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복음 (8) 부 (富) 의 원리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35

부의 원리 (1) : 탐욕을 버려라.

성경 고후 9:10-11 “Now he who supplies seeds to the sower and bread for food will also supply and increase your sore of seed and enlarge the harvest of your righteousness. You will be made rich in every way so that you can be generous on every occasion and through us your generosity will result in thanksgiving to God”

부자가 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로망이다. 부자로 사는 사람을 축복받은 사람, 가난하게 사는 사람을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 혹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일종의 벌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물질적인 부에 대해 2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다. 물질적인 부가 죄라는 것과 물질적인 부가 축복이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물질적인 부는 축복의 상징이었다. 물질적으로 부한 나라는 강대국이고 물질적으로 가난한 나라는 약소국이다. 나라가 물질적으로 부할 때 백성은 평안했고 나라가 가난할 때는 불행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대가로 부를 얻었다. 이삭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부를 얻었고, 야곱이 부를 얻었다. 다윗의 부는 아직까지도 비길 이가 없을 정도다.

부는 우연히 오지 않는다. 우연히 온 부는 곧 우연히 사라져 버린다. 부는 부를 얻으려는 욕망에서 온다. 부를 얻겠다는 욕망이 없으면 부는 오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에게는 2가지 욕망이 있음을 말한다. 그 중 한 가지는 불의한 욕망이다. 그것을 탐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탐욕인가?

창 3장 17절을 보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땅이 너에게 엉겅퀴를 낼 것이고 너는 종일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으리라” 는 말이 나온다. 이는 타락한 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된 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해준 생존 방식이다.

에덴에서 추방된 후 인류는 무엇을 쟁취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싸우고, 속고, 속이면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을 생존 법칙이라고도 하고, 생존 경쟁이라고 부른다. 밀림의 법칙이기도 하다. 인류는 서로 뺏고 뺏기는 것이 삶이라고 믿어왔다. 나 아닌 모든 것들이 경쟁(싸움)의 대상이다. 그것의 동력은 탐욕이다. 탐욕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존법칙 아래 머무르게 하는 힘이요 능력이다. 태초의 인간은 경쟁방법이 아닌 창조적 방법으로 살 수 있었다. 필요한 것을 우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었다. 아니면 창조할 수 있었다. 여하간 부족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의식주는 그들이 염려할 문제가 아니었다. 경쟁은 빈곤에서 시작된다. 악의 생존 방식이다. 그러므로 빈곤이 없으면 탐욕은 필요가 없다. 탐욕이 인간 안에 머무를 자리가 없다.

인간에게 악에 대한 지식이 추가로 더해 졌을 때 그 악의 생존 방식의 시작인 빈곤이 왔고 탐욕이 왔다. 이는 악이 사는 방법이다. 인간 안에 두 가지의 생존 방식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탐욕이란 태초의 인간이 지닌 창조적 방법이 아니라 경쟁적인 방법으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다. 내가 구해서 얻을 수 있고 창조를 통해 얻을 수 있는데, 그 방법을 버리고 경쟁적인 방법으로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다.

경쟁적인 마음엔 언제나 남이 가진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탐내는 경쟁심이 뒤따른다. 남의 것을 뺏으려 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려는 마음이 뒤따른다. 양 99마리 가진 사람이 한 마리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는 마음, 아합 왕과 이세벨이 느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마음, 필요 이상을 가지려는 마음, 이것이 탐욕이다. 그래서 부자는 평안이 없다.

우주에는 흐름이 있다. 모든 것은 그 흐름을 타고 오고 간다. 그러나 생존의 법칙은 그 흐름을 무시한다. 때와 계절을 기다리지 않고, 인내하지 않고, 무조건 쟁취하려고만 한다. 쟁취하기 위해 덧을 놓고 함정을 판다. 쟁취해서 얻기도 하지만 대부분 얻지를 못한다. 얻어도 만족이 없다. 솔로몬의 말처럼 모든 것이 헛된 고통으로 끝난다.

