 고통스럽게 우신다는 뜻이다. 우리 마음에 악의 모양이라도 품고 있을 때 성령은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슬퍼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불쌍히 여기며 무엇이든지 용서하면” 성령은 힘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는 뜻이다.
성령에 대한 믿음은 중요하다. 성령이 우리 속에 임하여 계시고 우리가 성령의 전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그는 영생이 없고 구원이 없다.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시고 우리가 성령의 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이 행함을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you were bought at a price. Therefore honor God with your body”(고후 6장 19절)“Whatever happens,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빌 2장 27)행동을 통해 성령을 소중히 하고 사랑해야 한다.
“But among you there must not be even a hint of sexual immoral or any kind of impurity, or greed” “Nor there should be obscenity, foolish talk, or coarse joking which are out of place, but rather thanksgiving.” (엡 5장 3절, 5절)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54
보편적 믿음의 법칙
“만일 너희가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저리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장 20절)
이는 백성들에게도 유대 지도자들에게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는 말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한계를 허물어버리는 말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도대체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 주님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이루는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
첫 번째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자기에 대한 믿음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해왔다. 그것이 겸손이요,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도 할 때 무조건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한다. 그것이 기도자의 자세라고 생각하고 교회도 그렇게 가르친다.
성경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예를 들어 예수님이 그렇게 설명했다. 바리새인은 기도 할 때 “주여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일주일에 3번 금식하고 ….감사하나이다.” 멋진 기도다. 그러나 세리는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그러나 예수님의 이 비유는 사실 그대로였다.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린 자”들 이었다. (마 23반 23절) 그들은 처음부터 죄인이었다. 죄인이 의인 행세를 했으니 죄인이다. 세리는 만인의 머릿속에 죄인이라는 고정관념이 들어 있었고 본인 자신도 그것에 전도되어 있었다. 죄인 바리새인은 와서 회개를 하지 않았으니 죄인으로 남은 것이고 죄인 세리는 와서 회개를 했으니 용서받고 의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했다. 산상 수훈을 가르치시면서 모인 무리들에게 하나님을 천부라고 말씀 하셨다. 천상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우리가 그의 자녀라는 뜻이다. 죄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천부라고 부를 수도 없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했다. 우리는 값을 주고 샀다고 했다. (고전 7: 23. 6: 20) 더 이상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닌데도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요, 무지요, 아이덴티티 상실이다. 이는 마귀의 속삭임이다.
예수님이 한 소경을 낮게 하였을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그 소경을 데려다가 심문한 장면이 나온다. 이때 “너는 예수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는 질문을 받은 그 소경이 “나는 그가 누군지는 모르나 하나님이 죄인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압니다.” 라고 대답한다. 기가 막힌 대답이다.
우리는 날마다 기도를 한다. “하나님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시고 ….” 한번 용서를 빌었으면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계속 죄인의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계속 죄인이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과 상종을 못 하신다. 이는 우주의 법칙이다. 그래서 회개를 주셨고 예수를 주셨다. 죄를 없애야 상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은 소경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주님이 우리를 의인 만들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왜 우리는 아직도 우리 자신을 죄인취급하고 있을까? 이것이 겸손일까? 아니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한 마귀의 술수일까?
교회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각인시키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을 해 왔다. 이것은 인간을 하나님과 비교 시키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 그분의 속성도 비교 대상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도 비교 대상이 아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분은 아버지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다. 아버지는 어린 자녀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 더더구나 그 분 앞에 서면 그분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만 본다고 했다.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전인 되었다. “너희는 내가 이미 너희에게 일러 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우리의 죄는 이미 사함 받았다.(히10:17) 주님 안에 우리가,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한다. 성령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자가 되었다. 믿는 자가 날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겸손도 미덕도 아니다. 10을 5라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 아니면 무지다. 10은 10이다. 10을 10으로 믿어야 10일 된다.
겸손은 인간을 평가하는 잣대가 없는 마음이다. 이분법적 평가가 없는 마음이다.(몸14:22)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리라.(고전 4:3)“ 상대에 대한 채점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인생은 외모로 평할 수 없는 영적 진행형이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너희는 내가 한 일도 할 것이요 나보다 더한 일도 하리라.”
두 번째 자연 법칙에 대한 믿음이다. 우주에는 법칙이 있다. 믿음의 법칙이다. 어떤 것을 강하게 믿으면 그 믿음이 현실로 나타난다. 자신에게 행운이 온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행운이 오고 불행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면 불행이 온다.
