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13.
성령 (1) 성령을 받았느냐?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바울이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심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 2-7)
나는 성령을 받았을까? 성령을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존재 할 수 있을까? 한번 쯤 자문해 볼만한 질문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양심 없는 사람도 있고, 영혼 없는 사람, 육체적 본능만 가진 사람, 귀신과 대화나 교류를 하면서 귀신을 위해 사는 사람, 탐욕의 사람, 도덕군자. 등등. 인간은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따라 그 무엇이 된다.
인간의 마음은 매 순간 악한 영과 연결이 되어 있는 죄의 본능(Sinful nature)이든지 선한 영과 연결되어 있는 선한 본능(Divine nature)이든지 둘 중 하나에게 지배되고 관리된다.(롬 7장)(controlled by either evil or good) 이것은 법칙이다.
믿는 자에게 성령은 뭘까? 창세기 2장 7절, 자기 형상을 따라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그의 숨결을 부어 넣으시니 생령이 된지라”에서 숨결이 바로 성령(Breath of life)이시다. 딤후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서”에서 “하나님의 감동(God-breathed)”이 바로 성령이시다. 에스겔서에서 마른 뼈들에게 불어넣으신 생기가 바로 성령이시다. -물질로 만들어진 ‘동물-인간’이 성령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교류가 가능한 ‘신성 인간’ 즉 생령 인간이 되었다. 말라 비뚤어진 마른 뼈들이 성령을 받아 인간으로 살아났고, 성령을 받은 인간이 쓴 글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글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성령을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Breath), 하나님의 정신(The Spirit from God), 하나님의 마음(The Mind of God)이 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독립적인 인격체이시다. 맞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정신이요, 마음이시다.
생명이 지닌 요소란 무진 무궁하다. 계단도 없고 발판도 없는 매끄러운 담장이나 나무를 기어올라 담장 전체를 덮쳐버린 담쟁이 넝쿨이 있다. 그것을 침투, 혹은 접수라고도 할 수 있다. 연약한 새싹 하나가 바위를 뚫고 솟아난다. 생명력이다. 모든 생명체가 가진 능력이다.
인간의 정신은 인간을 판단하는 저울이다. 정신이 있으면 산 사람, 정신이 없을 때 죽은 사람, 정신이 온전할 땐 정상적인 사람, 정신이 온전치 않을 때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영웅적인 행동을 하려면 영웅적인 정신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사역을 하려면 예수님 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분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엄마 그리고 그 엄마 주위와 연결고리를 만든다. 아이들은 그동안 엄마가 형성해 놓은 모든 세계와 연결이 되어 엄마의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흡수한다. 엄마의 친척이 자기의 친척이 되고, 엄마의 친구가 자기 친구가 되고, 엄마가 관계하고 있던 모든 이들과 관계를 형성한다. 엄마가 가지고 있던 모든 환경이 자기의 환경이 된다. 아버지, 할머니, 이모, 고모가 아기에게 다가와 관심과 사랑을 준다. 이런 사랑을 받으면서 아이는 엄마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엄마의 세계와 하나가 된다. 이것이 생명이, 정신이, 마음이 지닌 창조성이다. 성령의 생명력도 이렇다.
성령은 거듭난 영혼에게 다가와 하나님과 그 세계의 천사 그리고 모든 천상의 식구들과 친족 들을 소개하고, 관심을 주고, 사랑을 주도록 연결한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계를 모르면 하나님의 세계를 갈 수가 없다. 그리고 헌 구습(죄)을 벗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오시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거듭났다고 할 수 없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영생을 품을 수 없다. 거듭난 영적 본능이 없으면 예수님의 정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 정신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정신이 없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성령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천사에 대해서도, 천상이나, 우주에 있을 예수님의 세계에 대해 알 수가 없다. 성령은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천국에 대해, 알려주고, 가르쳐 주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없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육은 영적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천상의 지혜에 속한 예수정신 없이 어떻게 예수를 알고, 믿고, 그 분의 정신을 펼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령이 없을 때 사람은 영적 마음과 예수님 영, 예수 정신이 없는 사람, 여기저기 널려있는 에스겔 골자기의 마른 뼈들, 성화가 없고 양심이 없고 영이 없는 사람이다.
바울이 기도하여 성령을 구하자 즉시 성령이 임했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했다. 여기서 방언이란 이성적인 생각을 거치지 않고 직관에서 바로 나오는 영적 옹아리로 풀이한다. 비로소 성령이 인간 속에 오셨다는 표적 중 하나인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 우는 첫 울음 소리와 같다.
성령은 영원한 생명을 일으키고, 죽은 영혼을 살리고, 고치고, 새롭게 변화시킨다, 창조와 관련이 있다. 성령이 있는 곳엔 반드시 꽃이 있고 열매가 있다. 열매를 맺기 위해 성령의 꽃이 피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받았다. 성령은 우리 안에 이미 임하여 계신다.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거듭난 자니” (요일 5;1) 내 속에 있는 내가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을 대신해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 -형제를 사랑할 때-용서할 때 축복할 때 성령은 충만해 진다. 아멘!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14.
성령 (2) 성령은 언제 임할까?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음으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니라.”(요7:49)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행1:4) 이는 성령이 예수님의 승천 후 임하셨음을 나타내는 기록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성령을 주시옵소서.”라고 한다. 이는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13)에 기초 했다 “성령이여 불같이 임 하시옵소서”- 2천 년 전에 하던 기도다. 지금은 성령시대다. 성령은 이미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로마서 8: 26에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다.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시다는 확실한 증언이다.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신 것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믿음’이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른다. 성령의 은사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다. 예수 정신없이 예수님 삶을 본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없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 속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할 말을 해 주신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성령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성경을 믿는다면서 왜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신다고 한 성경은 믿지 않을까?
만일 믿는다고 했을 때 믿으면 믿는 증거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럼 무엇이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시다는 증거일까? 많은 사람들은 성령 체험에 관한 어떤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다. -정열적인 환각상태에서 방언이 터지는 것, 몸에 진동이 오는 것, 몸이 뜨거워지는 것, 입신을 하는 것, 목이 찢어질 듯이 괴성을 지르는 가운데 들려오는 소리, 바위틈에 박혀 정신을 잃고 피를 토하도록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가운데서 보게 된 환상, 음성, 계시 등등을 성령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연유로 신앙인들 속에 이런 관념이 형성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위의 것들을 모두 부정자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절대로 성령이 특정 방법을 통해서만 임한다고 하지 않았다. 성령을 받기 위해 산이 흔들릴 정도의 괴성을 질러대야만 성령이 임한다고 하지 않았다. 간절함이란 소리의 강도가 아니다. 음색이 아니다. 소리가 있건 없건, 마음 깊은 곳, 골수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이다.
사도행전 2장4절을 보면 성령이 임하실 때 나타난 현상이 나온다. “오순절 날이 되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사도행전 4장 31절엔 *“빌기(기도)를 다 하매 모인 곳이 진동(shaken)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고 했다. 이는 초대 교회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9장 17절엔 “아나니아가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니 강건하여 지니라.”라고 했다. 역시 초대교회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령이 임할 때 어떤 보이는 현상, 흔들리는 현상도 없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4) 이 역시 물질세계의 큰 현상 없이 성령이 임했음을 나타내주는 말씀이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귀를 먹지 아니하셨다. 소리도 듣지만 마음도 듣는다. 미리 길을 내 놓고 그 길로, 그렇게 와 달라고 불러대는 목쉰 소리를 찾아 임하지 아니하신다.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진 사람이 너무 뜨거워 벌떡 벌떡 뛰는 것 같은 사람을 선별하여 임하시지도 않으신다. 그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임하신다. 박해를 피해 사막이나 동굴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대부분의 성자들은 괴성이 아니라 묵상기도를 하던 중에 성령을 받아 일평생 성령과 더불어 살았다.
성령이 임하는 방법을 인간의 고정관념으로 가둘 수 없다. 그 분은 창조의 영이시다. 만일 그 분이 오시는 길을 내가 정해놓았을 때 그분이 그 길로 오시지 않으면 그분이 임해도 모르고 그 분이 오셨어도 모른다. 성 어거스틴에게는 밀란의 공원의 한 밴치 옆 아이들의 노래 소리에서 -루터는 천둥번개 날벼락 속에서 성령의 소리를 들었다. 요한 웨슬리는 평범한 모리비안에게서 성령의 소리를 들었다. 풍랑 속에서 그가 탄 배가 -파도에 요동칠 때도 두려움 없이 찬송을 불러대는 모리비안들을 보면서 왜 자신은 평안함이 없나? 하다가 회개했다. 흔들리는 파도가 성령이 임하는 소리였고 모리비안의 찬송이 성령이 임하는 소리였다.
때론 소리 없이, 꿈을 통해, 바람 같이, 불 같이, 비둘기 같이, 항상 그분의 길은 오묘하고, 기적적이고 신비하다. 초대교회 시대에 성령은 이렇게 임했다. 어쩔 때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처럼 흐느끼고 있을 때, 말 못할 애통함으로 통곡하고 있을 때, 불치병으로 저승의 문턱에 도달하여 고통하고 있을 때, 생사의 갈림길에서 삶과 죽음을 저울질 하고 있을 때,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중에, 꾸벅꾸벅 조는 중에, 잠을 자는 중에, 운전을 하는 중에, 길을 가는 중에, 아들을 통해서, 남편을 통해서, 원수를 통해서, 성령은 말을 하고 그리고 임하실 수가 있다. 성령은 그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때 절실한 방법으로 찾아오신다.