“우물가에 여인처럼 난 구했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을/ 이 샘에 와 내 잔을 마시라/ 오 주여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 하늘 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 넘치도록 채워 주소서/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선’의 생존 방식이 아니라 ‘악’의 생존 방식만 사용하며 하면서 살아왔다. 창조적인 방법이 아니라 경쟁의 방법을 선택했다. 악의 생존 방식엔 결코 안식이 없다. 평안이 없다. 항상 긴장이고 불안하다. 하나를 얻으면 둘을 얻으려 하고, 둘을 얻으면 셋이 갖고 싶다. 그렇게 풍선처럼 부풀어지다가 터진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주님 앞에가 나를 맡겼네./ 진정 기쁜 날이었네/삶은 의미 없고 안식 었었네./ 그러나 이제는 달라/ 새 삶이 내게 임했네. 기-쁜 날이네/

솔로몬은 3천 궁녀를 거느렸다고 한다. 하나가 만족을 못주니 둘이 되고 마침내 3천이 되었는데도 만족이 없었다. 그래서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고 …“ 라고 했다.

이것이 인류가 살아온 삶의 패턴이다. 미워하고, 전쟁을 하고, 시기하고, 탐하고, 천하를 다 얻는다 해도 만족이 없다. 황금 항아리 아홉을 가지고도 또 갖고 싶어 한다.  아무리 많이 품어도 아무리 많은 사람의 인기를 품어도 만족이 없다. 더 많이 품고 싶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 육체의 탐욕에 대한 해석이 나와 있다. 음행, 더러움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 등. 이것은 경쟁방식의 삶에 열리는 열매다. 지금은 경쟁적 방법으로 사는 계절이 아니다. 그래서 부를 얻으려면 탐욕을 버려야 한다. 대단한 믿음이 필요하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36.

부의 원리 (2): 의로운 소망을 가져라.

골로새서 35-9 “그러므로 땅에 있는 육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탐욕이란 우상숭배로 간주 할 만큼 큰 죄에 대당한다는 말씀이다.

탐욕(greed)을 다시 정의하면 육체의 본성에서 산출되는 욕망 (sinful nature)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불의한 욕망이다. 불의한 욕망은 하나님과 대적한다고 성경에 나와 있다. 그 뿌리가 악이기 때문이다. “욕심이 장성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으리라” 탐욕은 죄를 낳고 영육간의 사망을 낳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또 하나의 욕망은 ‘의로운 소망’이다. 마태복은7장18절에는 나와 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나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그러므로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물질의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서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그 속성으로 파악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욕망(desire)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 출처가 어디냐에 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된다. 의인은 그 어떤 것도 의의 도구로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의로운 욕망, 즉 소망이란 의로운 사람 마음에서 나온 욕망이다. 부는 아브라함에게는 의를 이루는 도구였지만 소돔 사람들에게는 멸망을 자초하는 멸망의 도구였다. 부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도 될 수 있고 불의도 될 수 있다.

의인의 소망은 경쟁적 방법이 아니라 창조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자신의 소망을 의롭게 하기 위해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는다. 우주의 이치와 법칙을 어기지 않는다. 남의 것을 탐내고 훔치지 않는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편법을 써서 얻으려 하지 않는다.

의로운 소망이란 중생한 사람들 마음에서 나온 소망이다. 새로운 법칙, 새로운 법칙에서 나오는 갈망이다. 새로운 법칙은 평화고 사랑이다. 사람은 의로운 명예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한다. 좋은 집을 갖고 싶은 의로운 소망이 있어야 한다. 건강을 갖고 싶은 의로운 소망이 있어야 한다.

뿌리가 선이면 잎도 가지도 열매도 선이다.(로 11:6절) 마음이 선이면 선한 마음에서 나온 모든 것이 선이다. 포도나무에서 가시 열매를 낼 수 없고 엉겅퀴에서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탐욕이 아니다. 부는 준비된 사람에게 의를 이루는 도구다. 도구가 있어야 의를 나타낸다. 성도는 향락을 위해 부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예수를 믿고)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심을 행함 (자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의로운 소망은 성령님께 속한 것이다. 의로운 소망은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한 소망이고 비전이다. 성도는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비전이 없으면 망한다. 사랑의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게 하기 위해 소망을 가져야 한다. 나의 모든 의로운 소망은 하나님이 심어주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탐욕이 없다. 십자가 옆에서 탐욕은 타져버리고 죄도 타져버린다. 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돈을 많이 가진 것은 탐욕이 아니다. 돈을 많이 갖고 싶은 것도 탐욕이 아니다. 돈이 악이 되는 것은 사용자에 따라서 결정된다.