불교 사람들도, 이슬람 사람들도, 무속 인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미신을 믿는 사람들도, 이런 보편적 믿음의 법칙에 의해서 흥망성쇠를 조종한다.
이 우주는 아직 사람의 머리가 닺지 않은 너무나 신비로운 법칙들이 많다. 어떤 분은 거액의 헌금을 하면서 그 헌금을 하면 반드시 신이 곱으로 축복해 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믿는 대로 되었다. 어떤 거부는 거액의 돈을 교회에 기부 하면서 이 돈을 기부하면 자기 자녀가 의대에 합격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믿는 대로 되었다. 암이 걸린 어떤 신도는 1천배를 드리면서 1천배를 드리면 반드시 암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병이 나았다. 보편적 믿음 때문이다. 인간 속에 이런 무진장한 능력이 있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55
기대의 법칙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막9장 23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8)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죽을병이 걸려 자신은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매일 병상에서 창밖에 서 있는 나무에 달린 나무 이파리에 자신의 생명을 의인화 한다. 나무의 이파리가 모두 떨어지는 날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느 날, 나무 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 한 잎이 남았을 때 거친 비바람이 밤은 할퀴고 지나간다. 그는 이제 마지막 남은 잎은 떨어졌을 것이고 자신은 죽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본다. 그런데 나무 잎은 그대로였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무 잎은 그대로였다. 이에 그는 “아, 저 마지막 나무 잎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자신은 죽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생기를 되찾게 된다. 한 무명 화가가 밤사이에 나뭇잎을 그려 놨던 것이다
이것이 기대의 법칙이다. 내가 어떤 것을 진심으로 기대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칙이 있다. 우주의 법칙이다. 나무 잎이 떨어지면 죽는다는 보편적인 믿음의 법칙과 거기에 수반되는 기대의 법칙에 의해 주인공을 죽어가다가 살아났다.
어떤 돈 많은 신자는 만일 자신이 하나님께 1백 만 불을 바치면 하나님은 그 보다 몇 배를 축복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믿음을 가지고 헌금을 했고 기대한 대로 축복(돈)을 받았다. 기대의 법칙이 작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분이 그런 거대한 믿음을 가지고 헌금을 해서 얻은 축복이 하나님께서 받은 진짜 축복일까? 아니면 우주의 법칙에 의해 기대의 법칙으로 얻어낸 부 일까?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축복은 평화와 같이 주어진다. 만일 그 분에게 주어진 물질이 평안과 함께 왔다면 그분에게 온 돈은 하나님의 축복이 맞다.
그러나 만일 그 분이 많은 물질을 받았는데도 근심이나 염려 아니면 생활이나 가정에서 불화나 분쟁이 일어났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절대 평화 없는 축복이 없기 때문이다. 복권에 당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해 졌던 것과 같다.
우리는 기대의 법칙을 통해 많은 것을 끌어낼 수 있다. 우주에 있는 기대의 법칙은 신비하리만큼 무한한 것을 인간에게 제공한다.
기대치가 강하면 강한 만큼 더 빨리 이루어진다. 주술이나 마술이 바로 여기에 뿌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의 묘약 같은 주술도 나왔다. 그러나 그렇게 얻는 무언가엔 반드시 댓가가 따른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남의 자유와 남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부속물이 아니다. 하나의 독립된 개체다. 그래서 그들의 운명에 끼어들어서는 안 될 한계와 범위를 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상을 파고 들어가면 둘 다 불행해 진다.
자기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부적을 붙이고, 굿을 하고, 기도를 하고, 이는 결코 행복한 결과가 도래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독자적 관계속에 있게 된다. 각자에게는, 남이 모르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존재의 삶의 코오스에 내가 개입해서 내가 생각하는 선을 위해 아니면 성공을 위해 이렇게 하게 만들고 저렇게 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영역과 다른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절대적 자유를 감히 내가 침탈 하는게 되어 여러가지 부작용의 댓가를 내가 감수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오직 빛으로 존재하며, 씨를 뿌리고, 도움을 청했을 때 도움을 주되, 하나님의 영역과 타인의 자유를 침해 하지 않는 것, 그것이 평생 훈련 해야 하는 예술에 속하는 사랑의 기술이다.