그러므로 성령 체험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내 안에 성령이 계심을 보게 되고 알게 되고 믿게 된다. 이것이 성령 체험이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나의 영적인 삶은 단 하루도 지탱할 수 없다. 우리 속에서 쉬지 않고 역사하시는 성령을 두고 산에 올라가 “불같은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라고 외치는 것이 신앙일까? 아니면 탐욕일까?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야, 무엇을 봐야, 무슨 소리를 들어야, 자기들이 원하는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될까? 사람들이 원하는 성령 충만이란 도대체 어떻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걸까?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15.
성령 (3): 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한 것일까?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니 하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를 개인의 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예수를 개인의 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2가지 영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영적 지식이고 둘째는 예수에 대한 지식이다. 나를 알고 예수를 알아야 예수와 구세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주가 필요한가? 이것을 모르면 예수가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된다. 따라서 그의 고난도, 그의 십자가도, 그의 나라도, 그의 부활도, 나와는 관계가 없게 된다.
사람이 왜 죄인인지 깨닫는 것은 영적인 지식에 해당한다. 물질세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 물질세계에선 법을 어겨야 죄인이고 양심 세계에선 양심을 어겨야 죄인이다. 그러나 그것도 간단하지가 않다. 양심은 부패할 수 있고 법도 시간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선이 내일은 죄가 되고 오늘의 죄가 내일에 선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지상에는 시간을 타지 않고 죄를 가늠하는 저울추가 없다. 그래서 참 심판은 저승에서 받게 된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여, 서기관들이여, 제사장들이여, 독사의 자식들이여, 회칠한 무덤이여”
유대인들의 저울추와 예수님의 저울추가 달랐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저울 추 위에 서 있었고 예수님은 천상의 저울 추 위에 서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선언한 예수님을 거부했다. 영적인 지식이 없어서다.
그렇다면 누가 영적인 지식을 가르쳐주어 자아를 알 수 있게 할 것인가? 그것은 당연히 영적 지식을 알고 있는 분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주란 그리스도란 뜻이다. 그리스도란 하늘에 속한 이름이다.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면 하늘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육적인 지능으로 영의 세계, 영혼의 세계를 알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바로 그래서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후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그것을 이해했다.
성령받기 전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라.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주님을 깨닫지 못했다. 날마다 주님 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리고 가끔씩 정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했지만 그 고백은 영혼의 소리가 아니었다.
즉흥적인 감정의 소리였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체험이 영적 지식으로 변화되어 영혼의 세계에 축적되지 않았다. 주님을 알고, 영생을 알고, 영계를 알고, 믿음을 알았던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안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 말하자 도마는 “주님,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도마는 공부를 많이 한 제자다.
이는 도마의 마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의 마음이었다. 영적 지식, 천상의 지식이 있었으나 그 지식이 그들과 ‘하나’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위기가 닥칠 때 두려워했고, 부인했고, 도망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흙에서 온 육적 본능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인간의 육체가 위기를 만날 때 나타내는 자연스런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후 달라졌다. 그들은 바로 주님을 깨달았다. 생사를 깨달았다. 사랑과 평화를 깨달았다. 주님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였다.
성령이 임하여 가르치고 깨닫게 한 것이었다. 그들이 주님께 보고, 듣고, 배운 모든 영적 지식이 성령에 의해 해석되고, 생각되고, 알아지고, 깨달아졌다. 그들은 참 자아를 알게 되었다.
그들이 자아의 실체를 깨달은 후부터 그들 인생에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미움이나 원망이 사라졌다. 그들의 얼굴은 사랑과 평화가 넘쳤고 기쁨이 충만했다. 이승의 박해가 있었다. 그러나 영적 삶을 사는 이들에게 그것은 박해가 되지 못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박해가 쏘는 고통은 그 힘을 잃고 이들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활활 타는 장작더미도 이들의 감각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것이 영적 힘이다.
그 무엇도 이들의 평화와 사랑,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했다. 그들은 불에 타 죽으면서도 웃었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에게 찢겨 죽으면서도 사랑과 평화를 뿜어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켜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하였다.
고통은 느끼지 않은 이에게는 고통이 아니다. 육체적 세계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적인 본능이 그들의 생을 지배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성령이 그들 속에서 역사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제자들은 이런 평화와 사랑 그리고 기쁨이 충만했다. 그들 자신이 성령의 꽃이었고 성령의 열매였다. 그들 자신이 성령의 표적이었다.
그들의 마음에 성령이 있었기에 그들이 전한 복음도 생기가 있었다. 복음이 떨어지는 곳에서 생명의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그들은 육채로 영을 살았다. 성령이 살게 하셨다. 이승을 떠나면서도 생명을 전파하고, 생명을 일으키고, 생명을 치유하는 일을 하였다. 성령의 에너지는 더욱 충만하게 커질 수밖에 없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만나서 바로 이런 체험들을 공유했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16.
성령 (4) : 하나님에 대한 지식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느니라.” (고전 2장 10-13절,)
신만이 신을 알고 영만이 영을 안다. 하나님의 영만이 하나님의 사역을 알고,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생각을 안다. 하나님의 영만이 하나님의 독생자를 알고 그분의 계획과 그분이 원하는 뜻을 안다.(고전 2;10) 우리는 그분의 뜻을 알아야 그분의 뜻을 펼쳐드릴 수 있다.
주님은 인간이자 신이시다. 성령은 신이시다. 주님은 천국에서 오셨고, 성령도 천국에서 오셨다. 그러나 인간의 형체를 입고 오신 주님과는 다르게 성령님은 물질적인 자기 형체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상으로 창조되고 주님의 고난으로 다시 태어난 인간 육신 안으로 들어와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셨다. 그는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 중 한 위이시다. 인간을 너무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도 잘 알고 계신다.
예수는 인간 영혼의 구속자시다. 그는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고 그리스도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시었다.
예수가 인간의 구주요, 그리스도라는 것은 영적 지식에 속한다. 그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천상의 법칙에 속한다. 성령의 가르침 없이 이 영적 지식과 법칙은 알 수가 없다. 누구에게 배울 수도 없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알아도 깨달을 수 없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시니라” ( 마 16장 17절)
보혜사 (Counselor) 성령은 우리 속에서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할 이러한 영적 지식과 진리를 알려주고, 가르쳐 주고, 인도해 주신다. (요14장 26절 15장 26절 16장 13절)
영적인 세계란 광활하다. 영적 지식 없이는 천국도, 천사도, 지옥도, 공중의 권세 잡은 자도, 마귀도, 사탄의 속성도, 그들의 위장술도 알 수가 없다. 유한이 깨칠 수 없는 무한의 세계다.
성령이 임하는 순간은 너무나 장엄한 순간이다. 귀하고 귀한 분이 오시는 순간이다. 연장소리 없이 내 몸에 거룩한 이의 전이 지어지는 순간이다. 거룩한 이의 거처가 되고 영원한 생명수의 샘이 터지는 순간이다. 엄숙한 순간이요, 환희의 순간이다. 마법의 영이 내게 오는 순간이다. 그 분만 오시면 나에게는 부족함이 없게 된다. 기적을 구할 필요도 없다. 그분이 바로 기적이다. 나는 기적의 도구가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거룩한 이의 성전이 지어진다. 바로 그것이 성령의 역사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려주고, 가르쳐 주고, 이해시켜 준다. 그가 왜 평화의 길, 사랑의 길, 영생의 길인지 알려주고, 가르쳐 주고, 그 길로 가게 하신다. 그러기 위해 우리 속에 오셨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요, 성령의 전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이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성령이 언제 임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알고, 모르고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 고정 관념 속에 가지고 있는 성령 체험 속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성령이 내가 잠을 잘 때 임했는지, 설교를 들을 때 임했는지 세례를 받을 때 임했는지 통성 기도를 할 때 임했는지 묵상기도를 할 때 임했는지 내 인생이 한탄스러워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릴 때 임했는지 잠을 잘 때 임했는지 성경을 읽을 때 임했는지 몰라도 된다. 잠잘 때 오셨는지 기도할 때 오셨는지 놀 때 오셨는지 몰라도 된다. 성령이 계시면 된다. 성령이 계시니까 영적 본능이 나오는 것이다. 영적 본능, 그것이 중요하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성령 하나님과 같이 있는 존재다. 성령 하나님과 같이 있을 때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불안이 있을 수 없다. 부족함이 있을 수 없다. 질병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옛 구습 때문이다. 옛 구습과 새것을 동시에 사는 이중적 삶의 상태라서 많은 경우, 우리가 성령을 느끼기 어려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성령이 없다면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가 없다. 우리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우리 안에 아들의 정신이 있다는 증거, 성령이 있다는 증거다. “Because you are sons, God sent the spirit of his son into our hearts, the spirit calls out, Abba, Father” (갈4:6) 할렐루야.
“너희가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넣어주셨느니라” 이보다 더 한 발견이 있으며, 이보다 더한 기쁨이 있겠는가? 이것이 진짜 우리의 신분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신분을 찾았다. “아들의 영, 아들의 정신, 아들의 마음,” 이렇게 보배스럽고 고귀한 것이 우리에게 넣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럼없이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들의 영이 있기 때문에 그 아들의 영이 우리 속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아들의 영이 있다는 것은 그분의 관심권 안에 있다는 말이다. 주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하나님은 항상 주님과 함께 계셨다. 심지어 주님이 고난을 당할 때나 조롱을 당할 때도 보고 계셨고 듣고 계셨고 함께 계셨다. 주님은 그것을 알았다. “내가 한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말이니라.”
