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복음 (9) 산상 수훈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42

8복음 (1) 심령이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은 모든 율법의 집합이요, 신구약 성경의 뼈대요, 주님의 정신이요, 우주의 원리요, 천상의 법칙이요, 천상의 복음이다. 땅에 있건, 땅 아래에 있건, 땅 위에 있건,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가르침이자, 천상의 사람이 되는 비결이요, 방법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인간이 되는 길이 있고, 인간이 우주와 하나 되는 길이 있고,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인간이 수많은 세기동안 찾아 헤매던 모든 원리들이 다 들어있다. 행복의 원리, 평화의 원리, 성공의 원리, 부의 원리, 그리고 잃어버린 낙원을 찾을 수 있는 방법까지 없는 것이 없다. 진리의 보고다.

특히 팔 복음은 인간이 천상의 사람이 되기 위해 알아야 할 집합된 엑기스고, 비결이고, 양식이다. 천상의 사람이 되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려주는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여정의 지도이다 . 천상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취득하는 방법이다. 천상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알아야 할 상식이고 지식이다. 예수님이 주신 법칙은 이 세상의 법칙과는 전혀 다른 법칙이다. 그러나 이 법칙의 의미와 가치와 결과를 깨달아, 묻혀있는 보물을 찾은 사람 같은 기쁨으로 그 목적지로 가겠다고 선택하여 걸어 갈 때, 천상의 사람이 되어 갈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어디에 있건, 하늘 나라의 백성, 즉, 기쁨과 평화, 사랑과 풍요로 가득찬 사람으로 살아 갈 수가 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로 시작한 산상수훈 가난이 복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처음 전하여 준 진리다. 모든 영과 육체는 더 많이 갖기 위하여, 더 부요하기 위하여 애를 쓴다. 그러나 주님은 그 반대를 가르친다. 가난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poor yet, possessing everything” 이라고 고백한 바울의 말이 생각되는 말이다. ‘없는 것이 있는 것 보다 낳다.’

일반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빈곤을 의미하다. 그리고 빈곤은 탐욕을 낳고 탐욕은 경쟁을 낳고, 경쟁은 불안은 낳고, 불안은 초조를 낳고, 초조는 미움을 낳고, 미움은 시기를 낳고 — “욕심이 장성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 빈곤은 결국은 불행과 사망을 낳게 된다. 탐욕을 부르는 가난, 여러 가지 악을 불러들이는 빈곤의 법칙, 그러나 영의 세계에는 다른 법칙이 있었다. 그것을 예수님이 가르치고 있다.

‘심령’이란 ‘spirit of mind’, 마음의 영이다. 영이란 정신도 되고 마음도 된다. 우리 영이 빈 상태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에 탐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정신이 맑다는 것을 의미한다. 맑은 정신 – 때 묻지 않은 영- 잡동사니가 닥지닥지 붙어있지 않은 정신, 영, 마음, 이 상태가 ‘poor in spirit’ 이다. (마음의 청결과 구분)

인간 삶의 목적은 평화다. 주님은 인간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래서 주님은 평화의 왕이다. “평화, 평화로다”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주님은 평안을 주시기 위해 죽음을 없앴고, 죽음을 없애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용서를 했고 복수를 없앴다. 이 모두 우리 마음에 평화를 충만케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이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면 주님의 죽음은 헛것이 되며 주님의 사역은 실패한 것이 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능치 못 할 것이 없는 자아’ 임을 깨쳐주셨다. 모두 평안과 연결이 된다.

“Poor(pure) in Spirit” 반대는 Rich(greed) in spirit 이다. Poor in spirit은 탐욕이 없는 정신상태다. 순결한 정신(영) 상태,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상태, 미움에 물들지 않은 상태, 분노에 상하지 않은 상태, 청정한 정신 상태를 말한다. 아름다운 영, 가난한 정신 상태다. 정신이 겸손한 상태, 이것을 ‘영이 맑다’로 표현 할 수 있다.

Rich in spirit은 영이 탐욕으로 꽉 찬 상태다. 만일 영이 탐욕으로 꽉 찬 상태가 되면 어떻게 될까? 영적 탐심이란 육적 탐심보다 훨씬 더 추하다. 인간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바로 사탄의 종이 되어 버린다. 이는 영적 교만이다. 신령한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공간이 없는 상태다. 무엇인가 꽉 차 있는 상태, 부족이 없는 상태, 그래서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은 상태, 욕심이 꽉 찬 상태다.

하와는 감히 하나님과 동격을 이루려는 탐욕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정신을 품은 상태를 ‘심령이 탐욕스러운’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다. 탐욕스러운 정신, 탐욕스러운 영이다. 이는 영의 법칙이다. 사탄은 바로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다가 쫓겨 놨다. 그의 종들과 그의 종자들이 모두 심령의 탐욕 때문에 타락하여 불행을 겪게 되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탐욕은 사탄에게서 시작됐다. 모든 죄의 뿌리는 탐욕이고 모든 탐욕의 뿌리는 사탄이다.