이렇게 인간을 대할 때, 우리는 가족을 포함, 모든 존재를 하나님의 고귀한 창조물로 보며, 나 자신의 생각과 스탠다드에 의해 남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된다. 또한 어떤 목사님이 오래전,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완성된 아름다운 모습을 향해 “공사중” (“Under Construction”) 으로 기대 할 때, 분노나 판단, 비난 대신 평화의 관계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나는 어떤 분이 전화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은 어떤 분에게 사기를 당한 상태였다. 그 분이 전화로 자신을 사기 친 분을 지칭하여 “아유, 그 사기꾼, 다 그렇지 뭐.”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사장님, 사장님이 그 사람을 사기꾼으로 만드시네요.”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기꾼이 자기 가족에게는 사기를 치지 않은 이유는 자기 가족은 그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도가 자기 가족에게 강도질을 하지 않은 것은 강도의 가족은 그를 강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대의 법칙을 사용하여 우리는 누구를 강도도 만들 수 있고 의인도 만들 수 있다.
내게 있어서 상대의 자리는 내가 만드는 것이다. 내가 그를 나쁜 자리에 앉혀 놓으면 그는 나쁜 사람으로 행동할 것이고 내가 그를 좋은 자리에 앉혀 놓으면 적어도 내게는 그는 좋은 사람으로 행동할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 믿음과 기대의 법칙을 이용한 창조다.
한 무명 화가가 보편적 믿음의 법칙과 기대의 법칙을 이용하여 죽어가던 사람을 살린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기대로 이웃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술수나 방법으로 남의 운명, 혹은 남의 선택의 자유와 권리를 건들거나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면 불행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이 법칙을 이용할 때는 그 목적이 선하고 의로워야 한다. 용서와 사랑과 평화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능력이 바로 그 목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56
감사의 법칙.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 전 5: 17
인간에게 몸 (Body) 만이 아니라, 영, 혹은 마음 (Spirit, or Heart, or Mind)의 보이지 않는 영역이 있다. 몸을 건강하게 하려고 여러가지 일을 해서 얼마간 건강할 것 같아도 마음, 정신, 영이 괴롭고 걱정에 짓눌려 있고 우울하면, 궁극적으로 몸의 건강도 잃게 되고 삶에 평화와 행복은 없다.
몸과 영혼 (혹은 정신, 마음) 모두에게 가장 훌륭한 에너지 공급원,
그것이 감사다.
범사에 감사하라. 어떤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읽었다. “믿음은 감사에서 태어난다. 감사하는 마음은 계속해서 좋은 것을 바라며, 그리고 그 바램은 믿음이 된다. 누군가의 마음에 있는 감사의 반응은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모든 감사의 물결은 믿음을 증가시킨다. 감사의 느낌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는 믿음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예수님이 취한 감사의 태도를 주목해보자. 어떻게 그는 항상 “나는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내 말을 듣는 것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좋은 일이 올 때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항상 감사함으로써, 우리는 더 좋은 것들을 더 많이 받게 되고, 그리고 우리가 감사할 일들이 더 많이. 더 빠르게 찾아올 것이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감사의 정신적 태도가 우리 마음을 축복이 오는 근원과 더 가깝게 접촉하게 하기 때문이다. 바른 삶을 주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든 다른 길에서 감사 부족으로 빈곤에 처해 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한 가지 선물을 받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분과의 연결된 고리를 잘라버린다.
그러나 감사는 억지로 할 수가 없다.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감사를 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 쉽게 몇 가지만 찾아보자
첫째 우리는 진실로 우리의 구원에 감사할 수 있다. 이는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만일 우리가 믿는다면, 영생을 믿는다면 감사를 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매일 매일 감사 속에서 살지 아니할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다면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아주 단순하다. 내가 구원받은 것을 믿고 알고 감사하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똑 같다. 아이도 어른도 집사도 권사도…
둘째는 성령이다. 주님은 하나님께 부탁하여 성령을 보내 주셨다. 우리가 만일 성령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우리의 삶을 지도하시고 가르치시고 인도 하신다. 이 세상에서 영생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우리가 육체의 정욕에 젖어 살던 구습으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 말려주시고, 충동질 해 주신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천상을 알게 하시고, 일깨워 주시고,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하신다. 우리 삶이 흠이 생기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신다. 사탄의 유혹과 올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고 총명을 주신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용서를 주시고, 사랑을 주신다. 천상의 은혜를 가져오시고 천상의 물자를 가져 오신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주의 창고를 활짝 열고, 우리에게 필요한 물자를 방출하게 하신다. 그런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셋째 우리의 현재다. 우리는 현재 영생의 삶을 살고 있다. 마음에 평안이 있고,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다. 전에는 우리 속에 분노가 있었고, 두려움이 있었고, 미움이 있었고, 원망이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런 것들을 다 버렸다. 그것을 버리니 얼마나 마음이 가볍고 평안한가!