우리는 아들의 영을 받은 존재다. 말을 토하면 그 말이 이루어지게 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다. 아버지께서 우리가 실족하지 않고 영생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경호하고, 가이드하게 하실 만큼 귀중한 존재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을 깨워라. 성령은 새 생명이다. 성령을 일으켜라. 성령은 영생이다. 성령을 흔들어 일어나시게 하라. 깨끗케 함으로 흔들어라. 정결케 함으로 깨워라. 마음의 모든 두려움과 미움을 몰아내고 성령이 일어나시게 하라. 성령을 깨우면 주님도 일어난다. 주님이 일어나면 아버지 하나님도 일어난다. 생의 배 밑에서 주무시는 주님을 깨운 것처럼 깨워라. 그래야 인생의 위기가, 기회가 된다. 불행이, 불화가, 평안 질병이 건강이 된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17.
성령 (5) : 예수님은 성령을 어떻게 소개 하셨나?
“보혜사(Counsellor)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Counselor)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요15: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요16:13)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마음)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8)
많은 사람들은 성령 사역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 고린도 전서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가 성령의 주된 사역인줄 착각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다르다. 위의 성경이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여기에는 성령이 오시는 목적 그리고 담당할 사역이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은 주께서 가르친 천상의 지식과 진리를 알게 하고, 천상의 지식과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가르침 안에, 그리고 이 우주 안에,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너무나 많은 진리들이 있다. 아직 세상에 공식적으로 들어나지 않은 법칙이나 원리 그리고 영적인 지식들이다. ‘부의 법칙’, ‘감사의 법칙’, ‘부메랑의 법칙’, ‘말의 법칙’, ‘믿음의 법칙’, ‘사랑의 법칙’, ‘용서의 법칙’, 등등.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비유고 일종의 암호와 같다. 그 가르침은 너무 넓고, 깊고, 오묘하다. 거의가 영적인 세계의 원리요 지식이다. 그 말씀 하나만 따라가도 그분의 세계를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이 설명한 보혜사 (Counselor) 란 가르치시는 분, 기억을 일으키고, 깨달음을 주시는 분, 증인, ‘생의 동반자, 어머니 같은 거룩한 파트너이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안내자,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돕는 분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보혜사 성령 없이 우리가 진리를 알 수 없고, 진리 가운데에 이를 수 없으니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진리를 알 수 없고, 성령의 도우심 없이 영생이 없고, 성령의 도우심 없이 우리 홀로 천국을 찾아갈 수 없다는 의미다.
성령은 생명 그 자체이면서 그 생명을 지키는 지킴이고, 그 생명을 보호하고 키우는 보모고, 영의 세계를 가르치고 알게 하고 깨닫게 하는 상담자고 선생이다. 그분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수 이면서 그 생명수를 우리 속에서 흐르게 하고 솟아나게 하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내 안에 계시면서도 네 안에 계시고 너와 내 안에 계시면서도 우주 안에 계시고 천상에 계시고 안 계신 곳이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우리는 육이다. 육이 영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면 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와 소통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것을 아는 것 또한 영적 능력이다.
가시적인 물질이든, 비가시적인 물질이든 그들만이 가진 의사 전달 수단이 있다. 나무는 이파리로, 곤충은 날개 짓으로, 아니면 소리로 의사를 전달한다. 우리가 모를 뿐이다. 우리가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군락을 이루며 살아간다.
육체가 없으나 육체 속에 계시는 성령은 우리의 직관을 통해 말을 한다. 그 직관은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창조 되었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녹이 슬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과의 소통을 하려면 우리의 직관을 수리해야 한다. 그래야 밖에서, 안에서 성령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 우리는 성령과의 소통을 실습하고 체험해야 한다.
성령의 말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우리의 귀란 모든 소리를 다 듣지만 하나의 소리만 들어오게 한다. 영적 세계에도 수많은 소리들이 있다. 성령의 소리, 악령의 소리, 천사의 소리, 루시퍼의 소리 등 … 영적 직관을 열면 성령의 소리만 들어온다. 처음에는 혼돈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점점 익숙해지면 아주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육의 소리는 육의 일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의 소리는 영의 일을 담고 있다. 처음에는 중요한 것부터 묻고 듣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사사로운 것까지 묻고 들으면 된다.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생길 수 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방해를 할 수도 있다. 그가 성령으로 위장하여 임할 수도 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지어다.” *육의 소리는 육신의 일을 성령의 소리는 성령의 일을 담고 있다. 성령의 일은 우리의 영혼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강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를 빛으로 키우고, 빛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다.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소리를 들으려면 마음이 맑아야 한다. 마음이 맑아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소리가 들어올 수 없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아무리 귀가 밝은 사람도 시끄러운 소음 가운데서는 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의 소리를 듣기 위해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청결케 하고 조용하게 직관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마음에서 두려움, 분노나, 오기, 시기, 질투, 원망, 그리고 갈5장 19절에 있는 육체의 일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그런 육체의 탐욕이 없어야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깨끗한 마음은 주님의 말씀이 안에 들어 있는 마음이다. “You are already clean because of the word I have spoken.” (요15:3)
무슨 말씀이 들어 있어야 깨끗한 마음이 될까? 어떤 말씀이든 주의 말씀은 날선 검과 같이 살아서 있고 운동력이 있다. 요한복음 1장에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라고 했다. 빛은 곧 주님이시다. 빛은 어둠을 몰아낸다. 마음이 깨끗하면 그 생이 빛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마음은 두려움 없는 마음이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잠을 자고 계시든, 일어나 계시든, 주님이 계시면 그 인생은 침몰하지 않는다. (갑오징어, 순찰 오토바이의 예) 마음이 깨끗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평화롭다. 사랑으로 충만하다. 감사가 넘친다. 용서가 넘친다. 마음은 행동의 원천이다. 모든 행동은 마음에서 나온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18.
성령 (6) : 성령은 어떻게 받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행2:38)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곳에서 2천년 동안 성령 받기를 갈망해 왔다. 그리고 성령을 체험한 이도 있고 그러지 못한 이도 있다. 그렇다면 왜 성령을 체험하려할까?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고 갈망하는 성령 체험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성령 체험을 위해 기도원이나 부흥회에 참석하여 산천이 무너질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기도를 한다. 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하고 안타까운 마음인가. 그리고 영성이 깊다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안수를 받기도 한다. 실제 이러는 가운데 본인들이 성령체험을 했다는 분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성령이 “어떤 계시를 주셨다” “아픈 곳을 치유해 주셨다” “방언을 주셨다” 그리고 “영적 능력이 생겼다.” “뜨거운 불을 받았다.” “환상을 보여줬다.” 라는 등등의 말을 한다. 그것이 성령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체험을 하면 속이 후련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서 열린 열매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왜? 없으니까? 자랑거리가 못되어?
참으로 안타깝고 불편한 진실이지만 계시는, 치유는, 영적 능력은, 뜨거운 불은, 환상은, 방언은 공중의 권세 잡은 영도 일으킨다. 귀신도 일으킨다. 모든 영들이 다 일으킬 수 있다. (계12;12-13)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체험한 것은 성령의 체험이라고 믿어버린다. 아니라고 하거나 성령이 아닐 수 있다고 말을 하면 믿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면 성령을 구하는 기도에 왜 악령이 내려와 성령의 흉내를 낼까? 마음이 청결하지 않아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을 받기 전 마음을 청화시켜야 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산을 흔들고 바위를 흔들 듯한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온 힘을 쏟으면서도 마음을 청결케 하는 데는 힘을 쏟지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피 흘리기까지 죄를 저항하라고 했다. (히 12장 4절) 마음을 순결하게 해야 한다.
“성령을 주시옵소서.” 만일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새 생명이 생기고 살아있는 믿음이 태어나고,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고, 성령의 열매가 열린다. 베드로는 회개하여 (인생을 정리하여) 죄 사함을 받으라 (마음에 탐욕을 없이하라) 고 했다. 인생이 회개를 통해 육적인 삶의 패턴에서 영적인 삶의 패턴으로 바꿔지고, 죄가 씻어졌을 때 성령은 임한다. 댓가 없이, 조건 없이 하나님이 보내 주신다.
성령은 파워다. 엄청난 힘이다. 불가능이 없게 한다. 그래서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하여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마음속의 탐욕 (Greed) 을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큰 일이 벌어진다. 성령의 역사로 위장한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임하게 된다. “악한 자 (무법자) 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거짓 기적과 표적과 불가 사이한 일들을 펼쳐보이리라.” (살후. 2:9-10)
우주에는 법칙이 있다. 양극의 법칙, 음양의 법칙, 인과의 법칙등은 그러한 법칙들의 예다. 성령 아니면 악령이다. 빛과 어둠이다. 빛이 없으면 어둠이 지배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회개 (엄청 중요) 없이 성령을 구하면 그 기도가 육체의 탐욕(sinful nature)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공중의 권세 잡은 영들의 주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것이 참 성령의 역사인지, 성령의 역사로 위장한 악령의 역사인지 모른다. 물론 본인은 무조건 성령의 역사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행위의 추수 때가 오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오히려 더욱 융성할 수 있다. 악한 자가 곡식밭에 가라지를 심어 놓은 것과 같다. 가라지가 곡식보다 더 무성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가짜 성령의 사역을 당장에 처리하지 않으신다. 자칫 다른 곡식들이 다치게 될까 봐서다.