심령이 탐욕스럽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 영이, 혹은, 우리 정신이, 우리 마음이 필요, 이상을 꿈꾼 다는 뜻이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을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과 같이 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필요한 것을 다 공급받을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고, 천상의 식구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우주의 모든 창조물들을 다스릴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고,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필요 이상을 품었다. 탐욕 때문이었다. Poor in spirit 이란 영적 탐욕이 없는 마음, 영적 온유를 의미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마음의 쉼을 얻으리라” (마 11장 29) 정신적 겸손, 영의 겸손, 마음과 영의 겸손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주님이 오시기 전 인간의 정신(영)을 채우고 있던 모든 것은 악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에 더러운 정신(sinful nature)이 들어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 정신이 맑고 깨끗하다는 말이다. 영이 맑으면 마음도 맑고 육도 맑다. 그런 마음은 천국이 임할 장소다. 심령이 비워있으면 바로 천국을 차지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건설될 수 있고, 주님의 거처가 건설 될 수가 있다는 말이다. 탐욕은 무리를 거느리고 다닌다. 음행, 우상숭배, 시기, 질투, 방탕, 향락, 술 취함, 거짓, 추한 농담 등등. 사람들은 꿈이 없고 욕망이 없으면 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은 욕망이 없으면 망한다는 논리와 반대되는 논리다. 천국이 임하면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물자들도 함께 임하게 된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보물을 다 갖게 된다는 암시다. 구하지 않고 노다지를 얻는다는 뜻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43

8복음 (2) 애통하는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인간은 더불어서 사는 존재다. 내가 있으면 나 아닌 네가 있고, 네가 있으면 너 아닌 누군가가 있다. 엄마, 아빠, 아들, 딸, 친척, 친구, 모두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 곁에 있으면서 우리와 같이 삶을 가꿔간다. 함께 웃고, 함께 울고, 위로하고, 위로 받으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무도 누구를 대신해 줄 수 없다. 대신 아파줄 수 없고, 대신 죽어 줄 수 없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높은 자도, 낮은 자도, 모두 자기 생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인생의 실상이다.  위로가 없다. 인생이 혼자라는 데에는 위로 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땅에는 인생의 고독은 달랠 위로가 없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위로 하고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사람이 위로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다. 거의다가 육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한 시점을 보내는데 도움을 될지는 모르나 영혼까지는 파고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더더욱 우리의 깊고 깊은 내면의 영이 위로를 필요로 할 때 어디서 위로를 구한단 말인가? 누구에게 위로를 받는단 말인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참으로 따뜻한 말이다.

본문에 나타난 애통함이란 누군가를 잃었을 때 내는 슬픔이다. 이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망자를 놓고 내는 슬픔이다. 아무도 위로해 줄 수 없는 내면의 슬픔을 의미한다. 어떤 위로자도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슬픔이다. 심장의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슬픔이다. 이는 너무나 슬픈 일을 당할 때 내는 영의 통곡이다.-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를 받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위로를 받느냐다.

유대에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장례제도가 있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루살렘에서까지 몰려가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하며 함께 울어줬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동생을 잃은 마리아의 슬픔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슬픔과 위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아주 필요한 부분이다. 만일 사람이 슬픔을 당해도 위로 자가 없다고 행각해 보자. 얼마나 쓸쓸하고 초라하겠는지. 그러나 참 위로가 되는 위로는 존재하는 것일까?

슬픔에도 종류가 있다. 울음에도 종류가 있다. 구슬픈 울음, 흐느끼는 울음, 통곡, 등 그 슬픔의 원천에 따라 울음의 강도도 달라진다.

욥기를 읽어보면 욥이 부와 재산과 건강을 잃고 허우적거릴 때 그의 세 친구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욥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 그들도 욥처럼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재에 앉아 슬퍼함으로서 욥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위로는 욥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욥은 계속 애통해 했다.  까닭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허물어져 버린 욥의 삶, 그는 너무나 원통해 했다. 기도를 했으나 하나님마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 그에게 그 무엇이 위로가 될 수 있었겠는가?

대체로 사람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귀한 물품을 잃었을 때,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넘어지거나 맞아서 다쳤을 때, 슬퍼하고 운다. 그리고 너무 좋은 일을 당했을 때도 운다. 그때 흘리는 눈물을 기쁨의 눈물이라고 한다.

본문에 나오는 애통함이란 원통함에 쌓인 울음이다. 욥의 원통함이다. 눈물마저 송진처럼 굳어버린 애통함이다. 이는 또한 사람에게 계절이 있다는 의미이기도하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누군가에게, 어디선가, 무엇인가,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너무 원통하여 내는 울음소리, 주님이 위로를 주시겠다는 뜻이다.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위로의 계절이 오고 있다는 뜻이다. 회복의 계절이 오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안에서는 슬픔의 계절이 있을지도 몰라도 진정한 슬픔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것을 자기의 죄악을 깨닫고 내는 울음소리라고 한다. 자기의 깊은 내면의 육적 자아의 운명을 깨닫고 슬퍼하는 자들을 말한다고 한다.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맞아도 되고, 맞지 않아도 된다. 일단 어떤 종류의 슬픔이든 주님이 위로자이다. 우리가 눈물을 흐릴 때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이 들으시고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이 들으시고 움직이신다. 때로는 위로자로, 어떤 때는 해결사로, 어떤 때는 동행자로 —

하나님은 술 취한 사람처럼 남모르게 흐느끼는 한나의 기도를 들었다. 자녀 없는 것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일이었으면 그처럼 처절하게 눈물을 흘릴 수 있었겠는가?