분노는 활화산과 같다. 언제 터져서 우리 삶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지 모른다. 미움도 분노 못지않다. 시기도 분노 못지않다. 우리가 성령을 품음으로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전임을 인지 함으로서 우리 마음이 성화되어 분노나 미움이나 시기 같은 악들이 서식하지 못하게 한다.
감사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엄청난 기적을 일으킨다고 한다.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는데 그가 그것을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 다른 것을 줄 마음이 생길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하면서 살게 하고 싶어 매일 무엇인가 주고자 한다. 그러나 구하지 않아서 줄 수가 없고, 감사하지 않아서 줄 수가 없다. 작은 것에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큰 것에 감사 할 수 없고, 하나에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둘에도 감사할 수 없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찾으신다. 지금까지 준 것에 대하여, 그것을 아는 자를 찾으신다. 알아야 감사가 나온다. 줬는데도 받았으면서도 받은 줄도 모르는 이에게 더 줄 마음이 있겠는가?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받았나 생각해 보자. 내가 살아있는 것은 받은 것이 아닌가? 주의 은총이 아닌가? 내가 건강하고 내 가족이 건강 하는 것은 주의 은총이 아닌가? 내가 주의 전에 나와 하나님의 백성들과 더불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주의 은총이 아닌가? 감사할 조건은 바로 나다. 오늘의 나를 만들어 주신 그 은혜, 영적으로 육적으로 멋진 나, 그 나를 감사해 보았는가?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57
예수님이 당하신 3가지 시험 (1) 물질에 대한 시험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마 4장 1-4)
성경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 장면을 보여준다. 왜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셔야 했을까?
어떤 학자들은 아담이 뱀의 유혹에 넘어가 시험을 받았기 때문에 그 회복 차원에서 인류를 대신한 시험을 받으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광야에 들어가서 40일을 금식하고 배고픈 상태에서 시험을 받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첫째는 그가 처한 환경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한 빵으로, 둘째는 시편 91:12절 말씀으로, 그리고 셋째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천하만국의 화려한 영화로 시험을 당하신다.
예수님은 마음의 갈등 없이 이 시험을 물리친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인간의 삶의 가치 그리고 목적을 확실하게 정리하여 보여주신다. 예수님이 겪으신 시험에 대해 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떡 시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살리라”
본문은 우리는 한 육체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있음을 보여준다. (로마서) 영적인 자아와 육적인 자아다. 육적인 자아는 흙에서 왔고 영적인 자아는 천상에서 왔다. 육적인 자아는 흙에 속하여 있고 영적인 자아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둘 다 살아가려면 양식이 있어야 한다. 육적인 자아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음식은 육체의 신체작용에 의해, 영적인 자아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음식은 영적인 본능에 의해 음식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전달해 온다. 둘 다 배고픔이다.
육체의 자아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음식은 빵이다. 빵은 인간의 수고로 만들어 진다. 그리고 배고픔을 통해 몸속으로 섭취한다. 영적인 자아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음식은 하나님 말씀이다. 역시 배고픔을 통해 우리의 영이 흡수를 한다.
시험하는 자로 다가온 사탄은 40일 금식으로 허기져 있는 주님께 다가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여 먹으라.”고 말한다.
배가 고픈 상태라면 당연히 빵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 배가 차고 기운이 돋아나서 활동을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사탄의 말은 크게 잘못되어 보이지 않는다. 더더구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사탄도 그 점을 강조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달랐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니라.” 이것으로서 주님은 인간에게 필요한 두 가지의 영식을 말씀하신다.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이다. 여기서 사탄은 한 가지 양식만 얘기했다.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첫째는 사람은 영과 육이 둘 다 양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영의 양식이 육의 양식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육체의 양식에만 관심을 가지면 영의 양식에 대한 공급은 끊기고 만다. 그러므로 영의 양식을 육의 양식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준 교훈이다. 또한 우리는 영의 굶주림이 보내는 신호에 민감해야 한다.