내 속에는 성령이 계시고 나는 성령의 역사로 새로 태어났다. 예수님은 영적인 법칙을 가르쳤다. 예수님이 가르친 법칙은 사람의 법칙과 다른 새로운 영의 법칙이었다. 거의 반대의 법칙이었다. 이제는 옛날 법칙을 버리고 새 시대에 맞는 법칙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수많은 십자가를 만들기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셨다. 다른 이의 십자가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 지셨다. 가난도 무거운 십자가다. 요즈음 세대는 가난이 가장 큰 신앙의 박해다. 인생의 빈곤도 십자가다-

내가 변하면 너도 변화고 내가 변화면 내가 서 있은 환경도 변한다. 내가 꽃이면 내가 서 있는 곳은 정원이고 꽃밭이 된다. 돈은 내 인생의 꽃도 될 수 있고 내 인생의 빛도 될 수 있다. 의의 도구도 될 수 있다. 명예도 마찬가지다.

명예는 신앙인을 갉아먹는 벌레도 될 수 있고 신앙을 잡아먹는 사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명예는 신앙인의 꽃도 될 수 있고 빛도 될 수 있다. 꽃에 벌레가 들면 벌레는 잡으면 되고 명예가 사자로 돌변하면 사자를 다스리면 된다.

다니엘에게 사자는 아기 고양이처럼 되고 말았다. 다니엘을 영광스럽게 했다. 주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 빈곤하게 살라고 하지 않으셨다. 내가 이 땅에서 누구보다 풍족하게 사는 것은 주님의 뜻이다. 태어날 때부터 내게 주어진 권리다.

가난하게 사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남편노릇도, 아빠 노릇도, 친구 노릇도, 친척 노릇도, 좋은 이웃 노릇도 할 수가 없다. 성도가 가난하면 자선을 할 수 없다. 옥에 갇힌 자를 돌볼 수도, 나그네를 돌볼 수도 없다.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허기진 자에게 먹을 것을 줄 수가 없다. 가난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새 계명을 지킬 수가 없다.

가난하면 몸도 나빠지고, 몸이 나빠지면 영혼도 나빠진다. 영혼이 잘되면 몸도 잘되고 마음도 잘 된다. 부자가 되면 몸도 잘되고 마음도 잘되고 몸과 마음이 잘되면 영혼도 잘된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37.

부의 원리 (3) : ‘부’ 를 구하라.

잠언 10:22 “여호와께서 복을 주심으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이 주신 부는 근심이 없다. 근심이 없으면 평화다. 평화면 천국이다. 하나님이 주신 부는 창조적 방법을 타고 온다.

성경엔 돈에 대해 부정적인 기록들이 들어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려 우니라”

읽을수록 으시시한 말씀이다. 그러나 위의 말씀을 잘 읽어보자.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이 아니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다. 아멘, 맞는 말이다.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돈을 사랑하는 것이 될까. 부자와 청지기는 어떻게 다를까? 그것에 대한 해석이 다음 성경에 나와 있다.

“Now listen, you rich people, weep and wail because of misery that is coming upon you. Your wealth has rotted, and moths have eaten your clothes. Your gold and silver are corroded. Their corrosion will testify against you and eat your flesh like fire, you have hoarded wealth in the last days. Look the wages you failed to pay the workmen who mowed your fields are crying out against you. The cries of the harvesters have reached the ears of the Lord Almighty. You have lived in luxury and self-indulgence.”(야고보서 5장 1-3절)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돈을 사랑한 사람이다. 금과 은을 녹이 슬도록 쌓아놓기만 했다. 그것도 마지막 날까지 모아 놓기만 했다. 그는 재물에 공기가 통하지 않아 곰팡이가 나고 썩도록 모아만 놨다. 성경은 바로 이런 사람을 부자라고 했다. 돈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했다.

특히 그는 부를 모을 때 경쟁적인 방법으로 모았다. 그가 일군들의 임금을 지불하지 않아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까지 상달 되었다. 부를 가두어 놓는 것은 불의고, 우주의 법칙 위반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에 대한 해석이다. 돈을 사랑하는 자에 대한 해석이다. 녹이 슬도록 돈을 쌓아놓은 자 그러면서 또 부를 구하는 자, 이것이 부자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처럼 돈을 사랑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필요해서다. 필요라는 단어는 곧 사용할 데가 있어서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녹이 슬고 곰팡이가 나도록 금고에 감춰두겠다는 말이 아니다. 즉시 사용하겠다는 말이다 이것이 다르다. 나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필요로 할 뿐이다. 내가 의를 이루기 위하여, 주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돈이 필요할 뿐이다 (딤전 6:17-19) 이는 청지기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될 수도 있지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모세의 지팡이도 될 수가 있다. 돈은 신앙인을 죽이는 독사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성도의 힘을 돋구는 보약도 될 수가 있다. 다루는 자에 따라, 사용자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된다. 할렐루야. 성도는 돈을 사랑해서 잡는 것이 아니라 필요해서 잡는다. 육적인 탐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로운 욕망을 위하여 잡는다. 세상에 독사를 다루는 사람은 많다. 독사를 다루는 방법도 많다. 독사를 다루는 비결은 집중이다. 독사가 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돈을 다룰 때 독사를 다루는 것처럼 정신을 집중하면 된다. 돈이 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독을 빼버리면 된다. 성도가 돈에게 물리지 않고 돈 다루는 방법이 성경에 나와 있다. 할렐루야.