물론 요즈음은 눈물도 가짜들이 많다. 사탄도 가짜 눈물을 흘릴 수 있고, 그의 종들도, 가짜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깊고 깊은 슬픈 일을 당하여 울고 있을 때, 주님이 오셔서, 성령이 오셔서, 위로를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심령에서 터진 눈물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성령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 슬픔은 이런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다.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한 위로는 축복으로 완성된다.  울자. 우리는 울어서라도 슬플 때 슬퍼해서라도 주님의 위로를 끌어오자.

주님은 이런 애통하는 자들이 복있다 하셨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44

8복음 (3) 온유한 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세상은 언제나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고, 다스려지고, 운영되어 왔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이나 성공 사례가 많은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도 알려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이 성공의 법칙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그것은 성공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성공에는 많은 부작용이 있었다.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사람들이 성공 뒤에 얻게 되는 정신적 육체적 부작용들은 그들의 성공의 그늘에 가려져 있을 뿐 가벼이 관과 할 일이 아니다.

성경에 등장한 야곱의 성격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적극적으로 형의 장자 권을 갈취 한다. 팥죽을 끓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그리고 멀리 도망하여 삼촌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삼촌까지 속여 적극적으로 재산을 모은다. 그렇게 해서 그는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평생 평안한 생활을 해보지 못했다.

경쟁적인 세계에서는 당연히 뛰는 자가 걷는 자 보다 먼저 땅을 차지한다. 탐하는 자가 탐하지 않는 자 보다 먼저 성공을 쟁취한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세상의 이치고, 부나, 성공에 대한 공식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 공식과 반대로 가르치고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 영어로는 meekness 다.

이는 양보 잘 하고, 남이 더 원 할 때, 자기 밥을 안 찾아 먹고, 경쟁자가 치열하게 달려 들 때, 경쟁하지 않고, 욕심이 없고, 매사가 흘러가는 데로 놔두고, 어떤 특정 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악착같이 달려가지 않고,  너무 순진해서 상대가 속았을 때 분노하지 않고, 속은 것을 품지 않고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 마음에 억울함을 담을 수 없는 사람, 자기를 홍보할 줄 모르는 사람,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져도 달려갈 줄 모르는 사람, 자기 것을 남한테 뺏기고 억울해 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 어디를 보나 남 보다 잘 될 수 없는 성품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부를 의미한다. 축복을 의미한다. 성공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의 일반 법칙 아래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주님이 이런 사람이 이승에서 땅을 얻는다고 했다. 성공을 성취한다고 했다. 주님은 세상의 법칙과는 완전히 반대의 법칙을 말씀 하신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법칙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법칙이다. 영의 법칙이다. 이 세상의 원칙이 아니라 영의 원칙이다. 주님이 바로 그 영의 법칙을 소개 한 것이다.

왜?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곧 천상의 법칙이 실증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천상의 법을 요약하여 몇 가지 알려준다.

성경은 욥을 온유하다고 했다. 용기31장을 보면 그의 성품이 나타난다.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뿜어내었던가. —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였고—”(욥31장 29절)

세상의 법칙은 경쟁의 법칙이다. 그 법칙은 cause and effect 에 의한 댓가가 따른다. 이 법칙은 인간 타락의 산물로 인간의 삶에 침투해 와서 지금까지 인간 사회를 지배해 왔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운다. 모든 영역에서 투쟁한다. 인간의 양심도 그렇게 고정 되어 있다. 밀림의 법칙처럼 양육강식이 윤리고 도덕이다.

그러나 천국의 법칙은 다르다. 천상에서는 경쟁적 방법이 아니라 온유한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 이 땅에 천국이 임하면 온유의 법칙이 실증법이 된다. 그리하여 Cause and Effect로부터 자유한 재물을 얻게 한다.

온유한 자가 성공하고, 온유한 자가 축복 받고, 온유한 자가 부를 얻어 거부가 된다. 거기에는 cause and effect가 따라 붙지 못한다. 천국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사용되는 법칙은 은혜의 법칙이다. 사랑의 법칙이다. 은혜의 법칙에서 보면 세상의 법칙은 악이고, 죄다.

그동안 세상에서 사용되었던 방법은 악이다. 그 옛 구습을 벗어버려야 한다. 새 법에 적응하여야 한다.

은혜의 법칙 아래서는 정 반대의 법칙이 작동한다. 주님은 그 법칙을 소개한다. 마음이 온순하여, 독하지 못하여, 모질지 못하여, 싸움을 포기하고, 양보한 자들에게 얻기 위해 싸우는 결과물을 주겠다는 말씀이다.