영이 우리에게 배고픔을 호소해도 우리가 육의 양식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영의 신호를 감지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영의 양식을 섭취하는 것은 습관이 되어야 하고 생활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우리 영이 강건하게 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육의 양식을 만들 수 있으나 육의 양식은 영의 양식을 만들 수 없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금식기도 중인 어떤 권사님에게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겨 기도원에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너무나 배가 고팠는데 작정한 날짜를 채우고 싶었다. 그래서 기도했다. 비몽사몽간에 어떤 사람이 꿀떡 하나를 주어서 먹었다. 그 후 이 권사님에게서 허기가 사라졌다. 일을 마치고 기도원으로 돌아가 작정한 날짜를 잘 마쳤다. 이런 일은 너무나 많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자기를 깨닫는 것이요, 이것을 깨닫는 것은 우주를 깨닫는 것이다. “너희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신비한 법칙 그러나 완벽한 신뢰와 경외를 필요로 하는 복지이다. (마15:35-39) 하나님과 같이 있을 때는 절대 의식주는 인간의 걱정사항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에서 보여주셨다.
5천명, 4천명이 넘는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이들을 먹이신 것은 예수님이셨다. 혹독한 가뭄으로 먹을 것이 말라갈 때 사르밧 과부를 통해 엘리야를 먹어 살리셨던 분은 하나님이셨다. 때로는 까마귀를 통해 떡과 생선을 날라다 줬던 분도 하나님이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육체를 위한 빵은 먹고 먹어도 다시, 다시 먹어야 한다. 다시 배가 고파진다.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40일의 금식이 선택의 저울추를 흔들려 했다. 물질에 대한 시험은 이렇듯 필요로부터 시작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으로 …”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뜻이리라.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의식주는 하나님께서 담당하실 몫이라는 법칙을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58
예수님께서 당하신 3가지 시험 (2) :성경으로 설치한 사탄의 덫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성전 꼭대기서) 뛰어내리라….. ”
사탄은 항상 성경으로 함정을 하고 성경으로 덫을 놓는다. 예수님께 설치한 덫도 시편 91편이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 그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예수님도 대답하기 곤란했는지 모른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로 교육하고 하기 위해 쓰여 졌다. 그래서 성경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기도 한다. 특히 구약은 신약의 지원서일 분이다. 모든 예언은 세례요한까지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을 성경에 포함시킨 것은 주님이 구약에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출생과 삶과 고난과 죽음이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모세가 지팡이로 손을 올려 바다를 쪼갰다. 그것이 부러웠는지 모세처럼 지팡이를 들고 기도하는 사람 사진을 본적이 있다. 그러나 무엇이 갈라졌는지, 무엇이 이루어 졌는지는 모른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고 그리고 예수님이 “너희는 나 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 했다고 공동묘지에 가서 죽은 자를 향해 일어나라고 하면 죽은 자가 일어날까?
모든 성경 해석은 의와 영생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한 다른 성경 말씀으로 사탄의 궤변을 물리쳤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에 해당하는 걸까? 오늘날 너무나 많은 분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믿음의 행위를 혼돈 하고 있다. 사탄이 판 함정은 우주의 모든 법칙을 무시하라는 것이었다. 사탄의 말은 그럴 듯 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다.
그러나 그 행위의 핵심은 탐욕과의 입맞춤이었다. 주님은 단번에 그것을 파악했다. 왜냐하면 탐욕은 필요이상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예수님께 필요 이상을 구하라고 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누구건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 뛰어 내려야 할 이유는 없다.
성경은 Occult를 일으키는 주문이 아니다. 흑 마술(Black Magic)을 일으키는 주문도 아니다. 사탄은 필요하지 않는 것을 행하라 한 것이다. 필요하지 않는 일에 믿음을 사용하라고 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사탄이 설치한 함정을 파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시편에 지칭된 그가 자기 의지가 아닌 다른 의지(악)에 의해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그 천사들을 보내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다윗이 그런 체험 속에서 살았고 실제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은 그를 구해 주셨고 그의 세 친구들이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옷가지에 그으름도 나지 않게 구해 주셨다. 이 말씀은 아무 때나 우리가 “믿습니다.” 하고 동물원 사자우리에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다. 아무 때나 “믿습니다.” 하면서 물위로 걸어가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어 있다. 성령의 역사로 쓰여 졌다. 그래서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 그러나 목적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로 교육하게 하는 교육의 도구다.