사탄의 사역에 성령의 열매가 맺힐 수 없다. 열매를 맺을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도 마음을 청결케 하라 했다. 새 마음이 들어오려면 먼저 헌 마음을 치워야 한다. 마음 속 잡동사니, 이것들이 성령의 임재를 막는 암초다.
헌 마음은 탐욕과 미움과 음란이 가득 찬 마음이다. 새 생명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상식이다.
성령의 열매란 어떤 것일까? 갈라디아전서 5장 22절에 나와 있다. 사랑, 기쁨, 평화, 자비, 충성, 온유, 절제, 인내 . . . 마태복음 7장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 그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이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장 16-23)
여기서 아버지의 뜻에 주목해 보자.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 밖에 모른다. 바로 성령이시다. (고전 2:11) 성령만이 아버지의 뜻을 알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행하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이는 아버지의 뜻을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없으니 행할 수도 없다.
귀신을 쫓아냈다는 것은 권능을 행했다는 뜻이다. 주님은 이들이게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했다. 여기서 5가지 해석 가능하다: (1) 성령의 역사를 일으킨 것이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2) 성령의 역사를 일으켜도 지옥에 갈 수 있다; (3) 성령의 사역엔 반드시 좋은 열매가 있어야 한다; (4) 성령의 역사를 일으킨 성령의 사람이라 해도 성령이 떠날 수 있다; (5) 혹은 처음부터 그것은 성령의 역사같이 보였을 뿐 성령의 역사가 아니었을 수 있다.
이들이 행한 기적은 분명 성령이 일으킨 기적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들을 일으킨 자들을 불법을 행한 자들로 규정해 버렸다. 왜? 뿌리가 성령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열매가 없었다는 의미다. (현신애 권사 – 죽어서 예수님께 외면당한 이야기; 조목사도 모른다고 부인) (충격!)
주님은 성령을 어떤 능력을 행하는 도구로 사용하라고 보내시지 아니하였다. *보혜사”로 보내 주셨다. 기적은 보혜사와 동행 할 때, 마음이 청결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초대교회 시대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적에서 증명된다. 주객이 전도 될 수는 없다. 성령의 능력을 입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병자가 일어났고 많은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났다.
초대교회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은 전달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기적 없이 복음이 될 수 없는 복음, 기적이 곧 복음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수 이름만 떨어져도 기적을 일으켰던 것이다. 어디에, 어떤 때, 어떤 기적을 나타내야 한지는 누구보다 성령이 더 잘 아셨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인 성령님의 소관이다.
제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고,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기 위해 성령을 불러내지 않았다. 그들은 복음밖에 몰랐다. 회개의 복음, 용서의 복음, 사랑, 평안의 복음, 영생의 복음이었다. 그들의 생에는 복음으로 충만했다. 주의 복음은 성령의 지원을 받았다. 그래서 영생의 씨앗이 사람 가슴에 떨어지면 성령은 그곳에 가서 싹을 내고 열매를 맺게 했다.
성령의 열매가 없는 것은 좋은 나무가 아니라는 증표다. 뿌리가 주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열매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탐욕에서 나온 기적은 평화가 없고, 기쁨이 없고, 사랑이 없고, 절제가 없다. 탐욕만 있을 뿐이다.
소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다는 사람들의 이런 충만한 탐욕(갈5장 19절, 골3장 5-9, 엡5장 4-5절)은 참 성령의 역사를 왜곡 시켜 왔다. 회개 할 때 선물로 받게 되는 성령을 헌금이나, 소리나, 정열로 받는 것으로 오해 시켜 왔다. 성령을 받아서 어떤 능력을 행사해 보겠다는 탐욕으로 흥분하여 펄쩍펄쩍 뛰고, 소리를 지르는 문화를 만들었다.
우리는 성령의 표적을 구하지 말고, 우리가 성령의 표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가 되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창조하라! 용서가 있을 지어다. 평안이 있을지어다.! 사랑이 있을 지어다! 자비가, 인내가, 성령의 열매가 열리게 하라!
우리는 사랑의 포도나무다. 좋은 나무의 가지다. 앙상한 포도 나무가 되지 말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포도 나무가 되자.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19.
성령 (7) : 성령을 모시고 살 때 지켜야 할 예의
“Do not let any unwholesome talk come out of your mouths, but only what is helpful for building others up according to their needs, that it may benefit those who listen.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Get rid of all bitterness, rage, brawling and slander, along with every form of malice. Be kind and compassionate to another, forgiving each other, just as in Christ God forgive you.” (엡 4장 29-32)
많은 사람들은 성령을 구할 때 성령의 표면적인 역사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령하면 무턱대고 은사부터 생각해 낸다. 그 은사가 나타나야 성령이 임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병 고치는 은사, 권능을 행하는 은사, 예언, 방언, 귀신 쫓는 것 등등 자극적이고 이벤트적인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생각 할 때 그 이상을 생각해야 함이 본문에 나와 있다.
구약에는 성령이 왔다 갔다 하시는 영이셨다. 예수님 당시까지도 그러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했다. 약속대로 성령은 임하셨다. 이제 성령은 믿는 자에게 왔다 갔다 하는 단골손님이 아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길손도 아니다. 성령은 당일치기가 아니다. 어떤 가수의 노래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도 아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생활하시는 생의 동반자이시다. 인생의 동반자, 영생의 동반자, 사랑의 동반자, 평화의 동반자이시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가 인정을 하든, 안 하든, 우리 속에서 우리 마음을 가르치고, 인도하고, 영혼을 지키고 계시는 보혜사시다.
본문은 우리 속에 계시는 그 성령이 우리의 삶에 따라 울고, 웃고, 즐거워하고, 괴로워 한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물론 이는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표현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은 어제 웃고, 언제 괴로우시고, 언제 슬퍼하신다는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을 괴롭게 하고 성령을 슬퍼하게 하면서 건강하게 영적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 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말을 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서로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을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요약하면 나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고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를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다. 야고보서 3장6절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또 야고보서 3;9절에는 “With the tongue we praise our Lord and Father and with it we curse men who have been made in God’s likeness” 하시면서 혀를 단속하라고 명하셨다.
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가 생각하는 생각을 먼저 성령이 알게 되고 우리가 말하는 모든 말을 성령이 먼저 듣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을 주의하고, 혀를 주의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곁에 계시는 성령님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기본 예의이다. 그리고 의무다. 매사에 성령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받들어야 성령님도 우리를 위해 활동을 하신다. 우리가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심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야 우리의 삶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우리의 삶의 패턴이 바꿔지게 된다. 욕을 줄이고, 축복을 늘리고, 미움을 줄이고, 사랑을 늘리고, 용서를 늘리고, 두려움을 없애고, 평화를 늘려야 한다. 말과 행함에서 덕을 낳게 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성령을 모시고 사는가? 우리가 성령의 전이 맞는가? 우리가 예수를 주라고 믿는다면 맞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믿는다면 맞다. 단 한번만이라도 사랑을 느낀다면 성령의 전이 맞다. 그러면 그것을 인정하라. 이제 성령은 우리의 의식을 새롭게 하고, 감각을 새롭게 하고, 영혼을 강건케 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육체를 새롭게 하는 사역을 하실 것이다.
영혼이 살면 영혼에 느낌이 온다. 느낌이 없고, 영적 본능, 영적 감각이 없으면 성령이 없는 것이다. 영적 감각은 성령이 있다는 증거다. 이런 영적 감각을 가진 사람을 중생한 사람이라고 한다. (애욕, 식욕, 명예욕, 표현욕)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고, 기도하고 싶고, 형제를 사랑하고 싶고, 용서하고 싶고, 평화, 기쁨말씀이 먹고 싶고, 설교를 듣고 싶고, 교회를 가고 싶다.
봉사하고 싶고,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을 표현하고 싶고, 그래서 찬송을 하고 구제를 하고 감사를 하고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하나님 앞에서 명예를 얻고 싶고 그 분께 충성을 하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식구들이 그립고 만나고 싶어 그 처소를 찾아가게 되고 함께하게 된다.
나는 옛날에 거북이 한 마리를 얻은 적이 있다. 기르다가 힘들어서 방류하려고 강가로 가는데 강가에 이르자 고개를 쭉 내밀며 춤추는 듯한 모습을 하던 것을 기억한다. 자기 세상에 가까이 오자 본능적으로 기뻐한 것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성령이 없으면 신앙생활 자체가 무거운 십자가다. 성령 없이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겉은 신자, 안은 깡통, 깡통 신자, 집사도 장로도 권사도 마찬가지다. 불이 꺼져버린 등불, 하나님의 일 (명예)을 상관치 않는 지각없는 자, 옛 구습을 버리지 못한 자, 이들이 바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그룹이다. 이중적 영성을 가진 분들이다.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죄의 본능으로 (갈 5장 19절)교회를 어지럽히게 된다. 개혁, 투명….어쩌고저쩌고…성령이 없으니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 교회는 사람에 의해 개혁되는 곳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모두 부정적인 것이다. 교회가 이럴 수가, 목사가 이럴 수가, 교회서도 한숨 쉬며, 화내며, 인상을 쓰고 다닌다. 열심 있는 사람을 질투한다. 그 증거가 분노와 미움이다. 신앙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남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변할 때 남도 변한다. 교회는 남을 변화시키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하기 위해서 간다. 내 속에 계시는 성령은 나만 책임진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20.