“겉옷을 가지고자 하면 속옷까지 내어주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고” 이렇게 하늘의 법칙과 땅의 법칙은 다르다. 그리고 하늘의 법칙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양보하고 포기한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을 어떻게 이성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주님의 때가 오면 주님의 나라가 임하면 성령의 시대가 오면 강한 자는 약하고 약한 자는 강하고 모퉁이의 버린 돌이 주축돌이 되고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는 새로운 천상의 법칙이 지배하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을 지배해온 생존의 법칙이 작용을 하지 않은 시대, 전쟁으로는 얻을 수 없고 투쟁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시대, 그 시대가 이사야서에 예언되어 있다. “사자가 어린 아이들과 뛰어 놀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고 ……. ” 온유함과 겸손과 양보와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평안이 온다는 것이다.

우주에는 계절이 있다. 경쟁적인 마음으로 살아야 할 계절이 있고 온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할 계절이 있다. 주님이 계신 세상에서는 온유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쉽게 거부가 된다는 가르침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45

8복음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일반적으로 ‘의’란 정의를 의미한다. ‘정의로운 일’ 어느 한 쪽에 편견이 없는 정당한 일, 옳은 일, 공평한 일,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일, 바로 그것을 의라고 말할 것이다. 그 반대는 불의, 편견,  한쪽에 치우친,  양심불량, 이런 뜻이 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옳다고 행한 행위가 내일은 옳지 않은 것으로 밝혀 질 수도 있고, 오늘 불의라고 하는 것이 내일은 정의 일 수도 있다. 오늘의 선행이 내일의 악행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악행이 내일의 선행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는 우리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다.

모두에게 자선은 선행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자선이 자칫 악이 될 수도 있다. 나태가 죄악이고 나태를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진행형이다. 인간 존재는 영어의 “Being”에서 암시 하듯, 계속 만들어져 가는 존재 이다. 그래서 길가에 있는 거지에게 돈을 준 것이 선행일 수도 있고, 악행일수도 있다.

사람마다 각각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자기가 살아야 할 삶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서 누구의 개입 없이 직접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 사이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것이 자기 분수를 지키는 길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겸손이다.

전에 길을 가다가 돈을 구걸하는 백인 청년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돈을 준 적이 있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그 청년이 마약을 하고 있는 것을 봤다. 이 청년에게 돈을 준 것이 악이었을까?, 선이었을까?  그런 측면에서 생각하면 . 정의를 정의한 정의가 잘못 되었다. 오늘의 정의가 내일은 불의가 되고, 나의 정의가 너에게는 불의가 되는 세상이다. 이것이 세상의 정의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의라고 해석했다.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는 정의다. 그의 말씀이 정의다. 그의 말씀이 기준이며, 삶의 척도다. 2천년 동안 변치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의 말씀은 어제도, 오늘도, 여기서도, 저기서도 불변하다. 여기서도 이웃 사랑은 정의고, 저기서도 정의다. 아프리카에서도 정의고 아마존 정글에서도 정의다.

의에 주린다는 뜻은 항상 불의가 아니라 집중하여 옳은 것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세속적인 탐욕을 위해 불의를 선택하지 않고, 양심에 걸리는 일을 하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고, 더러운 것을 탐하지 않고, 향락을 추구하지 않고, 방탕하지 않고, 항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주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뜻을 구하고 갈망하는 그런 자가 의를 구하는 자라고 했다. 밥도 배가 고파야 먹고 싶은 마음이 들고, 맛이 있다. 의도 행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야 기쁘게 행해진다. 모든 행동은 마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의를 행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충만할 때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의를 행하게 된다.

옛 속담에 삼일 굶으면 양반도 남의 담장을 뛰어 넘는다고 했다. 의를 행하고 싶어 남의 담장이라도 뛰어넘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의에 주린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의를 행할 수 있다. 항상 의를 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서다. 의는 행하고 싶어서 행해야 의다.

여기서 Hunger는, 주린다는 것은, 굶주린다는 뜻이다. 배가 많이 고프면 다른 잡생각이 사라진다. 오직 밥 생각만 하게 된다. 의를 행해야 하는데 그것을 행하지 못해 안달이 난 상태를 의미한다. 의를 행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만큼 간절해 진 상태를 뜻한다.

목이 마르다는 것은 무엇을 뜻 한가? 간절함이다. 사람은 물이 없이는 못 산다. 사막에서는 단 몇 시간도 못 버틴다.

의가 물이라면 의를 행함으로 영적 갈증을 해갈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의를 행하는 것이 영적 갈증을 해갈 하는 방법이고, 영적 배고픔을 없애는 길이라는 의미다.

믿는 자는 의를 행함으로 영적 생수와 양식을 제공 받는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음식을 추구해야 하고 영적 생수를 추구해야 한다.

어떻게? 의를 행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 그것이 성도가 사는 길이고 -그것이 성도가, 성도가 되는 방법이다.

