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복음 (7) 산 제물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32.

교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언제부턴가 교회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시작은 유럽이다. 한때 복음의 메카로 불러졌던 지역이 유럽이다. 그들은 그들의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의 표시로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 장엄한 교회를 건축했다. 그리고 뿌듯해 했다. 그 교회 건물들이 지금, 현대의 건축양식이 될 정도다.

교회는 수많은 세기동안 반복하여 신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퍼줬다.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축복을 판 것이다. 그리고 축복을 많이 받아(사)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유럽의 기독교 국가는 부를 누리며 살았다. 몇몇 국가는 지금도 부자다.

오랜 세월동안 너무 많은 축복을 퍼내다 보니 자원이 고갈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축복을 사서 쌓아 놓다보니 더 이상 축복이 필요하지 않게 되어서 그러는지, 유럽 사람들은 거의 교회를 찾지 않는다.

현재 많은 유럽의 교회는 텅텅 비어 있다. 불과 몇 세기 만에, 아니 어떤 교회는 몇 십 년 만에 폭탄을 맞은 듯 황폐해 졌다. 영문을 모르는 목사들만이 그곳에 꿇어앉아 주여!, 주여! 주님을 부르고 있다.

장엄하고 웅장함을 자랑하던 독일의 교회를 비롯하여 화란, 영국, 거의 모든 유럽의 교회가 수요 란에 시달린다. 그 많은 정성과 돈을 쏟아 부어 지어놓은 교회 건물이 아깝기만 하다. 황패해진 예루살렘 성전 앞에 선 마음이다.

그 찬란한 기독교 문화를 만들었던 유럽의 신앙, 그들이 하던 기도와 찬양, 그것들은 어찌하여 계승되지 않았던 것일까? 그 많던 신자, 그 많던 고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무엇을 주려고 해도 줄 수가 없다.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어서다.

옥토가 사막으로 변하고 울창한 숲이 황무지가 되는 것은 현재 메마른 땅 아프리카가 한때 그런 곳이었다는 고증에서 증명된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자연의 이치가 아님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 “땅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그렇다면 어떻게 그 융성하던 교회가, 성령이 충만하고 기쁨이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하던 교회가 나무도, 풀도 없는 땅, 점점 메말라 바닥이 갈라지는 땅으로 사막화 되어가고 있을까? 이런 땅을 살리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교회를 살리는 방법은 없을까?

모든 신앙인들이 고민해야 한다.

유럽서 시작된 교회 사막화 현상은 미국서도 시작 되었다. 한국도 시작 되었다.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는 기도로, 기도원으로, 집회로, 제도로, 조직으로, 그 현상을 막아보려고 별의별 노력을 다 해 보지만 뚜렷하게 좋은 결과가 별로 없다. 몇몇 대형 교회를 제외하고 주일학교도 없어져 가는 정도다. 참혹한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같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다고 하나님께 잘못해 벌을 받은 결과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유대인의 이분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뚜렷한 이유를 모른 채, 시대의 변화, 사회의 변화, 인간의 변화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이도 있고, 좀 더 열심히 기도하면 되겠지, 성령의 불을 붙이면 되겠지, 영성 운동을 하면 되겠지 라는 낙천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철부지한 사람도 있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진단이나 처방으로 교회의 몰락을 멈출 수 있었다면 교회는 처음부터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기독교 복음은 ‘새로운 자아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청결한 마음, 의로운 마음, 누구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사랑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필요한 것을 구해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선지자도, 제사장도, 예언자도, 필요 없는 새로운 자아, 자신이 바로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예언자임을 일깨워주는 것이 복음이었다. 자유와 사랑과 평화의 복음이었다. 그래서 죽음 없는 영원한 영생이 약속되고 강조되었다. 주님이 보혜사로 아버지의 영인 성령을 보내 주셨다.

그러나 개체들이 모이는 공동체로 시작한 교회는 제국의 도움을 받아 조직을 만들었고 제도를 만들고 또 하나의 제국을 만들었다. 모두 바울이 쓴 서신에 근거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인이 된 사람들이 그 제도와 조직의 노예로 결과 되었다.

교회가 하나님이 거저주신 여러 가지 축복을 나눠주는 장소, 받는 장소로 변형, 향상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구호품을 받는 장소,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눠주는 자로 승격, 존경 되었다. 외형적인 제도에 의해서다.