성경엔 많은 재물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쌓아놓지 말라는 경고가 있다. 돈이 독사와 같이 위험한 독이 있어서다. 그것을 이용하여 사탄은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도록 우리의 의식을 속이고 그걸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 한다. “가난, 가난, 부자는 천국 못 들어가…” 그러나 천국에 못 들어가는 부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는 돈 많은 의인들이 너무 많다. 욥도 그 중 하나다. 아브라함, 야곱, 이삭, 마태, 누가,  살로 매, 그 외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 부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바울은 자신은 가난했을지 모르나 많은 사람을 부자가 되게 했다. (poor yet making many rich고후 6장10절)

탐욕과 의로운 소망은 그 목적에서 차이가 난다. 주인이 다르다. 의로운 소망의 수혜자는 하나님이고 불의한 욕망의 수혜자는 마귀다. 결말이 불행이다. 중생한 사람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요일 3:20)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결과는 기쁨이고 평화고 사랑이다.  가라지와 곡식은 자라면서 알게 된다.

의인은 음행을 위해 부를 구하지 않는다….(갈 5:19절) 향락을 위해 부를 구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쌓아놓으려고 구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는 젊은 청년이 찾아와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을 물을 때 예수께서 그가 소유한 소유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말한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가난하라는 것이 아니다. 돈을 움켜쥐고 있지 말고 순환시키라는 의미다. 그가 가진 것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걸 때달아야 부를 다룬다. 그래야 진짜 천국에서 보화가 내린다. 예수님이 아직 세상에 법제화 되지 않은 우주 가운데 흐르는 부의 법칙을 말했다.

마25: 34-40 “그 때에 임금이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 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힌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의인은 사랑의 새 계명을 지키기 위해 부를 원한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38

부의 원리 (4) : 돈 버는 비결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12: 33); 딤전 6장 17-19 참조

사실 이 성경은 부에 대한 지식보다는 부자 되는 비결이 들어있는 암호 문자다. 구제로 주머니를 만들면 그 빈 주머니를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이 담겨져 있는 말씀이다. 여기서 말한 낡아지지 않은 주머니란 영원한 주머니를 의미한다. 내가 내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주머니를 의미한다.

주머니가 낡아서 떨어지면 아무리 좋은 것을 담아놔도 없어진다. 낡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세월이 가도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장소가 바꿔져도 낡아지지 않은 주머니, 그리고 그 주머니가 비면 누군가 채워주는 주머니, 이런 주머니를 만들라고 했다 이런 마법의 주머니를 만들라고 했다. 어떻게? 구제로.

성경에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특별히 그 부자가 잘못했다는 얘기가 없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먹고 마시고 했을 뿐이다. 먹고 마시는 것이 죄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먹고 마시는 문제로 누구를 처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왜 지옥이라는 구덩이에 들어가야만 했을까? 바로 하나님이 창조 하신 우주의 법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돈은 사용하는 것이지 모아 놓는 것이 아니다. 돈을 쌓아 놓는 것은 돈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 된다. 돈은 식물이 아니다. 어디다 심어놓고 감춰놓는 것이 아니다. 사용하여 흐르게 해야 하고, 보내야 한다. 그러나 잘 보내야 한다. 꼭 가야할 데로, 필요한 곳으로, 내보내야 한다. 오래 붙들고 있으면 독이 된다. 돈도 썩고, 창고도 썩고, 나도 썩는다.

이 부자는 자신에게 흘러온 부를 흘러 보내지 않고, 그것을 움켜지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썼기 때문에 순환의 법칙을 어긴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청지기라고 했다.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다. 돈은 관리하는 것이지 쌓아놓는 것이 아니다. 수건돌리기 놀이와 같다.