“성경에 써져있는 대로 내가 산꼭대기에서 뛰어내리니 천사들을 보내 나를 보호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거짓말이 되잖아요.” “믿는 자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하셨으니 나를 대통령 만들어 주세요. 나를 ……대 재벌을 만들어 주세요.” “나를 30년 젊게 해 주세요” 하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이지만 성경도 계절이 있다. 때에 따라 움직이고 성취된다. 그리고 그 계절을 인간은 모른다.
실제 제자들이 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옥에서 구출하여 복음을 전하게 한 장면이 사도행전에 나온다. 베드로가 옥에 갇혀 죽게 되었을 때 밤에 천사가 내려와 그의 몸에서 쇠사슬을 풀고 옥문과 성문을 열고 구하시는 장면도 나온다. 기도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를 보호할 필요가 있어서 그의 천사를 보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신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이런 초자연적인 보호하심이 너무 너무 많았었다. 비록 사람이 만든 바구니긴 했으나 바울도 바구니를 타고 성 밖으로 빠져 나왔다. 물론 자연적인 역사로 구출된 적도 이다. 초대교회 순교 사에는 더한 기적도 들어 있다. 성령의 역사는 없는 것 같으면서 있고, 있는 것 같으면서 없을 수 있다. 사람을 사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성경에는 성령을 받으면 독사를 잡아도 독사가 해를 가하지 못할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독사를 잡아들고 집회를 하다가 독사에 물려죽은 이도 있다. 독을 마셔도 해를 당치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믿고 농약을 들이 마시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성도의 삶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은 법이다. 필요 이상을 구하는 것은 탐욕이다. 탐욕은 죄다.
성경에 병든 자들은 교회 장로들을 초대하여 기도하면 치유된다고 해서 병원 대신 안수기도를 받다가 죽은 이들이 부지기수다. 십일조를 내면 창고에 쌓아둘 곳이 없이 채워주신다는 말을 믿고 십일조, 십이조, 십 삼조 그 이상을 했다가 완전히 망해버린 사람도 많다.
사탄은 성경을 이용하여 덫을 설치한다. 성령을 이용하고 믿음을 이용 한다. 주님의 말씀을 도구로 사용한다. 그러나 탐욕이 없으면 쉽게 물리칠 수 있다. 영적인 은사가 됐건 육적인 성취가 됐건 필요 이상을 탐하지 말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성령을 시험치 말자.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59
예수님께서 당하신 3가지 시험 (3): 천하만국 영화시험
“나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은 …. 여호와 하나님만 경배하라”
여기서 먼저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 하나는 사탄이 세상 영화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이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다. 물로 그가 세상의 모든 영화를 독점 했다는 말은 아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탄은 영화는 줄 수 있지만 평화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탄이 주는 영화는 어떤 것일까? 사탄이 주는 영화는 평화가 없는 영화다. 불행이 섞여져 있는 영화다.
아무리 세상 영화가 좋다고 해도 평화가 없는 영화는 불행한 영화다. 세상에는 잠깐 불행한 영화를 살다가 사라진 이들이 많다. 성경은 세상 영화를 이세벨 즉, 음녀로 비유하고 있다. 계시록18장 2-3절은 더 처참한 바벨론으로 비유했다. 음녀와 음행한자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했다. 사탄은 예수님 앞에서 바로 그것을 노출 시킨다.
불행한 영화를 얻어서 어디에 쓸 것인가? 평안하지 않은 영화는 얻어서 어디에 쓸 것인가? 행복하지 않은 재물, 행복하지 않은 세상 권력, 사탄이 주는 모든 것들에는 불행이 좌정하고 있다. 그래서 사탄이 주는 천하만국의 영화는 허상이고 불행이다.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전도서 12:12절 답이 있다. 인생의 본분을 잃어버린 생은 헛되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된 것뿐이다. 허무뿐이다. 인간의 모든 허무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우물가의 여인처럼)
그러나 하나님은 불행이 없다. 하나님은 경쟁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영화는 처음부터 행복이고 끝까지 행복이다. 하나님이 주신 영화는 처음부터 평화고 끝까지 평화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 갈수록 평화를 느낄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하나님이 주신 것은 좋은 것이다.