그것까지도 좋은데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직통으로 향하는 것을 차단하고 그들이 정해놓은 장소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곳을 거쳐야만 하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결국 예수님이 주신 복음이 왜곡되는 결과를 남기고 말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탐욕이 큰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즉, 마음이 청결하지 않아서였다.

주님은 제도를 허물기 위해 이 땅에 오시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주님의 뜻이었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주님이 돌아가실 때 성소휘장이 갈라짐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주님의 뜻이 완성되었다. 인간을 제사장으로 인치 시려는 역사였다.

구약에서 제사장이란 백성을 다스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백성들의 삶을 관장했다. 성경은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 승계된 제사장으로 풀이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을 말한다.

선지자와는 다르게 제사장이란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무엇을 전달하는 메신저다. 그래서 제사장이란 기본적으로 마음이 성결해야 한다. 그리고 죄를 위한, 혹은 화목을 위한, 혹은 교류를 위한, 마음을 전달한다. 우리는 제사장이다.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지는 성령이 개입하여 도움을 주신다.

영생의 물은 우리 영혼을 목마르지 않게 하기 위한 생명수다. 그 물이 우리 마음에서 넘쳐 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바로 영생의 물을 뿜어내는 샘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계셔야 주의 말씀이 나오고 하나님이 계셔야 하나님이 사랑이 나온다. 성령이 계셔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거룩한 전이 되고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거해야 그 분이 계시는 표적이 나타난다. 마음에서 탐욕을 걷어내야 한다. 마음을 정화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내가 살고 나라가 산다. 나를 잃어버리면 교회도 잃고 나라도 잃는다. 주여! 도우소서.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33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10: 31)

“두려움” 의 실체는 허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허상을 붙들고 버둥거린다. 인간의 잃어버린 신성을 회복하시러 오신 주님은 인간이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음을 가르치신다.

“두려움”, 이는 너무 쉽게 쫓아버릴 수 있는 안개 꽃 같은 것이다. 아무리 짙은 안개도 햇볕이 들면 사라지듯이 두려움도 빛이 들면 사라진다. 그 말은 두려움은 마음에 어둠이 깔려 있을 때 생긴다는 말이다.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이다. “너희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있느냐”

우리가 밤에 깊고 깊은 야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하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게 될 것이다. 먼데서 들리는 부엉이 소리에도 등골이 오싹해 지고 머리끝이 쫑끗해질 것이다. 사실, 자연과 인간은 하나다. 하나의 지체다. 모두 주님이 창조하셨다. 인간이 어느 환경에 처하게 되어도 무서울 것이 없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무섭지가 않다. 산도 살아있고 나무도 살아있고 계곡도 살아있고 바위도 살아있다. 친근감을 가지면 두렵지가 않다. 오히려 그들에게 친근감을 느끼면서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이다.

그렇다면 그 두려움은 어디서 온 것일까? 보통 생명을 잃게 될까에 대한 염려에서 두려움은 시작된다. 믿는 자에게 두려움은 없다. 생명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이동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죽음이 아니다. 그리고 또 그것을 죽음이라고 해도 두려워한다고 다가올 죽음이 다가오지 않게 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생사의 문제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그 주인의 소관이다. 그 방법으로 죽음이 오는 것이라면 두려움은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런 방법으로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면 감사할 일이다. 그런 방법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하게 되도 감사할 일이다. 두려움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는다. 주님은 말한다. “두려워 말라.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절어있다. 그 원인도 여러 가지다.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할까에 대한 두려움, 가진 것을 잃을까에 대한 두려움 등등 모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두려움은 허상이다.  허상 앞에 떠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두려워 말라. 사탄이 두려움과 불행을 우리에게 세뇌시켰다. 우리 마음에서 두려움을 몰아내야 한다. “너희가 두려워함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희는 머리털까지 세심 바 되었다”

인생은 용기로 사는 것이지 두려움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은 한 순간에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두려움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녔다. 건강한 인생도 한 순간에 망가뜨려 버린다. 인간이 가진 모든 정신 질환에 이 두려움에 뿌리하고 있다. 두려움은 가시와 같아서 주님의 복음이 숨이 박혀서 자랄 수 없게 만든다. 두려움은 바위와 같아서 주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릴 수 없게 한다.