여기서 의는 예수그리스도다. 우리의 양심에 그리스도를 채우고,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충만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꿈을 품고, 내가 서 있는 자리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깔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랑의 평면을 만들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용서의 평면을 만들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양심의 평면을 만드는 것이 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을 영원한 선행이고 주님이 기뻐하실 의고,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 밖에 있는 모든 것들은 불의다. 정의라고 하나 정의가 아니다. 자유라고 하나 자유가 아니다. 옳다고 하나 옳은 것이 아니다.

너의 정의와 나의 정의, 너의 의와 나의 의, 이 땅의 의와 저 땅의 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에 목말라 하고 배고파하는 자들에게 배부름이 온다는 것이다.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뜻이다. 생의 갈증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한다. 억울한 일을 당치 않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충족된다는 것이다. 평안이 온다는 것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46

8복음 (5) 긍휼이 여기는 자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인 자비는 주님의 복음 중에서 팔복에 들어있는 아주 중요한 도그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심는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 들어있는 교훈이기도 하다

자비란 무엇인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자비다. 자비가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자비는 사랑의 향기다. 향기는 항상 실체를 가지고 있다.

자비는 주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나의 한 끼니를 주는 것이고, 고통 받는 자들에게 나의 위로를 두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며 갈등하는 자들에게 옳은 정신을 떼어주는 것이고, 사랑의 복음, 용서의 복음,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의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이다.

전하되, 반드시 자기가 알고, 믿어서 경험으로 자기의 지식이 된 것을 나눠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 믿음은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비는 자비로운 마음이 없으면 자비로울 수가 없다. 자비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주님은 산상수훈을 내릴 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 숙고해야 한다.

Mercy!  자비로운 마음이란 내면의 깊은 겸손에서 산출 된다.

겸손이란 무엇일까? 흔히 사람들은 겸손이란 자기를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어떻게 자기를 낮출 수 있나 라는 질문이 생겨난다.  한번 올려 진 자아는 쉽게 낮춰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기를 낮춘다 해도 낮춰질 수 없는 것이 자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겸손에 대한 의미를 얻기 위해 먼저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예수님께서 당시 사회 분위기로 자타가 죄인이라고 하는 레위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세리나 창녀나 기타 천한 계급의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불렀고 그들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레위는 모두의 눈에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님을 그의 집에 초대하여 파티를 연다. 예수님은 그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기를 자처 하셨다. 이는 당시 사회 제도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커다란 충격이었다.

예수님은 정통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지자 그 이상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분이 죄인들과 함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도둑들과 창녀들과도 어울렸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한 사람 (거룩한) 이 저런 죄인들과 어울릴까? 라는 의구심을 가졌다. 높은 분이 낮은 사람과 어울리고 깨끗한 분이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실제 영혼의 세계는 계급이 없고, 등급도 없다. 주님은 그들의 영의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했다. 복잡한 설명을 피한 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여 답을 한 것이다.

겸손은 낮은 자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내려가지 않으면 상대가 다가올 수 없을 때 자기가 자진하여 상대한테 다가가는 것이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낮은 자에게 허리를 숙여 아니면 몸을 낮춰 그들과 교류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자리로 내려가서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의 수준으로 그들을 보고 만나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 준신 겸손에 대한 시현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겸손은, 이 세상의 잣대로의 높고 낮음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에서, 모든 존재가 똑같이 고귀한 하나님의 창조 작품을 알아보고 인정하게 되는 상태이다. 그러면 자연히, 외형적 겸손을 넘어 내적 겸손이 실현 되게 된다.

강도만난 사람을 도우려면 그가 쓰러져 있는 데로 내려가야 한다. 인간은 인간을 판단할 수 없다. 인간이 붙인 죄명, 죄인이 붙인 죄명은 죄명이 될 수 없다.

자비란 그 사람들의 자리를 이해하는 것이고 그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가 있는 낮은 자리로 우리의 형체를 입혀서 보내주신 것과 같다. 우리가 이러한 자비를 누구에게 베푼다면 우리 또한 그 자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있는 자리로 찾아오는 은총, 그곳이 어디가 됐던 그때가 언제가 됐든 언제든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은총 그 은총을 약속하신 것이다.

남을 긍휼이 여긴다는 것은 또한 달란트 비유하고도 연결시킬 수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작은 자비심을 사용하면 그 자비심은 점점 커지게 되고 나중에는 많은 사람에게 나눠줘도 부족하지 않은, 자비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긍휼은 사랑이다. 그러나 긍휼은 이해에서 나온다. 영어로 compassion 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음 깊이에서 나오는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 사람 입장으로 돌아가서 생각하는 마음이다. 남을 긍휼이 여기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긍휼이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Cause and Effect의 법칙이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다. 사방팔방에 긍휼의 씨를 뿌려놓으면 언젠가는 그 열매를 자신인 따 먹는다는 말씀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47

8복음 (6) 마음이 청결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누가복음을 보면 일평생을 성전에서 살면서 죽기 전에 눈으로 단 한번 만이라도 메시야를 보는 것을 소원으로 살던 시므온과 안나가 나온다. 두 분 다 이런 소망 속에서 노인이 되었다. 그들이 아기 예수를 안고 너무 좋아서 눈물을 펑펑 쏟는 장면은 너무 장엄하다. 이들은 요셉과 마리아 다음으로 아기 예수를 가슴에 품어본 사람들이 되었다. 인간의 형체를 입은 하나님을 안은 것이다. 다른 이들이 수많은 생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는 영광이다.