성령 (8) : 성령은 임했다가 가실 수도 있을까?
계시록 2장 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는 교회다. 우리 마음에서 촛대를 옮긴다는 말은 성령을 거둬가겠다는 말이다. 우리 영혼을 버려 버리겠다는 말이다. 우리 몸과 영혼을 포기 하겠다는 말이다. 내 몸과 영혼을 방치하겠다는 말이다.
왜 촛대를 옮기겠다고 한 것인가?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성령의 전을 받치는 시금석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으면 성령의 전은 무너져 버린다. 계시록이 말해준다. “촛대를 옮기리라” 사랑은 이렇게 중요하다. 사랑이 없으면 성령이 떠난다는 의미다. 신앙인에게 사랑은 영적 심장이다. 사랑이 없으면 주님이 떠나고 하나님이 떠난다.
믿음이 육적 삶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가져오는 마차라고 한다면 사랑은 영적 삶을 위해 필요한 물자를 가져오는 마차다. 인간 마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면 성령은 힘을 잃는다. 성전이 무너져 버린다. 이것이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영의 법칙이다.
과수원 지기는 꽃이 아니라 열매를 원한다. 하나님은 열매를 원한다. 사랑은 열매다. 사랑의 열매가 있으면 희락과 평화와 온유와 자비와 절제와 인내의 열매가 있다. 하나가 있으면 둘이 있고, 둘이 있으면 모두 다 있다. 이것이 법칙이다. 열매의 법칙이다.
인간의 하나님 사랑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증거요, 표적이요, 열매이지만 또 성령을 기쁘게 하고 성령의 역사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에너지고, 힘이고, 양식이다.
인간의 참 하나님 사랑은 청결한 마음에서만 솟아난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면 청결한 사랑이 솟아나지 않는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사랑, 성령은 그 속에 잠기어 사랑의 나무가 되게 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한다.
성령이 임했다가 돌아가신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구원론에 해당한다. 예정론을 넘어 우리에게 임한 성령이 어떤 연유로든 우리에게서 떠난다는 것을 행각해 보자.
인간은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 갈 것이다. 인간의 육체 속에 있는 영혼은 미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악령이 그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탐욕적인 삶을 살게 해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 아래서 불구덩이 혹은 더 심한 대가를 받게 할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함으로 일단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는 영원히 버림받지 아니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은 그가 선택한자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이다. 정말 다행스럽고 좋은 말이다. 그 주장을 지지한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해 놓은 그 일은 누구도 실패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그리 쉽게 판단, 결론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은 사업을 부수고 몸을 주서서라도 주님께 돌아오게 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예 버려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누가 구원은 이루는 것이고, 성취하는 것이고, 신앙은 성화하는 것이고, 믿음은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성경을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칼빈의 생에도 성령이 역사했고 무디의 생에도 성령이 역사했고 요한 웨슬리의 생에도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했다. 할렐루야
어떤 교리나, 신학이나, 이론을 떠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에게 임한 성령이 우리를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부끄러운 구원을 얻는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붙잡아야 한다. 촛대가 옮겨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령이여 용소하소서, 성령이여 내 안에 영원히 계시옵소서. 성령이여 이제 부터라도 나를 주장 하소서, 성령이여 인도 하소서. 성령이여 내 마음과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
성령을 붙잡는 손은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가슴에 순결한 사랑을 품어야 한다. 순결한 사랑은 순결한 마음에서만 나온다. 세상적인 탐욕이 없는 마음, 교만하지 않는 마음, 음란, 음행, 두려움, 분노, 시기 질투, 우상숭배, 방탕, 등등…..
날마다 밤마다 탐욕을 버리고 이것으로 오염된 마음 구석을 씻어내고 깨끗이 하는 것이 성령을 붙잡는 길이다. 성령을 모시는 방법이고, 은사를 받는 방법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하나님을 뜻을 이루는 사역이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일을 하신다. 우리 영혼을 위하여, 우리 마음을 위하여, 우리 몸을 위하여 날마다 무엇인가를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속의 소리, 마귀의 소리, 탐욕의 소리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인다면 성령은 한탄을 하시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일이 반복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매일 탄식하고 있는 성령을 거둬 가실지도 모른다.
마음을 순결하게 하여 손해나지 않는다.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마음을 깨끗이 하면 엄청난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보고, 주님을 보고, 성령님을 보게 될 것이고, 육신적으로는 부해지고, 높여지고, 행복해지고, 평안해지고, 세상의 빛으로 사람들의 로망이 되고, 빛의 모델로 우뚝 높여지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이 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것이 성경에서 말한 증언이다.- 불이 되라. 그래야 높은 데에 걸릴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선물이다. 선물은 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주는 자가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것이 선물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마음’을 주시는 것처럼 인간이 중생할 때 성령을 주신다. 성령이 마음이다. 그래야 새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범사에 그 성령을 인정하며 사랑하며 함께하며 외롭게 하지 말고 탄식하게 하지 말자. 명심하라.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이다. 이웃 사랑은 용서고 평안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21.
성령 (9) : 바울이 말한 성령의 은사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 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전12: 4-11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초대교회 시대는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로 복음의 씨가 떨어지는 곳에서, 새로 생명의 싹이 돋아나는 곳에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고 그리고 그것은 곧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로 변형 (transfigure) 되었다. 바닷물이 소금으로 변형된 것처럼.
교회는 박해를 받으며 태어났고 박해를 받으며 성장했다. 박해와 성령의 싸움에서 성령의 능력이 승리하였다. 복음은 전 세계를 향해 퍼져갔다. 이때 성령의 사역은 굉장했다. “믿으면 믿는 대로 될지어다.”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자가 일어났고 방언이 터졌고 예언이 있었고 믿음이 일어났다. 주렁주렁 열매가 열렸다. 사랑의 열매, 희락의 열매, 평화의 열매 등등.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 됐다. 그러니까 콘스탄티노플 황제 등장 전까지 그랬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콘스탄티노플 등장 후 기독교 박해가 그치고, 신학이 정립되고 교회에 자유가 주어지고, 교회가 축복(?) 받아 부와 세상의 권력까지 쥐게 되면서 세상은 바뀌게 된다. 성령의 은사가 사라지고 성도들의 생활에서도 교회에서도 성령의 열매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렇다면 그동안 형체를 가진 신처럼 살아서 역사하던 성령은 왜 아무런 말씀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성령의 역사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판단해서였을까? 아니면 능력이 바닥이 나서? 인간이 사랑을 잃어버려서다. 인간 마음이 너무 추해져서 머물 수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교회는 갑자기 주어진 자유와 힘을 사용하여 그동안 맺힌 한풀이를 하려고 했다. 성령은 양심이 되어 속삭였다. “그러지 마, 그러지 마. 용서, 사랑, 평화, 이게 주께서 가르치신 복음이잖아.” 그러나 사람들은 복수심, 자존심, 교만에 사로잡혀 성령의 소리를 알아듣지를 못했다. 인간의 관심이 바뀐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성령을 시인하지 않았다. 성령이 자신의 거처를 빼앗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것을 몰랐다. 곁에 있는 줄 알았다. 같이 가고 있는 줄 알았다. 미워하는 것, 보복하는 것, 죽이는 것이 그 분의 뜻으로 알았다.
사랑이 시들고 성령의 불이 꺼지자 이곳, 저곳에서 분쟁과 싸움이 일어났다. 타락이 뒷 따랐다. 교회는 사랑이 아닌 의식과 형식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제도의 노예가 되었고 주님이 찾아 준 본래의 모습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다시 구약 제사장 시대, 성전 시대의 구습과 관습으로 되돌아 가버렸다. 그 관습들을 교회에 어울리게 개조해서 더 강한 구습을 만들어 성경 화 했다.
기독교는 계속 타락의 길을 걸었다. 인위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 각종 주문과 부적들을 도입됐다. 미신 천국을 만들었다. 영생이 아니라 복 받기 위해, 복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형태의 삶으로 변질 시켰다. 성직자는 기도까지도 사고팔았다. 이미 주님이 주신 복이고 영생인데 교회는 그것을 팔고 또 팔았다. 주님의 고난, 부활까지 팔아먹으려고 각종 방법을 동원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지배욕에 눈이 먼 동방과 서방의 지도자들은 세력다툼을 시작했다. 성직자들은 타락했다. 십자군전쟁이 일어났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되었다. 12차에 걸친 긴 전쟁으로 백성들은 피폐해 질대로 피폐 해지고 말았다. 돈이 필요한 교회는 부적, 면제부를 창안해 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분노, 미움, 원망, 결국 신교와 구교 사이의 30년 전쟁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철학이 나오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살육,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약탈,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복수,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강간, 둘 다에서 악취가 났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환경이 아니었다. 아아! 주여, 인류가 이랬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상관하지 마세요.’ 하는 것처럼)
그 후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도망 나온 청교도들이 성경대로 살자는 운동을 일으켰다. 1700년 초와 말경에 미국 제 1차 2차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천막을 치고 불을 피워놓고 회개의 복음을 외쳤다. 탐욕을 버리라고 외쳤다. 음란과 술 취함을 피하라고 외쳤다. 인간의 성결을 외쳤다.