그 부자는 쌓아만 놨다. 청지기에서 부자가 되고, 횡령 자가 되고, 우주의 흐름을 방해하고 어기는 범죄자가 된 것이다. 그는 가장 가까이 있던 나사로에게 빵 덩어리 하나 주지 않고 쌓아만 놨다.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우리는 청지기다.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우리는 청지기다. 잠언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케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

성경엔 또 다른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추수를 하여 창고까지 새로 지어 많은 물질을 모아놓게 되었다. 그리고 말하길 “내 영혼아 이제 먹고 마시자, 충분히 먹을 것을 모아 놨으니 복락을 누리자”고 했다. 하나님은 그를 향해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

그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흘러 보내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쌓아놓고 있었다. 우주의 법칙을 범한 것이다. 그는 자선으로 창고를 짓지 않았고 흘러 보내지도 않았고 아예 통째로 가둬버렸다. 우주의 법칙을 위반한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취하면 네가 가진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부는 이런 것이다.

주인에게 빚을 진 빚쟁이들을 다 불러다가 100섬은 50섬으로 50섬은 열섬으로 10섬은 다섯 섬으로 바꿔주는 한 청지기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이 자기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치고 있는 그 청지기를 지혜 있다고 칭찬을 한다.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이 정확한 물질에 대한 사용법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노후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자녀들을 위해 보험을 들으라는 얘기다. 하나님의 것으로 인심 쓰라는 얘기다. 용서, 축복, 사랑

부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판돈도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고 어차피 빈손으로 돌아 갈 것이다. 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우리는 청지기로 만족해야 한다.

이 우주에 우리가 만든 것은 없다.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것으로 살고, 그분의 것으로 즐기고, 그분의 것으로 인심을 쓴다. 성경은 바로 그러라는 것이다. 썩을 때까지 쌓아놓지 말고, 녹슬 때까지 감춰놓지 말고, 가둬놓고, 숨겨 놓지 말고, 꺼내서 사용하라는 것이다. 사용할 곳이 없으면 자선을 하라는 것이다.

모든 부는 순환의 법칙아래 있다. 계속 흐르고 돌아야 한다. 우리에게 부를 주실 때는 이유가 있다. 다른 것들한테 가면 나눠주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준다. 믿고— 나눠줄 것을 믿고 —

그것이 바로 자선이다. 나눠주는 것이고 분배고 흘러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또 다시 흘러오는 것이 부의 법칙이다. 그러나 그 법칙을 어기고 자기에게 흘러온 것을 꽉 붙들고 있으면 이는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 되고 법칙을 위반한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돈을 사랑하는 것이고 본 주인에 대한 횡령이고 직무 유기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사랑, 용서, 웃음, 이해, 눈물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중 한 사두개인이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물었다. 마침 그들은 급작스런 태풍으로 고기잡이 나간 배들이 파손되고 침몰하여 가족을 잃고 땅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이때 유다를 불러 금고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그 금고는 자신들의 것이 아니고 바로 재난당한 사람들의 것이며 그들의 것을 그들에게 돌려주지 않는 것은 횡령이라고 했다.

부는 이런 것이다. 나는 부를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나보다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돈의 법칙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청지기요 우주의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에 대한 기본 지침이다. 부를 꿈꾸는 자들이 반드시, 반드시 알아야 할 부에 대한 기본 지식이다. 부는 구해서 얻는 것, 그러나 얻은 후 사용해야 하는 것!!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39.

부의 원리 (5) : 부를 얻는 기술

Commend those who are rich in this present would not be arrogant nor to their hope in wealth, which is so uncertain, but to put their hope in God who richly provide us with everything for enjoyment. Commend them to do good, to be rich in good deeds, and to be generous and willing to share. In this way they will lay up treasure for themselves as a firm foundation for the coming age, so that they may take hold of life that is truly life. (딤전6:17-19)