빛에는 어두움이 없다. 그림자도 없다. 하늘이 주는 영화는 그것이 작게 보여도 큰 것이요, 크게 보여도 큰 것이다. 하늘이 주는 영화는 항상 평화가 있고 사랑이 있다. 아무리 하찮 하게 보이는 것에도 평안이 있다. 그리고 수명이 길고 영원하다. 밝은 빛이 비추인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기 것이 없었으면서 행여 무엇을 잃을까봐 빛이 되라는 말에 마음을 주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자. 우리가 빈곤함으로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 세상의 모델이 될 수 있겠는가?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높이겠고 내가 너를 창대케 하리라”
자연계에도 계절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계절이 있다. 예수님이 시험 받으실 때, 예수님의 계절은 꽃피는 봄과 같았다.
인생의 연대기에서 가장 화려한 계절은 30대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30세부터 시작한다. 그 전 생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30세 전의 생이 없는 것도 아니며 그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기록이 있든, 없든, 예수님의 모든 삶은 순결하고 청결했다.
성경밖의 전승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 전 모든 학문을 통달하였고 모든 인간으로서의 욕구나 욕망을 극복하신 것으로 나와 있다. 그는 이미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만나야 할 7가지의 시험을 모두 통과 하셨다. 그 중에는 명예나 영화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건 아니건, 예수님이 공생활에서 보여준 그 청결한 삶의 모습과 배치되는 기록은 없다.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은 30세,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기다. 사탄은 예수님이 가장 혈기 있고 열정적이고 왕성할 시기에 세상 향락을 내민 것이다. 한번 쯤 갈등해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는 말로 간단하게 사탄을 물리 치셨다.
사람마다 본능적으로 취약한 시기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개인의 계절에 따라 강했다 약했다 를 반복한다.
10대, 20대는 정욕, 30대, 40대는 향락, 50대 60대는 명예, 권력 이렇게 변하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해 가다가 완전 노인이 되면 완전 자유를 얻게 된다. 비로소 본능으로부터 해방이 되어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시험은 있다. 사탄은 순간마다 덫을 설치한다. 인생의 계절을 이용한다. 가장 약한 본능을 이용한다. 그러나 사탄이 주는 영화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그의 유혹을 탐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 인생길 앞에 설치된 사탄의 함정으로 단정하고 피해 갈 수 있을까?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을 그냥 선물로 주시지만 사탄은 그 어떤 것도 그냥 주지 않는다. 요구하는 것이 있다. 영혼이다. 그리고 양심을 요구한다. 먼저 악을 행하게 한다. 일단 하나님과 멀리 떨쳐놔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멀리 떨어질 수 있는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다.
사탄과의 거래 없이 무엇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인생의 독이 든 독배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세상 향락은 사탄이 준 것이다. 뿌리가 사탄이다. 사탄이 주는 것은 사탄의 냄새가 나고 사탄의 모습이 보인다. 그 화려한 천화만국의 영광에 경쟁의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미움이 있고 시기가 들어 있고 분노와 다툼이 들어 있을 것이다. 안식이 없는 재물은 축복이 아니며 평화 없는 성취는 성취가 아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여호와 우리 하나님만 섬기리라-”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60
좁은 길과 넓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은 넓고 …”
구원은 그가 처한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현상이다. 우리 영혼이 정신과 마음과 함께 새로 태어나는 현상이다. 그 순간 물질적인 우리 육체에 어떤 변화나 징조 그리고 어떤 기이란 반응이 나타날 수도 있다. 물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여자들이 해산을 할 때 모두 다 해산의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니다. 가금씩은 해산의 고통 없이 아이를 낳기도 한다. 무용을 전공한 내 친구 아내가 그랬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증거로 어떤 현상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고 잘못 된 것이다. 그 어떤 현상이라 할지라도 열매가 없으면 성령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과 더불어 나타나는 공통적인 열매는 기쁨이다. 기쁘다. 보통 사람들이 기뻐 할 때는 이유가 있다. 돈을 줍는다든지, 진주성찬 앞에 앉는다든지, 좋은 인연을 만난다든지 등등 그러나 성령으로 태어난 기쁨은 물질적인 어떤 변화 없이도 일어난다.