초대교회에 나타났던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초대교회 때 나타난 방언과 치유가 있었다. 사랑이 찾아왔고, 평화가 찾아왔고, 기쁨이 찾아왔다. 교회는 1년에 50개, 100개씩 늘었다. 이곳, 저곳에서 회개가 일어났다. 성결을 결심하고 다짐했다. 더 뜨거워지려고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회는 부흥했다. 그러나 사람은 또 변했다. 마음에 탐욕이 다시 들어온 것이다. 그것들은 영성의 옷을 입고 침투했다. 은사는 있었는데 성령의 열매는 줄어졌다. 양적 부흥은 있었는데 각종 불의의 열매들이 열리곤 했다. 마음을 청결케 하지 않아서였다. 그들 속에 세속적 탐욕이 들어서였다. 이것들이 성령의 사역을 오염시켰다. 교만과 미움과 분노, 시기와 질투와 분열과 분쟁과 음행과 향락과 방탕이 교회에 밀어닥쳤다.
성령 운동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평양에서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흥분했다. 성령의 불이 붙었다. 교회는 양적으로 부흥했다. 그러나 그들의 충동적인 회개는 마음을 청결케 하지 못했다. 마음 관리에 너무 무지했다. 잎사귀는 무성하나 열매가 없었다.
사탄은 탐욕이 들어있는 마음에 맞불을 지른다. 타락의 불이다. 세속적 탐욕은 기름이다. 성직자도 타락한다. 평양 교회의 타락상을 전한 한 목사님은 바로 그 벌로 (현 성초 목사 증언) 6.25가 터졌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하나님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정도로 평양 교회의 타락상이 처참했다는 것이다.
그 후 남한에선 박태선이 일어났다. 용문산 나 운몽 목사의 성시 화 운동, 조 용기 목사의 성령운동이 일어났고, 성령의 불길이 불탔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교회에 세속과 탐욕의 불이 타기 시작했던 것이다. 교회가 배가 부르게 되자 분쟁과 싸움을 시작했다. 성령의 소리, 주님의 소리, 사랑의 소리 대신 사람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령의 열매는 우수수 떨어져 버리고 악령의 열매만 주렁주렁 달리게 된 것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22.
성령 (10) : 성령의 열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15장 8절)
성령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다. 모든 생명의 역사는 열매를 맺기 위한 꽃이다. 꽃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보여주는 빛이다. 빛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빛이다. 거대한 빛이고, 모든 빛이 근원이다. 빛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빛이 있다. 그리고 빛이 있는 곳엔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고, 자비가 있고, 온유가 있다.
나무는 왜 있나? 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 꽃은 왜 피나? 열매를 맺기 위해, 생명은 성장하기 위해서 있다. 물론 꽃나무도 있다.
은사는 소중하나 열매가 아니다. 방언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방언) 도 소중하나 열매가 아니다. 방언은 꽃이다. 기도는 방언으로 하든지, 말로 하든지 하나님께 하는 기도다. 우리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매가 없다면 그 방언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열매가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열매 없는 기도도 죽은 기도다.
사탄은 예수님도 시험했다. 예수님의 마음이 청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을 무너뜨리지 못한 사탄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계속 주님의 사역을 방해 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심지어 베드로 속에서, 가룟 유다를 통해 계속 방해 했다. 탐욕을 이용했다. 사탄은 기회만 있으면 우는 사자처럼 차고 들어온다.
성령의 불이 붙은 곳에 사탄은 향락의 불을 붙인다. 탐욕 때문에 인간의 의지는 힘을 못 쓴다. 인간의 의지가 없는 곳에서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다. 향락의 불이 교회로 옮겨가서 교회의 본질을 바꿔버린다. 신앙의 본질을 바꿔버린다. 왜 바꿔질까? 세속적 탐욕이 있어서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아서다.
기본기가 부족해서 사탄이 불을 붙이면 탄다. 그래서 미국은 실패했다. 도덕적 몰락으로. 지금은 일부 TV 목사들이 성령대신 마약을 사용한다. 신령하다는 사람들, 얼굴이 지옥에서 막 나온 분들처럼 흉측하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다. 처음에는 성령의 역사처럼 보였던 것들이 종국에는 본색을 드러낸다. 늑대, 악의 열매를 달고 있다. 더 이상 그들이 그들의 정체를 숨기지 못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악령에게 속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는 없다. 왜 교회가 몰락해 가는지 이유를 모른다. 교회는 숫자를 더 모으기 위해 축복을 팔고, 은사를 팔고, 기도를 팔고, 하나님이라도 팔 기세다. 숫자가 있어야 과시할 수 있어서다. 과시는 경쟁적 마음에서 나온 탐욕이다. 빛은 과시하지 않아도 빛난다.
교회는 회개도 없이 숫자를 모으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래서 열린 예배를 드리고, 세상 노래를 개조해서 가스펠로 발전 시켰다. 세상과 가까워지기 위해 거룩함과 성결함을 포기 했다. 숫자를 모으기 위해 별별 짓 다 하는데도 교회는 계속 피폐해 간다. 세상과 가까워지고 세상과 친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상과 더불어 올림픽 때는 붉은 악마까지 찬양했다. 서슴치 않고 사탄과 행음을 한 것이다. 교회는 세속의 문화에 잠식당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영의 문화권 아래 있는 이 시대 젊은이들은 결혼을 안 하고 결혼을 해도 힘들다는 이유로 애 낳기를 피한다. 그것이 문화가 되었다. 음지에 있던 동성연애가 밖으로 나와 판을 친다. 동성애는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주적인 문제다. 동성의 관계는 우주의 근본 법칙인 생명 잉태를 할 수 없는 관계, 하나님의 생명 창조 사역에 참여 할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비양심이 양심을 이기고, 부도덕이 도덕을 이기고, 악이 선을 이기는 시대를 만들었다. 그동안 모든 악은 감추어 졌고 그들의 정체는 여러 가지 선한 모양으로 둔갑을 했다. 교회의 빛이 꺼져버렸다. 사탄의 문화가 교회문화를 점령했다. 왜? 순결하지 않아서였다.
사람이 만든 문화와 사람이 만든 생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복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축복이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를 부르짖는다. 은사만 받고자 한다.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열매에는 관심이 없다. 교회는 성령의 꽃과 열매도 구별을 못한다. 여기서, 어떻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 날 수 있겠는가? 무슨 열매가 맺히며, 무슨 생명활동이 있겠는가?
성령의 사역이 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일까? 마음을 씻지 않아서다. 교회가 청결한 마음을 가르치지 않아서다. 그래서 사도들은 편지로 청결한 마음과 청결한 사랑을 당부했다.
탐욕은 음행이다. 우상이다. 탐욕은 암초다. 미움, 분노, 두려움, 시기는 모든 악의 근원이다. 이런 암초들이 있는데 성령이 머물 자리가 있겠는가? 성령이 없는데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겠는가?
성령의 열매는 더러운데서 열리지 않는다. 이것이 법칙이다. 탐욕이 있는데서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성령의 꽃은 죄악 위에서 피어나지 않는다. 피어나면 그것은 성령의 꽃으로 위장한 악령의 꽃이다.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꽃이다. 곧 불행의 향을 뿜어낸 후 시들어버릴 꽃이다.
왜 탐욕이 있는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나온 믿음이 없어서다. 믿음은 십자가에 뿌리 해야 한다. 감사에서 성장해야 한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은 없다. (고전 6장)
선물을 받는 것은 손이다. 선물 받을 손은 깨끗해야 한다. 귀한 선물을 받을 사람은 깨끗한 손과 깨끗한 그릇을 준비한다. 비가시적인 선물은 마음으로 받는다. 그리고 마음에 보관한다. 그러므로 비가시적인 선물을 받을 마음이 있어야 하고 쟁여놓을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살아있는 생명의 선물이시다. 깨끗한 마음, 깨끗한 보관 장소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회개를 외쳤다. 마음을 청결이 하라는 말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23.
성령 (11) : 사탄의 변장술
고후 11장 14절 “And no wonder, for Satan himself, masquerades as an angels of light. It is not surprising, then, if his servants masquerade as servant of righteousness”
악령의 실체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아니면 우리 안에 너무 깊숙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다. 그의 정체를 모르거나 그의 실체를 무시하다가는 그의 밥이 될 수 있다. 그는 외부로부터 오기도 하지만 내 속에서 일어나가도 한다. 전쟁터는 항상 내 안이다. 내 안을 두려움과 분노의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승리의 나팔을 분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알아야 대처 할 수 있다.
사탄은 빛의 천사로 위장하여 활동하고 사탄의 종들은 의의 종으로 위장하여 활동한다. 그의 정체는 쉽게 파악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그에게 잘 속게 된다. 이 말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 사탄과 의의 종으로 위장한 사탄의 종이 우리 주위 아니면 우리 의식 속에 이미 들어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너무나 많이 악의 세력들에게 속았을 수 있다는 의미다. 광명의 천사는 우리 주위에 많다. 너무나 많다. 의의 종도 많다. 아니 거의 모든 이들이 의의 종이다. 암시적이든 아니면 표면적이든 모두 자신들을 의의 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에게 아주 돈 많은 매형이 있었다. 그도 마지막엔 주님을 의지한 채 갔지만 그가 한 때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도 어디선가 “장로님” 혹은 “집사님” 혹은 “목사님” 하는 소리가 들리면 식사를 중단하고 식당을 나갈 정도였다. 왜? 사업하면서 가장 악한 짓을 하는 이들이 다 장로, 집사, 목사였다고 내게 얘기 했었다.
교회에서는 씀씀이 좋고 헌금 많이 하는 장로가 사회에서는 교묘한 방법을 동원해 가난한 자의 재산을 갈취한다. 교회는 그렇게 쌓은 부를 축복으로 해석해 준다.