그들은 이 순간을 위하여 일생을 성전에서 보냈다. 기도생활을 했다. 영성 생활을 했다. 마음을 청결케 했다. 그들의 마음에는 육적인 탐욕이 없었다. 마음이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들이 진짜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진짜 가슴에 품어본 것이다. 인간으로서 이것은 너무나 큰 영광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 보다 귀하고 귀한 영광이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일평생을 투자해도 손해나지 않을 만큼 귀하고 소중한 일이다. 아무나 이룰 수도 없는 일이다. 성경은 그런 영광스런 일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 사람의 삶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마음이 생각을 내고, 생각이 행동을 낸다. 그리고 그 행동이 또 다른 생각을 내고, 그 생각이 또 다른 행동을 낸다. 그 행동이 다하면 마음은 또 다른 생각을 낸다. 그리고 그 생각은 또 행동을 낸다. 이런 식으로 마음은 생각을, 생각은 행동을 그리고 그 행동은 사람의 삶이 된다. 마음은 양심이다. 마음은 정신이 거하는 집이다. 마음은 영이 거하는 집이다. 마음은 사람의 모든 행동을 생산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우리 마음이 두 가지에 의해서 통제(control) 된다고 했다. 육체의 본성(sinful nature) 아니면 성령이다. 육체의 본성을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는 죄의 본성으로 정의했다.

음행;Sexual Immorality, 더러운 것;Impurity, 호색;Debauchery, 우상숭배;Idolatry, 그리고 술수;Witchcraft, 미움;Hatred, 분쟁;Discord, 시기;Jealousy, 원수 맺는 것;Fits of rage, 당 짖는 것;Selfish-Ambition (혹은 이기적인 야망), 분리;Dissensions, 이단;Factions, 그리고 투기;Envy, 술 취함;Drunkenness, 방탕;Orgies,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 The like 이다.

물론 여기서 파생되는 탐욕, 거짓 증거나 남을 헐뜯는 것, 교만도 있다. 거기다 골로새서 3장 5-9절 그리고 에베소서 5장 4-5절에 나오는 음란한 말, 어리석은 말, 추한 농담까지 마음을 control 한다. 말이 마음에서 나오지만 말에 의해 그 마음이 control 된다는 말이다.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 마음을 Control 하는 것과 같다. 거기다 고전 6장 9-11에도 나와 있다.

위의 것들이 마음을 통제할 때 어떻게 될까? 한길도 안 되는 마음속에 이렇듯 많은 악을 품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하지가 않다. 날마다, 순간마다, 이런 본성의 유혹에 시달린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육체가 이들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낄 때도 있다.

까닭 없이 미워하고, 까닭 없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난하고, 원망하고, 흉보고, 이간질 하고,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의 생존에서 피었다 지고 또 돋아나는 잡초들이다. 이런 행위들이 생에 깊이 물이 들어, 습관이 되고, 아예 생이 되어 버린 경우도 있다. 우리 마음에 이런 육적 탐욕들이 없는 상태를 청결이라고 말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 (Pure in heart) 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우리 마음이 죄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면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성령을 보고 예수님을 보고 천국을 본다고 한 것이다. 마음에 가득 찬 육체의 정욕을 비우면 천국을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새로운 왕국을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메시지다. 물론 이는 영의 눈이 열린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음은 영의 세계를 보는 눈이다. 에덴동산의 상태, 타락전의 상태로, 평안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성경은 수도 없이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회개하라”가 바로 마음을 청결케 하라는 뜻이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도, 마음을 청결케 하라고 했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도 마음을 청결케 하라고 했다. 그 만큼 마음 관리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마음이 청결해지면 자동적으로 영의 눈이 열려서,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맞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을 보고, 만나는 것이 만수무강에 도움이 된다면, 우리 생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고, 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 분을 봐야 하고 만나야 한다.

돈 버는 귀재로 알려진 워런 버핏이라는 사람은 경매를 하여 돈을 제일 많이 낸 사람에게 식사할 기회를 준다. 금년에는 4백만 불을 받고 어느 중국 젊은 사업가와 식사를 했다 (나중에 결렬되었지만). 그러면 그 사람과 식사를 한번 하기 위해 돈을 많이 낸 사람은 그 대가로 무엇을 얻는 것일까? 뭔가 얻는 것이 있으니까 경매까지 거쳐 돈을 내고 그를 만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맞다. 돈 버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영의 눈을 뜨려면 “성령이여! 성령이여! 오셔서 영의 눈을 뜨게 하소서!” 하지 말고 먼저 마음을 청결케 해야 한다. 마음만 청결하면 영의 눈은 뜨게 되어 있다. 마음만 청결하면 우리 속에 이미 와 계시는 성령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다. 이것은 법칙이다. 불변의 법칙이다. 거룩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더러운 것을 버려야 한다. 신령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세속의 것을 버려야 한다.