구약에서 해석한 모든 축복은 물질적인 부를 의미하고 있다. 신약에 와서 축복의 의미를 영적인 부분으로까지 확대시켰음이 성경에 나와 있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잘되고 범사에 강건하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를 얻을 것인가? “부를 얻는 힘을 주시리라” 여기서 말한 힘이란 부를 얻을 수 있는 기술이다. 방법을 의미한다. 부를 얻는데도 기술이 있다는 의미다. 기술이란 과학이다. 기술이란 공식이다. 그 기술이 있어야 부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부’ 얻는 방법은 먼저 구하는 것이다. ‘부’는 그냥 굴러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부’는 구해야 하고 찾아야 하고 두드려야 한다. 그러나 법칙이 있다. 법칙대로 두드리고 법칙대로 구하고 법칙대로 달라해야 한다. 성경은 ‘말’로 구해서 받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것이 물자를 얻는 방법이다. ‘말’, 말로….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말을 뱉어내기 전 ’진짜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말 내가 그것을 원하고 있는가?’ ‘얼마를?“ ‘무엇 때문에 그것을 원하고 있나?’ ‘왜 그것이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 이것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구한다. 너무나 많은 것을 한꺼번에 구한다. 너무 많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동서남북으로 유랑하다가 말을 끝낸다. 구하는 데에는, 찾는 데에는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주님이 기도를 가르치면서 알려주신 기본 지침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창조한 긴 기도, 소리 큰 기도, 횡설수설, 중언부언, 할렐루야 아멘으로 끝나는 기도를 한다. 기도가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던 일단 체면치례부터 하고 보자는 심산이다. 그래서 요점 찾기도 힘들 정도로 길고 긴 기도를 탄생시킨다. 심지어 기도까지도 경쟁적이다. 저 장로 보다는 내가 더 멋진 기도를 하고 곧 자기가 무엇을 구했는지 잊어버린다. 이렇게 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다음은 기도의 내용이다. 기도에는 법칙이 있다. 절대로, 절대로 내가 원하는 것이 남의 자유나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돈이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직장이 되었든, 사랑이 되었든, 절대로 남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갈라디아 5장 19절에 나오는 Witchcraft(술수)가 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창조 하셨고 사랑 하신다. 그러므로 내 기도가 남의 자유, 남의 권리 그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 이런 것들을 우리는 침해 하거나 빼앗는 것을 구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만일 그런 방법으로 무엇을 얻는다 해도 혹독한 댓가를 받게 된다. 여지없이 불행으로 끝을 맺게 된다. “너의 주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가 너에게 부를 얻을 힘을 주시리라.”(신8:18).

다음은 기다림이다. 기도가 이루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계절이 있고 그 계절에 따라 무엇이 오고간다. 인생의 봄에 꽃을 구하면 쉽게 꽃이 피지만 인생의 겨울에 꽃을 구하면 꽃이 피는 가을, 혹은 여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열매도 마찬가지다. 열매는 잎이 나고, 꽃이 핀 다음에 맺힌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약속받은 후 거의 25년을 기다렸다. 첫 번째 약속으로부터 25년 후가 이삭을 얻을 수 있는 계절이었다. 하나님은 인생의 계절을 알고 있다. 그 계절을 이용하여 우리가 구한 것을 보내 주신다. 물론 기도에 의해 우리의 계절이 바뀔 수도 있다. 그러더라도 그것은 하나님 소관이다. 그러므로 그 때를 기다려야 한다. 물론 기다리는 시간은 초조하다. 불안하다. 그 안에 의심이 틈타기도 한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하고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인류의 불행은 빈곤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었다. 그녀가 빈곤을 느꼈다는 흔적이다. 그 빈곤을 채워보려고 선악과를 먹었다. 이는 필요 이상의 욕심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완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수치를 느꼈다. 수치는 무엇인가 부족해서 생긴다. 그녀의 생각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가인이 질투로 아벨을 죽인다. 질투는 상대가 나보다 뭔가 잘나거나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데서 발생한다.  그는 아벨이 하나님의 관심을 더 많이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가인의 질투는 탐욕이었다.

인류가 왜 전쟁을 해 왔는가? 왜 남의 땅을 침범하고 남의 나라를 침범했는가? 부족을 채우기 위해 전쟁을 하여 왔다. 뺏어서라도 채우려고. 탐욕이다. 아이는 뭔가 부족을 느껴서 태어나면서부터 운다. 배고파도 울고 기저귀가 젖어도 운다. 아이는 엄마의 관심을 얻어 채우기 위해 울고, 땡깡 부리고, 말썽 피우고, 고집을 부린다. 울음은 아이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 방법은 빈곤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이는 울 필요가 없다. 울지 않아도 엄마가 다 알아서 해 준다.  탐욕이다. 바보 온달은 남보다 여러 면에서 평균 이하였다. 빈곤했다. 소문은 허상이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장수가 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훌륭한 장수였다.

에덴에서 하와가 생각한 빈곤도 허상 이었다. 인간은 빈곤하지 않았다. 인간이 빈곤이라고 생각한 것은 실체가 없었다. 하나님과 같이 있을 때 인간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 40년 동안 농사도 짓지 않았으나 풀한 포기 자랄 수 없고 경작할 수 없는 사막에서 굶어죽지 않고 살았다. 하나님 곁에는 부족함이 있을 수 없다. 부족하지 않는데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탐욕이다. 자신의 것으로 만족을 하지 못하고 필요 이상을 갈망하는 것이 탐욕이다. 부족하지 않는데도 부족하다고 원망하던 이들은 죽었다. 언제나 탐욕은 불행한 결과를 불러들인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40

부의 원리 (6) : 돈이여 있게 될 지어다.