교회에서는 천상의 소리를 찬양하는 집사가 세상의 야한 조명 아래서 허무와 절망과 어둠을 담은 슬픈 음률을 뿌린다. 세속의 향락을 영화로 해석하고 음란과 음행을 사랑으로 해석한다. 뱃속에 있는 아이에 대한 살인을 자유와 권리로 해석한다.
교회서는 사랑과 평화와 용서와 성령의 소리를 외치고 다른 쪽에 가서는 미움과 분쟁과 불안을 외친다. 비둘기 같은 성령의 힘을 받아 증오를 심고, 불같은 성령을 받아 갈등을 심고, 경쟁과 쟁취를 선동한다.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은 선이고 남이 하는 모든 것은 악이다. 자기가 하는 기도는 의인의 기도고 남이 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기도다. 예수님의 가르침 위에 걸터앉아 탐욕을 외치고, 복수를 외치고, 비난을 외치고, 판단하고, 저주를 외치면서 의라고 한다.
어떤 장소에서는 신령한 영의 사람으로, 어떤 장소에서는 육체를 가진 정욕의 사람으로, 낮에는 정의의 사도로, 밤에는 불의의 사도로, 여러 개의 몸과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들 속에는 어떻게 해서 세속적 속성과 영적 속성이 혼합된 이중적 영성이 들어있게 된 것일까?
탐욕 때문이다. 사탄은 탐욕을 타고 들어와 먼저 탐욕을 더 탐욕스럽게 한다. 탐욕이 있는 상태서 거룩한 성령을 구하면 사탄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탄이 있는 곳에서는 사탄의 꽃이 피고 사탄의 열매가 맺힌다. 꽃은 아름답게 위장할 수 있지만 열매를 위장을 할 수가 없다.
“받아봐, 받아봐, 그래야 최고가 돼, 모두가 우러를 거야, 구하면 반드시 받게 돼있어, 성경에 그랬잖아, 받아서 이적을 행하고 기적을 행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봐, 교회도 차고 넘치게 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승부가 없어, 평생 이렇게 살 거야? 받아봐, 받아봐.”
마음이 깨끗지 않으면 성령으로 위장한 악령이 임한다. 그러나 분별을 못하게 된다. 탐욕이 있는 상태서 성령을 받으면 박수무당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성령 안에는 최고도 없고, 최하도 없다. 성령 안에는 계급이 없다. 신분이 없고, 높고 낮은 것이 없다. 성령 안에는 경쟁이 없고, 네 것, 내 것이 없다. 없는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심령의 가난이다.
성령은 주님의 사랑을 타고 들어온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붓는다.(롬5장 5절) “두려워하지 마. 걱정하지 마. 다 그분의 일이야. 용서해, 용서해, 이해해, 이해해, 사랑해, 사랑해, 평안해, 평안해 양보해, 양보해. 청지기일 뿐이잖아. 하나님의 아들은 다 그래야 하는 거야”
그래서 초대 교회에는 어디서나 사랑이 넘쳤다. 풍성한 성령의 열매다. 사랑을 품은 사도들의 사역이 생명의 꽃이 되었다. 그들이 성령의 열매가 되였다. 성령의 표적이 되였다.
행 7장에서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소리쳐 말하되…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스데반은 성령의 나무였고, 성령의 꽃이었고, 성령의 열매였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하늘을 바라보자 주님은 하늘 문을 열어주셨다. *-주님을 바라볼 때 하늘 문이 열렸다. 육체의 감각적 고통이 소멸되었다. 고통이 감히 접근도 못했다.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나타났다. 어디서나, 누구든지, 성령을 품은 자들이 움직이는 곳에서 나타났다. 누구나 성령의 사람이 되면 바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현상이다.
사랑할 수 없는 곳에서 사랑하는 일이, 평안 할 수 없는 곳에서 평안이, 온유할 수 없는 곳에서 온유가, 자비로울 수 없는 곳에서 자비가, 인내 할 수 없는 곳에서 인내가, 충성할 수 없는 곳에서 충성이, 절제할 수 없는 곳에서 절제가, 이것이 바로 의심할 수 없고 부인 할 수 없는 참 성령의 역사고 성령의 활동이다. 이것을 구해 봤는가? 목이 터져 버맇 만큼 간절하게 구해 보았는가?
이런 고귀한 것을 뒤로 하고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무엇에 집착되어 있는가? 왜 처음 믿을 때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셨을까?
롬6:장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옛 자아가 십자가로 죽지 않아서다.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다. 새 생명을 받아 새로 태어나려면 주님과 함께 옛 육체를 장사지내야 한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새로 태어난 사람은 새 마음, 새 정신(spirit)을 갖게 된다. 하늘이 준 정신이고 하늘이 준 마음이다. 새 마음, 새 정신은 탐욕이 섞이지 않은 순결한 마음이다. 천상에서 오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으면 누구를 미워 할 수도, 싸울 수 없다. 화를 낼 수 없다. 성령 안에는 다툼이 없기 때문이다, 시기, 질투, 음란, 호색, 우상숭배, 더러움, 다툼, 방탕등, 이중적 영성을 가질 수 없다. 쓴물과 단물을 낼 수 없다. 이것이 성령의 표적이고 이적이고 기사고 열매다.
빛은 빛이고 등불은 등불이다. 한번 빛이 되면 어디서나 빛이며 한번 등불이 되면 어디서나 등불이다. 교회에서는 광명의 천사고 세상에서는 어둠이 될 수가 없다. 교회에서 광명의 천사면 세상에서도 광명의 천사다. 기도할 때는 의의 종이고 세상에서는 어둠의 전사 일수가 없다. “너희 착한 행실을 모든 사람에게 비취게 하라”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24.
성령 (12) : 악령의 표적
마 24장 24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사탄은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맞불을 놔서 성령의 열매가 열릴 수 없게 하는 것으로서 끝내지 않는다. 그가 성령의 역사를 모방하여 각종 기적과 이적과 기사를 펼쳐 보인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현상을 가지고는 그 현상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알려고 해서도 아니 된다. 불치의 병이 완치 되어도, 귀신이 나가도,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진동을 해도, 그것으로 그 현상의 뿌리를 알 수가 없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모두 가면을 썼고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안이 밝아 그들의 실체를 봤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그들을 피하는 길이 이기는 길이다. 왜?
그들이 일으키는 기적과 표적을 보자.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기적과 표적에는 상표가 없다. 이들이 일으키는 이적과 기사에도 상표가 없다. 일단 어떤 기적이 일어나면 믿는 사람들은 그 상표 없는 기적을 성령의 기적으로 간주해 버린다. 성령의 이름이 동원되고 주님의 이름이 동원되면 무조건 하나님의 역사로 간주해 버린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가 일어나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이 움직이고 환상이 일어나고 예언이 터지고 능력이 나타나고 방언이 터지기 때문이다. 이런 엄청난 표적과 기사로 다가오는 거짓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들을 우리가 무엇으로 저항하며 무엇으로 분별한단 말인가. 그러나 정말 그들의 정체를 알고 싶다면, 마음을 비우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그래 저것의 순수한 열매는 뭔가? 쉽게 성경으로 검증이 되겠는가?
사탄은 왜 악인가? 그는 탐욕으로 천사에서 사탄으로 전락하였다. 아니 그는 탐욕을 품은 천사다. 하나님의 보좌에 오르려다 실패한 광명의 천사요 탐욕의 천사다. 그래서 그는 탐욕의 영이다. 모든 탐욕의 어머니는 사탄이다. 그것이 어디에 있건 상관이 없다. 탐욕의 뿌리는 사탄이다. 탐욕은 인간에게 불행을 준다. 그렇다면 그의 존재 목적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선과 의를 대적한다. 그는 먼저 인간의 육체적 탐욕을 이용하여 인간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방해한다. 사랑을 방해하고, 평화를 방해한다. 기회만 있으면 인간의 마음에 미움을 심고, 불안을 심고, 질투를 심는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표적이나 기적을 가지고 나타났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의 행적에 무엇이 남느냐가 중요하다. 그가 왔다간 자리 아니면 그가 머물고 있는 자리에 무엇이 열리는지가 중요하다. 그가 피어낸 화려한 행위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그의 정체는 악이다. 주저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는 마음이 깨끗할 때만 알 수 있다. 아무런 선입견도 없을 때, 평화 할 때 그때만 숨어 있는 악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But among you there must not be even a hint of sexual immorality or any kind of impurity, or of greed, because there is improper for God’s Holy People.”(엡 5장 3절)
바로 우리가 품지 않아야 할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이 사탄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사역이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일이다.
“Don’t you know that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God’s spirit lives in you? If anyone destroys God’s temple God will destroy him: for God’s temple is sacred, and you are that temple.”(고전 3장 16절)
우리로 하여금 탐욕을 품고, 미움을 품고, 두려움을 품고, 시기와 질투를 품고, 교만을 품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 사탄의 사역이다. 거룩한 우리 마음이 품지 않아야 할 가증한 것들을 품게 하는 모든 것은 사탄의 사역인 것이다.