젊은이에게는 음행을 탐하는 마음을 버리기가 어렵다. 중년에는 부를 탐하는 마음을 버리기가 어렵다. 노년에는 명예를 탐하는 마음을 버리기가 어렵다. 사업가에겐 거짓말을 버리기가 어렵다. 그리고 남을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습관을 버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더러운 마음을 버리고, 우상숭배 하는 마음을 버리고, 권력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당을 짓는 마음, 이단, 다툼, 시기, 질투, 술수, 방탕, 등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청결해 진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48

8복음 (7) 화평케 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사람들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화평을 지닌 사람들과 불화를 지닌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말로, 행동으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화평을 만들고 어떤 사람은 불화를 만든다. 어떤 사람은 만나면, 만나는 것만으로도 평안하고, 어떤 사람은 만나는 것만으로도 시끄럽고 불편하다. 불편하다는 것은 화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화평,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평안함을 뜻한다. 평안함이란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데 너무나 중요한 요소다.

주님은 우리를 화평케 하기 위해 오셨다. 주님은 먼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평케 하셨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해야 마음이 편하고, 마음이 편해야 다른 사람과 화평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화평하면 세상이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 그래서 주님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고 화평의 복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이 만들어 놓은 화평을 본의 아니게 파괴하는 경우가 있다. 불안으로, 분노로, 원망으로, 미움으로, 질투로, 탐욕으로, 자신 뿐 아니라 남의 평화를 깨뜨리는 경우가 있다. 그들을 trouble maker 라고 부른다. 반드시 cause and effect에 의한 댓가가 따른다.

불화나. 다툼이나, 미움이나, 탐욕이나, 분쟁이나, 시기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다. 가정에도, 직장에도, 그리고 교회에도 있다. 그리고 다툼을 만드는 사람 또한 어디나 있다. 미움을 만드는 사람도 어디나 있다. 분노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본문은 어디서나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가정이 됐든, 직장이 됐든, 모임이 됐든, 교회가 됐든, 어디서든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이 말은 분쟁을 보고 지나치지 말고, 다툼을 보고, 지나치지 말고, 미움을 보고 지나치지 말라는 의미다.

형제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곳에 찾아가 평화를 만들라는 뜻이다. 분쟁이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곳에 찾아가 평화를 만들라는 것이다. 주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만들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만들었듯이 우리도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주님께서 보여 주셨듯이 평화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고난과 죽음으로 평화를 만들었다. 평화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다. 우리는 남이 다투는 것을 보면 구경을 하면서 즐거움을 얻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동네 싸움이 나면 구경꾼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평화의 사람이 되려면 먼저 마음에 사심이 없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고 사랑하셨다. 마음에 평안이 없이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측은하게 생각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를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셨고 그 평안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평화란 자기의 유익을 포기할 때만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본성이 선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본성이 평화로워서 남의 말을 전할 때에도 상대가 그 말을 들었을 때 오해를 하거나 분노를 품을 만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조심한다. 설령 상대가 나쁜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선의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여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상대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오해를 하거나 분노를 품을 수 있게 말을 전한다. 살짝 왜곡하거나, 확대 해석하거나, 말의 의미를 통제하여 본성적으로 불화를 만드는 이도 있다.

야고보서 3장 6절에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구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사람들은 가끔씩 자기가 하고 있는 말을 모르고 할 때도 있다. 그만큼 말을 다룰 때 신경을 안 쓴다는 의미다. 그러나 말이란 엄청난 힘이 있다. 생명력이다. 내가 한 말도 그렇지만 남이 한 말을 전하는 것도 그렇다. 일단 내 입술을 빠져나가는 말은 비록 남의 말을 전한다 할지라도 나의 말이다. 그 말로 평화를 만들 수 있고, 불화를 만들 수 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못보고, 남이 칭찬받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남을 내리까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남의 말을 자기가 해석하는 것은 정말, 정말 위험한 일이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 교회가 아니었으면 한다.

세상 사람들이 막걸리 한 사발로 풀어버릴 일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풀지 못하고 마음에 담고 미움과 분노를 키운다. 결국은 폭발하여 교회에도 피해를 주고 자신도 피해를 입고 상대도 피해를 입게 한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신령한 성업이다. 성 프란시스코는 자신을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그것이 그 유명한 평화를 위한 기도다.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를” “미움이 잇는 곳에 사랑을” 모두 평화와 연결되는 기도다. 그러나 평화는 아무나 만들 수 없다. 누구든지 평화를 심고, 평화를 가꾼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and do not be afraid”(요14장 27절)

상상으로도, 말로도 행동으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간이 아니라 화목, 평화, 화해를 심어야 한다. 습관적으로, 의식도 없이 남을 헐뜯으며, 욕하고, 이간질 하는 습성을 버려야 한다. 서로 이해시키고, 화해시키고, 평화를 만들면 하나님의 자녀의 속성을 행하게 된다.