마가복음 9: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 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많은 사람들은 인간은 참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런데 만일 사람이 능치 못할 것이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행복한 일이지만 일단 인간이 그런 초능력을 가지면 탐욕이 없어지고 평안해 질 것 같다. 그런데 실제 주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다. 인간은 초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그리고 바로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셨다. 우리로 하여금 평안을 누리면서 살게 하기 위하여 단순하게 물질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도 우리가 얻을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주님은 우리가 빈곤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가 우리 안에, 우리가 그 안에 있다고 까지 했고, 떡 달라는 자식에게 돌덩이를 줄자가 없고, 생선 달라고 할 자식에게 뱀을 줄자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비유를 주시기도 했다.

원망 없이 감사함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다 받는다고 했다.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믿으라고 했다. 믿음으로 구하라 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믿음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신용카드라고 했다. 얼마나 확실하면 그렇게까지 말씀 하셨겠는가?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또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할지니”(히 6:11) “If our heart do not condemn us we are confidence before God and receive from him anything we ask” (요일3장 2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장 7절)

그러나 사탄은 그것을 의심하게 하고 그리하여 내일 일을 두려워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잊게 하고 착각하게 하고 망각시킨다. 그래서 인간은 늘 부족을 느낀다.

왜 부족을 느끼게 할까? 탐욕 때문이다. 그래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부족을 느껴야 평안이 깨지기 때문이다. 평안은 주님이 가져오신 선물이다. 부활하신은 주님은 모두에게 이제 평안, 평안이 있을 지어다. 평안 하라고 하셨다. 인사가 달라졌다. 그분이 세상을 권세를 이기셨으므로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일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구하는 것을 다 받으리라.”(마 21: 2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 보다 큰 것도 행하리라요” (요14: 12)

여기서 말한 믿음이란 무엇일까?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나는 할 수 있다’ 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님은 그동안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능력이 사람에게 있음을 알려줬다.

사람이 능치 못할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 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한 믿음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믿어야 하고 나 자신을 신뢰해야 한다. 나는 할 수 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 20)

성경적으로도 우리가 우리를 신뢰해야 할 이유는 많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나는 성령의 전이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 내 안에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주님이 계신다, 주님은 나에게 무엇이든지 주기를 원한다. 우리는 성령이 거하는 전이다. 성령의 전이라면 성전에서 필요한 물자는 자동적으로 제공 된다.

성령의 전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한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신약의 제사는 이웃 사랑이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사랑을 하려면 물자가 필요하다. 물자 없이는 사랑을 할 수가 없다. 사랑을 표현 할 수가 없다. 사랑할 물자가 제공 되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빈곤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우주가 모두 하나님의 물류 창고라고 했다. 그 창고를 열수 있는 열쇠가 우리의 말이라고 했다.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사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시대가 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통치를 원하지 않거나 약간 주저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자유가 없을 것 같으니까? 향락을 버려야 하니까?

노래방- 룸살롱- 술- 등등- 그러나 그것들의 결과는 허무다. 술 실컷 마시면 아침이 되면 속이 쓰리다.  헛되니, 헛되다. 기쁨은 하나님 안에도 있다. 참된 평안은 하나님 안에 와야 맛볼 수 있다. 하나님께 통치 받는 인생이 되면 의식주나 복지문제는 우리가 염려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냥 하라는 대로 하면서 살면 된다. 그냥 풍요롭게 평안하게 살면 된다.

풍요롭게 되는 것은 그의 신성한 권리다. 성령 안에는 빈곤이 있을 수 없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생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스스로 빈곤하다는 믿음에 갇혀서 살고 있다. 누가 우리에게 빈곤하다고 가르쳤나? 누가 그 허상을 속삭였나?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41

부의 원리 (7) : 무엇이든지 구해서 얻는 원리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57)”

정말 좋은 말씀이다. 그러나 원리를 알아내지 못하면 그림의 떡 같은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내야 할 원리란 “어떻게 주님 안에 거할까” 이다. 아주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문제다. 어떤 분들은 믿음 안에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믿음 안에 드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 원리를 깨치기 위해서는 다시 초보적인 주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에서 주님이 외치신 천국이 바로 주님이다. 여러 가지 설명을 접어두고 일단 천국의 통치권자는 하나님이시다. 그곳의 법은 ‘의’고 ‘영생’이다 그래서 주님을 의로 표현하고, 빛으로 표현하고, 영생으로 표현한다. 의는 악의 반대고 빛은 어둠의 반대고 영생은 죽음의 반대다. 셋 다 천국을 이루는 기둥이요, 골격이요, 지붕이다.