예수님 시대 이후 우리의 마음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했다, 성령이 거하는 전에 악이 있을 수 없다. 불행이 생존할 수가 없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우리는 평안을 품고 살수가 있다. 방법을 일러줬다. 생의 짐을 그 분께 맡기라고 했다. 우리가 들고 있는 짐을 대신 들어주시고, 짊어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일단 맡겨만 주면 주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두려움은 의심이나 원망을 거느리고 다닌다. 아담은 원망했다. 당신이 나와 함께하게 한 여자가, 저 뱀이 … 원망은 이렇게 해서 나타났다. 원망은 의심과 불평을 낳고, 불평은 미움을 낳고, 미움은 살인은 낳고, 이렇게 악은 악을 낳는 법칙 아래서 번성해 갔다.

어떻게 두려움을 떨쳐버릴 것인가? 나를 바로 아는 것이다. 나를 믿는 것이다. 그래야 어두운 마음에 빛이 들어온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 창조의 영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Holy Breath가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분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모든 질고와 빈곤과 불안과 초초와 두려움을 태워버린다. 사랑의 행위는 용서다. 내가 남을 용서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누구에게 용서 받을 것도 용서 할 것도 없는 상태가 두려움이 없는 상태다. 그래서 사랑의 열매를 용서라고 한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고, 죽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용서는 너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있다. 예수님은 용서를 위해 오셨고 용서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못에 박히셨고, 창에 옆구리를 찔리셨다. 용서를 위해 부활 하셨고 용서를 위해 승천하셨다. 용서는 사랑의 꽃이고, 꽃은 아름다움이고, 지상 명령이고, 용서는 신구약 성경의 가장 위대한 외침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천 만 번이라도 용서하라. 용서는 모든 다툼과 분쟁과 사슬을 끊는다.

우리가 용서를 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완성된다. 우리에게 초능력이 생긴다. 기적을 끌어오는 신적능력이 살아난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받을 능력이 생긴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부정적이고 무지하다.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고 외쳤다.

우리에게는 3가지 엄청난 능력이 있다. 첫째 나와 남을 축복할 능력, 둘째 사랑할 능력. 셋째 죄를 탕감할 능력이다. 우리에게 이런 능력이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런 우리에게 두려움은 허상이다. 헛것이다. 사탄이 헛것을 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능력을 두고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이런 것들을 얻으려 한다. 축복을 얻기 위해, 축복을 사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사기 위해, 죄를 용서받기 위해, 죄 사함을 사기 위해.

한번이라도 나 자신을 축복해 봤는가? 한번이라도 나를 사랑해 봤는가? 거울 앞에서 고답다고 해 보았는가? 한번이라도 나의 죄를 용서해 봤는가? 우리가 땅에서 천국의 창고를 열 수 있는 마법의 열쇠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34.

말의 권세.

18: 18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

부모는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시기 위해 항상 깨어있다. 항상 대기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고 푸는 것을, 매고, 풀고, 구하는 것을 방출하기 위해 항상 창고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불철주야 일을 준비하고 계신다.

이는 말의 힘, 말의 권세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많은 서양 사람들은 마지막 인사를 할 때 God bless you! 라는 문장을 사용한다. 하나님이여 축복해주십시오.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당당한 요구다. 이것이 예수님을 일하게 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을 일하시게 하는 방법이다. 성령을 일하시게 하는 방법이다. 예수님이 알려주신 ‘말로 성령을 부릴 수 있는 방법’이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얻으리라. 저를 축복해 주세요. 저 사람 축복 해줘요. 모든 문은 여기서부터 열린다. 남을 축복할 때, 어느 장소로 누구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 내가 나를 축복하고 내가 남을 축복할 수가 있다. 우리는 말로 하나님의 성령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들이다. 우리가 축복하면 하늘은 우리 명령을 따라 일을 한다. 우리가 말한 대로 일을 한다.

성경에 자기 직분을 잃게 된 한 청지기가 나온다. 남의 것으로 자기의 노후 대책을 세우는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했다. 내 것으로 인심 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인심을 쓰라는 것이 달란트 비유다.

내가 주는 것이 상대가 받을 만하지 않으면 내게로 돌아와 내 것이 된다, 가능하면 받을 만하지 않는 사람을 축복하고 사랑하면 더 많이 내 것이 된다. 원수는 우리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를 용서하면 그 용서를 그가 받을 만 하지 않기 때문에 수취인 수취자격 미달로 발신자에게 되돌아와서 우리의 것이 된다. 더 많은 이윤이 남는다.