찬송을 부르고 싶은 것은 성령 받은 증거다. 성경을 읽고 싶은 것은 성령 받은 증거다. 교회를 가고 싶은 것은 성령 받은 증거다. 누구에게 무엇을 주고 싶은 것은 성령 받은 증거다. 미운 사람이 좋아 보이는 것은 성령 받은 증거다. 어떤 식으로든 주님이 생각난다는 것은 성령 받은 증거다. 기도하고 싶은 것은 성령 받은 증거다. 그리고 성령이 안에 계시다는 증거다. 성령 받은 증거는 구원의 증거다. 성령은 영생에 대한 담보로 주신 것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은 구원에 대한 또 다른 메시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좁은 길이다.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은 길, 그 길을 걸으면 멸망으로 가지 않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영생의 길이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멸망의 길이라는 것과 약간 상충적이다. 아무리 힘든 고행의 길을 간다 할지라도 예수 없는 길은 영생의 길이 아니다. 공자의 ‘인륜지덕’의 길을 걷는다 해도 예수 없는 길은 영생의 길이 아니다. 예수께서 알려준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도 가본 사람이 안다는 말이 있다. 예수님은 천상에서 오셨다. 그 분이 그곳에서 왔기 때문에 그 길을 안다. 그분이 그 곳에서 왔기 때문에 그곳에 가는 길 또한 그 분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오직 그 분만이 천상에서 오신 분이다. 오직 그 분만이 천상의 길을 알고 천상의 법칙을 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의 나라에 이를 자가 없으리라.”
이 지구상에는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많은 분들이 있었다. 많은 성인들이 영생을 깨달기도 했다. 심지어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선생까지도 영생을 깨달은 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인간이 마음을 맑게 함으로 신과의 합일, 우주와의 합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기독교는 영생의 종교다. 모든 인간의 삶은 영생과 관련이 있다. 기독교는 인간이 예수를 깨닫고 믿는 순간 천상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그의 안내로 영생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고 믿는다.
그 여정에 장애물이 많기 때문에 보혜사(Counselor) 성령의 도움을 받아 성령과 함께 한다고 믿는다. 그것을 영적인 순례라고 말한다. (존 번연의 천로 역정 참조) 장애물이란 항상 자기 마음속, 육체의 탐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마음에서 탐욕을 제거하면 점점 성화되고 영적인 능력이 강해져서 어떤 유혹이나 장애물로부터 자유로운 경지에 이른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사실 믿음으로 가는 길에는, 그리고 믿음으로 이루어진 삶에는 좁은 길, 넓은 길이 없다. 성령의 손을 잡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과 함께 가는 길엔 실패가 없고, 두려움이 없고, 빈곤이 없고, 용서와 평화와 사랑만 있게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쉽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길이 좁은 길이다. 사탄은 그 길을 보지 못하도록, 그 길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도록, 그 길을 찾는 것조차 꿈꾸지 못하도록, 그 길에 안개 같은 세속적 영화를 뿌려놓고, 그 길을 우스쾅스러운 가시밭처럼 보이게 하여 아예 그 길에는 관심도 갖지 못하게 하고 있다. 길옆에 넓고 화려하게 보이는 다른 길을 만들어 놓고, 달콤해 보이는 향락과, 화려해 보이는 공명의 꽃잎들로 단장해 사람들의 시선을 도둑질 하고 있다. 그 넓은 길에만 관심을 갖도록 현혹하고 있다. 그 길바닥에는 깔려있는 두려움과 수치와 숨 가쁜 경쟁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를 붉은 융단을 덮어서 가려버렸다. 그 길에서 날마다 울려 퍼지는 인간의 비명소리는 향락의 소리와 섞이게 해 고통의 정체성을 희석시켜 버렸다.
사탄은 허무한 세속의 영화를 가지고 인간의 눈도 멀게 하고, 귀도 멀게 하고,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는 것도 없는 것처럼 재주를 부릴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허상이고, 결과도 허상이다. 사탄은 허상을 빗어 꿈을 만들고, 영화를 만들고, 권력을 만들고, 부를 만들고, 성공을 만든다. 그러나 허상은 허상일 뿐이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이미 만들어진 길이 없는 것이 될 수 없다. 이미 만들어진 길이 어둠에 묻혀버렸다고 없는 것이 될 수는 없다. 마음에 빛이 들면 안개는 걷히고, 동이 트면 어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길은 훤히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길을 찾아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천로역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