“또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고 …. 우리가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 우리가 참 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시라. ; We know that we are children of God….We are in him who is true-even in his son Jesus Christ. He is the true God and eternal life”(요일5장 20절)

성경이 결론을 내려줬다 우리가 이미 영생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성령이 알려주시고 보증하신다고 했다. (엡1:13-14)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되심이니라.”(골2장 9절)

여기서 말한 신성(Deity)이란 영성이다. 영적 능력을 의미한다. 창조능력이 충만히 회복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음은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이다. 주의 말씀은 많다. 그 중 어느 말씀을 말하는 것일까? 조금 어려운 말 같지만 주의 말씀은 많지만 적다. 그리고 적지만 많다. 주님의 말씀은 모두 같기 때문이다. 모두 한 몸인데 지체로 나눠져 있을 뿐이다.

나는 젊을 때 어느 목사님께 그분이 문제를 일으킨 어떤 말에 대해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전화를 걸어 그것을 묻는 순간 그 목사님 말씀이 “그 말은 제 language 가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다. 우회적인 대답, 물론 그 말은 그 분의 말이었다. 그래 말이란 자기 말이 있다. 조폭은 조폭이 사용하는 말이 있고, 과학자는 과학자가 사용하는 말이 있다.

“하나님 사랑” “용서” “평화” “감사” “믿음” “영생” “진리” “의” “빛” 모두 나눠져 있지만 하나다. 하나 안에 있는 지체들이다. 사랑 안에 용서도 들어있고 평화도 들어있고 감사도 들어있고 영생도 들어있고 ….영생 안에 사랑도 들어 있고 용서도 들어있고…주의 말씀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랑을 품은 자가 불평할 없고 믿음을 품은 자가 원망할 수 없다.

우리 마음에 주님의 한 말씀을 품어도 주의 말씀 전부를 품은 것이다. 품는다는 것은 우리 생활 속에 주의 말씀이 거하게 한다는 뜻이다.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이란 “주님이 있으면” 이란 뜻과 같다.

이제 구하는 일만 남았다. 무엇을 구할지도 거의 정해졌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가 그것을 왜 구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다. 왜 필요한지도 알고 있다. 이제 주저할 필요 없다. 미안해 할 필요도 없다. 구걸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서 담대하게 구할 수가 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면 주시려고 이미 준비해 놓고 기다리신다.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뿐 아니라, 너의 하나님이고,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할 수 있고,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고 저의 하나님이다. 나를 사랑하지만 너도 사랑하신다. 누군가에게 특별하지 않다. 차별을 하지 않으신다. 특별대우를 기대하지 말고 어떤 은혜가 내려와도 나만의 특별대우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겸손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고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부러워하는 것은 경쟁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이웃이 잘되고 원수가 잘되면 배 아파하지 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축하하고, 축복하라. 이는 창조적인 마음에서 나온 신성이다. 내게도 계절이 오면 석류는 열린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만의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모든 인류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할 뿐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의 부에는 악업이 따른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의 법칙에 따라 원인을 만들었으니 그 결과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가 없었다. 일평생 전쟁이다. 부를 얻어도 평안이 없었다.

그들은 우주에 있는 많은 법칙 가운데 부의 법칙만 쏙 뽑아 그것을 이용, 부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의 부는 평안을 동반하지 않았다. 왜? 하나님께 온 것이 아니어서다. (잠10;22)

부의 법칙에 의하면 부를 얻기 위해서는 부를 끌어드릴 부에 대한 인식이 필요 하다. 그래서 의식에 부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야 한다. 부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절대 부는 찾아오지 않는다. 일부 유대인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이것을 세뇌 시키고 각인을 시킨다.

“나는 부자다” “나는 부자다.” “나는 부자로 태어났고 나는 부자가 될 것이다.” “내 안에는 부의 DNA 가 들어 있다.” “우리는 특별한 민족이다.” “부자로 선택된 민족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의 부를 우리 것이라고 했다.” “나는 부자다” —————————–

이제 그러한 주문의 시대는 끝났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부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