만일 누가 1억을 주면서 그 돈을 일주일 안에 다 사용하라고 하였다고 가정 해 보자. 어떤 이는 그 돈으로 자신의 향락을 위해 쓸 수도 있고 육적인 욕망을 위해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남을 위해 쓸 수 있다. 달란트 비유는 남을 위해 사용해야 이윤이 남는다고 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이 맡겨주신 사랑을 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 나의 원수에게 보냈을 때 그 사랑은 나에게 되돌아와 나의 것으로 축적될 것이다. 만일 나의 축복이나, 나의 용서가 받을 만하지 않은 사람에게 보내진다면 그것들이 나에게로 되돌아와 나의 창고에 쌓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맡겨주신 사랑과 용서, 그리고 축복은 나의 창고 안에서 넘치게 될 것이고 주님이 정산하자고 했을 때 너무 넘쳐서 정산이 힘들 정도가 될 것이다. 이것이 달란트 비유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사랑, 축복, 용서)는 사용하지 않으면 책망을 받는다.

우주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인심을 써보자. 실컷 써보자. 날마다 우리 이웃을 축복을 나눠주고, 실컷 누구를 용서함으로서, 원수를 사랑함으로, 누구를 감사함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축복을 받고, 남의 풍요의 문을 열어줌으로, 내가 풍요롭게 되고, 남의 성공의 문을 열어줌으로 내가 성공하게 된다. 어떻게?  말로.

남의 행복의 문을 열어주자. God Bless You! God Bless You! 이것이 달란트 비유의 비밀이다. 장사의 비결이다. 남을 축복하는 것은 신앙이고, 생활이고, 예수 사랑이고, 마법의 동력을 일으키는 성업이다. 언어를 사용하여 명령을 하면 시행은 성령께서 하신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복 나와라 뚝딱! –

“너희가 너희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너희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인간의 말이 이렇게 중요하다. 우리는 마음을 관리하고 말을 관리해야 한다.

사람들은 욕을 한다. 욕을 안 해본 사람이 없다. 욕이 의가 아닌 줄 알면서 욕을 하기에 담대하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욕을 하지 말라 했다. 화를 내는 것이 살인이라고 했다. 바울은 욕이나 화 뿐 아니라 쓸데없는 잡담 (coarse joking)도 하지 마라 했다. (골로새서3:10)

욕을 하면 맨 먼저 그 욕을 듣는 자가 자기다. 욕이 가는 대상은 하나님의 모상이다. 화를 내면 그 화를 맨 먼저 받는 사람이 자신이다. 대상은 하나님의 모상이다. 누구를 미워하면 맨 먼저 그 미움을 만나는 자가 자기다. 대상은 하나님의 모상이다. 내 의식이 내 소리를 듣고, 내 자아가 듣고,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의 영이 먼저 듣게 된다.

차타고 가다가 창문을 열고 가래침을 뱉으면 어떻게 될까? 왜 자기 얼굴에 침을 뱉을까?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하고, 항상 기도하라고 했다. 왜? 우리 속에 주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내 속에 계신다는 것을 알면 기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용서받은 것을 알게 되면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희락과 화평으로 기뻐할 때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 접근을 할 수 없다.

남을 칭찬하고 축복하면 내 의식이 먼저 듣고, 내 안의 자아가 먼저 듣고, 내 속에 계시는 성령이 먼저 듣고 기뻐한다. 우리가 항상 감사해야 하는 이유, 찬송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건 오는 복을 거부하는 행위다.=말 뿐이 아니라 상상으로도 .. 생각으로도….

많은 의사들은 분노란 루마티스 관절염을 일으키고 피에 독소를 주입하여 혈관 질환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골로새서 3: 9 “이제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의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욕이나 분노는 착한 행실이 아니다. 의심이나 두려움은 착한 행실이 아니다. 우리는 기도를 한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는다. 먼저 마음에서 두려움을 제거하라, 의심을 제거하라. 그래야 성령께서 일을 하신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가 구할 것이 먼저 도달할 것이다. 하나님과 일체가 되면 우리는 하늘로부터 필요한 모든 물자를 공급 받을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