신앙인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다.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조심히 선택하여야 한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49

8복음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은 대부분의 경우, 크게, 2가지 종류로 볼 수 있다.  내적 핍박과 외적 핍박이다. 초대 교회 때 외적 핍박이 있었다. 외적 핍박을 통해 내적 핍박을 일으키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다. 그러나 성령을 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영적 방어망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심한 외적 핍박을 가한다 해도 내적으로 고통을 겪지 않았다.

고통을 겪지 않으면 핍박은 핍박이 못된다. 그들은 장작불 더미 위에서도, 으르렁 거리는 사자의 울부짖음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배반하지 않았고, 미워하지 않았고,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안했고 주님을 곧 만날 것이라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핍박이란 밖을 거쳐 내적으로 흘러 들어가야만 마음이 흔들린다. 마음이 흔들려야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나오게 할 수 있다. 두려움, 미움, 이것이 있어야 배반이 태어난다. 배반은 두려움이나 미움이 없이는 태어나지 않는 악이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3번씩 배반했다. 그러나 후에는 죽음 앞에서 주님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워했다.

그래서 악한 영은 초대교회 성도들 마음에 핍박을 가하지 못했다. 마음이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핍박은 전체가 실패로 끝나버렸다.

현대는 내적 핍박의 시대다 우리는 내적 핍박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 교회의 성도는 외적 공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마음을 사탄에게 점령당한 채 살고 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사탄의 연장소리가 나고 있다. 미움의 연장, 두려움, 시기, 질투, 모두 우리 마음을 핍박하는 기구들이다. 이것들이 깨어나면 불화가 되고, 불평이 되고, 분열이 되고, 싸움이 된다.

탐욕이 탐욕과 부딪치는 소리, 미움이 미움과 부딪치는 소리, 질투와 질투가 부딪치는 소리, 원망이 원망과 부딪치는 소리들이 요란하다. 이것이 내적 핍박이다. 성도는 내적 핍박을 견디어 내야 한다. 이겨야 한다. 탐욕을 이기고, 미움을 이기고, 두려움을 이기고, 시기심을 이기고, 음란한 충동을 이기고,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다.

의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성령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하여, 내적 핍박을 이겨야 한다.

지금은 예수를 믿는다고 핍박하는 시대가 아니다. 로마의 황제숭배와 그들의 전통 문화(헬라문화=이교도 다신 앞에 절하는 예식)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장작더미에서 불에 태워져 처형을 당하거나 짐승에 찢겨 죽는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믿을 수 있고, 자유롭게 찬양할 수 있고, 기도 할 수 있고, 의를 행할 수 있고, 전도 할 수 있고, 모일 수 있고, 교회 갈 수 있다. 외적으로 아무도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지 못하고, 방해 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성경대로 살수 가 있다. 이러한 신앙의 자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 생활을 하기가 쉽다고 말한 이는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다. 왜 그럴까? 로마의 장작불은 없어도, 원형경기장의 사자나 짐승을 없어도, 그때 그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지금도 똑 같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방법만 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옳은 길을 가는 것이고, 옳은 삶을 사는 것이다. 바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뜻한다. 옳은 길을 가기 위해, 옳게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손해보고, 무시당하고, 왕따 당하는 자는 주님이 회복해 주실 것이다. 미풍 양식이나 전통의 양식이라는 명함 뒤에서 자행되는 조상 제사나, 다른 미신적 예식 때문에 가족들이나 집안에서 핍박을 받는 자는 기뻐하라고 했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다.

천국을 소유하게 되면 모든 것은 끝이 난다. 그 안에 모든 진귀한 노다지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성공 중에 성공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품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품고 살기 위해, 핍박을 받는 자들이 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기 위해, 그리스도의 의를 품기 위해, 그리스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손해나고, 오해 받고, 도난당하고, 억울함 당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그분의 피 흘리신 희생을 소중히 하기 위해 핍박을 받을 수 있다.

“즐거워하라 천국이 저희의 것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8복음은 이성의 눈으로 보면, 이성의 잣대로 재면, 절대 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야 말로 복이고, 그것이야 말로 복의 길이다. 그리고 성공이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면 성공하는 시대에 와 있다.

옛날 방식은 통하지 않는 시대, 이성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 했다. 그래서 거짓으로 이룩한 부 때문에 감옥에 간 일이 생기고, 거짓을 선동하여 얻은 권자에서 오래 못 버티고 쫓겨나고, 여러 가지 권모술수와 인간의 간계로 이룩한 어떤 일들이 점점 더 많이 더 분명하게 실패하고 있다.

이제는 정직이 흥하고 거짓이 망하는 시대, 사랑은 흥하고 미움은 망하는 시대, 진실의 실체가 곧 드러나는 시대, 마음의 정체가 드러나는 시대가 도래 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일단 하나님의 품에 안겨 버리면 모든 것은 끝이 난다. 그곳은 사랑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에서 시작해서 용서로 끝을 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 하소서” 이것이 사랑의 목소리다. 그 소리가 우리 속에 거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