나는 어떤 젊은 목사님이 한국 기도원은 귀신의 소굴이라고 외친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그런 설교를 하실까. 나는 그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설교의 수혜자가 사탄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 기도원은 초대 교회시대 신앙의 박해를 피해 사막이나 깊은 산속 동굴로 들어가 기도로 살아보려던 성도들의 은둔 생활에서 기원되었다. 예수님도 조용한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던 습관이 있었다. 일부 신앙의 선조들은 박해를 피하여 조용한 장소에서 외부의 방해 없이 하나님과의 교감(communion)하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운둔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것을 영성 생활이라 하였다. 그들의 영성 생활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영성이 충만한 수도자 혹은 은둔자들을 스승으로 모시며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그런 생활 속에서 많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과 평화 그리고 사랑을 누렸다. 한때 수도원이 부흥 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기독교 박해기가 끝났을 때도 그리고 교회가 타락하여 교회라고 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Dark Age)이 되었을 시기에도 그런 공동체 생활은 계속되었다. 그 중에는 스콜라 철학을 공부한 사람, 법학을 공부한 사람, 라틴 문학을 공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공동체 생활이 수도원으로 명명되었다 그렇게 해서 수도원은 영성생활 뿐 아니라 철학과 신학, 문학, 법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게 되었다.
종교개혁 후에도 은자들의 영성 생활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후 신교는 기도원으로 구교는 수도원으로 불러지게 되었다. 기도원이든, 수도원이든, 그 뿌리는 영성 생활이다. 수세기 동안 교회 조직이나 제도 밖에 있는 그들에게서 너무나 많은 기적과 이적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어쩌면 기독교가 이만큼 지탱된 것도 그분들의 기도와 그분들에게서 열린 기적의 열매의 덕택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 중에는 문제가 생긴 수도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음욕과 탐욕이 틈타서다
지금도 기도원은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갖기 원하는 분들이 기도하는 곳이다. 한국의 기도원도 아마 그런 맥락에서 만들어 졌을 것이다. 물론 그 목사님이 지적한대로 탐욕이 가득한 곳, 무당 굿하는 형태로 변형된 곳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하는 곳에선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 중에는 개인적인 것도 있고 대중 적인 것도 있다. 그러나 모두 싸잡아 귀신의 역사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성령의 역사는 너무 다양하고 신비하기 때문이다.
본래 한국 분들도 6.25 그리고 가난이란 굴레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잠재의식 속에 물질이나 명예, 혹은 권력에 대한 탐욕이 뿌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사탄은 그 탐욕을 타고 성령으로 위장하여 그들에게 임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타락한 사탄처럼 탐욕으로 그들을 타락시켰을 수도 있다. 박태선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들이 방언도 팔고, 기도도 팔고, 안수도 팔고, 각종 은사도 팔고, 성령도 팔았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사도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베드로에게 돈을 주고 성령을 사려한 시몬이 바로 그 사람이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 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행 8:19) 그래서 기도하는 곳에 탐욕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한국도 성령이 역사처럼 보이 것들이 일어났던 곳에 많은 부작용(악령의 열매 탐욕의 열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류를 갈급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 모이는 모든 기도원이 마귀의 소굴이 될 수는 없다. 마귀는 탐욕이 있는 곳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어느 단체, 어느 기관, 어느 민족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다. 각 개인의 하나님이고, 각 개인의 주님이시다. 탐욕이 없는 청결한 기도원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기적의 장소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성산이 될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같다. 반대로 성령의 열매가 없는 표적이나 이적은 악령의 역사다. 그 중에는 성령의 역사로 자평하는 기적이나 이적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열매가 없으면 그 근원은 악령이다. 이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성령은 빛이라서 너무 밝은 빛이라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에서도 어둠은 함께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침투할 틈새를 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성령의 은사가 꽃피는 곳에, 성령의 열매가 열리는 곳에 어둠이 머무를 수가 없다. 우리가 성령의 불이 되고 성령의 빛이 되면 된다. 탐욕이 없으면 사탄이 맞불을 놓을 수 없다.
빛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은 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으면 사탄은 들어 올수 없다. 미움이 없으면 사탄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자는 담대했고 평안했고 기뻐했다. 성령을 받은 자들은 탐욕의 전도자가 아니라 사랑의 전도자로, 용서의 전도자로, 평화의 전도자로, 위로하는 자로, 가르치는 자로, 진리의 안내자로, 살기를 자처했다. 할렐루야.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25.
성령 (13) : 악령의 열매
엡2장 1-2절 “As for you, you were dead in your transgressions and sins in which you used to live when you followed the ways of this world and of the ruler of the air, the spirit who is now at work in those who are disobedient.”
왜 성령을 구할 때 탐욕이 없어야 된다고 했는지 다음 사건을 보면 이해를 한다. 영성이 충만하다는 어떤 교회 구역예배가 있었다. 그 예배에서 신령한 목사로 자타가 공인하는 어느 여자 목사가 한 신도를 치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한 사람을 눕혀놓고 기도 한 한 대목을 녹취한 것이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 “성령께서 말씀하시길 독사가 자궁 속에 다섯 마리가 들어있다고 한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두 마리는 나가고 3마리 남았다.” “그것마저 쫓아내시지요.”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성령께서 한 마리는 기도 제목으로 남겨 놓으라고 말씀 하신다.”
이것을 성령의 역사다 아니면 악령의 역사다 평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영성(?)이 충만한 이 여자 목사분의 신령한 안수(안찰)기도는 불안과 초조 그리고 두려움의 열매를 맺고 끝났다는 것이다. “생쥐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 마리는 기도 제목으로 남겨 놓으시란다.” 비합리 비 성경적 치유행위에 성령의 열매가 없다. 기쁨이 없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기쁨도 없다. 그러나 영적 상식이 없는 자들은 속는다. 그곳에서 사용하는 성령이 이름, 예수님의 이름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 속에 그저 머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역사하기 위해서 오신다.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축복을 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역사하신다. 성령의 역사에는 성령의 은사가 핀다. 그것은 성령의 흔적이요, 발자취요, 운기이다. 다음엔 열매가 맺힌다.
“네 이름이 뭐냐?” “군대” “언제 들어갔느냐?” “몰라” “나가라” “안 나가” “ 왜 안 나가?” “무서워” 이런 대화에 대한 판단은 영적 상식만 있어도 가능하다.
영성이 충만하여 아주 신령하다는 한 목사님이 방글라데쉬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는 어느 목사 사모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벌인 치유 기도의 한 대목이다. 이 사모님은 갈비뼈 17개가 부러지고 창자가 터져서 돌아가셨다. 그분의 시체는 눈으로 불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 치유사역(?)에 두 명의 목사와 한 명의 집사가 동참 했는데 모두 성령을 충만히 체험한 분들이었다. 그분들이 성령을 충만히 체험했다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그 곳에 참석했던 한 참석자에게 왜 사람이 죽어 가는데 안수를 중단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었다. 그는 죽어가는 줄을 몰랐다고 대답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는 질문을 할 때는 사모님의 목소리가 허스키한 보이스로 바꿔져서 “군대!” 라고 대답했고 누가 들어도 영락없는 귀신의 소리였다고 했다. 또 사모님은 어떤 고통이나 괴로움을 표현하지 않았고 안수를 할 때 “거기, 거기, 아니 아래로 간다….다시 위로 간다.” 등 귀신이 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까지 알려주며 박자를 잘 맞추어 줬다는 것이다. 귀신이 안수를 하는 자와 안수를 받는 자 안에서 원맨쇼를 했던 것이다.
이 치유사역에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치유 자체가 성령의 열매가 될 수는 없다. 열매는 감정의 거품이 가라앉은 후 열리기 때문이다. 이분들의 치유사역에는 평안과 사랑이 아니라 죽음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것이다 왜? 탐욕 때문이다. 누구의? 안수 자들의 탐욕이다. 무엇이? 집착이. 귀신을 쫓아내겠다는 집착, 하나님과 그 사람 그 영혼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헤아리기에 불가능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무지, 과시옥, 교만, 이것이 이런 불행한 결과를 맺히게 했다.
영성이 아주 충만하다는 목사의 영성이 충만한 제자가 일으킨 또 다른 성령(?)의 역사를 알아보자. 이 사건 역시 미국 사회에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 “귀신아 물러가라” “악한 마귀야 물러가라” 원수 마귀야 물러가라“ 성령을 충만히 받아 영성이 충만하다는 한 여자 목사가 소련에서 온 제자들과 함께 정신 건강이 안 좋은 한 여자를 뉘여 놓고 안수 기도를 시작했다.
이 안수하는 목사가 얼마나 유명(?)했으면 타 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까지 왔겠는가? 그런데 성령을 충만히 받은 그 여자 목사의 안수를 받은 그 여자도 갈비뼈가 부러지고 창자와 간이 터져서 죽었다. 죽은 것은 그렇다 쳐도 그 다음이 더 문제였다.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죽은 그 여자가 다시 부활 할 것이라고 믿고 5일 동안 시체를 그대로 방치한 체 기도만 한 것이다. 시체가 이미 썩어 악취가 나고 있는데도 부활할 것이라고 믿은 그 믿음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만 문제는 열매다. 그녀의 성령 사역에도 폭력과 죽음, 불안, 초조, 두려움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것이다. 성령의 열매인 평안의 열매도 사랑의 열매도 희락의 열매도 자비의 열매도 온유의 열매의 흔적도 없다.
왜 자기 자신은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성령으로 위장하여 악령이 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이것은 너무 위험한 영적 교만이다. 사탄은 예수님까지 공격을 했다. 우리는 성령 충만, 영성 충만, 능력 충만의 환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같다. 앗차 하는 순간 사탄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청결하면 성령은 충만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가 걸아가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 자체로서 빛일 뿐이다.
또 “네 이름이 뭐냐?” 선지자, 예수님, 성령을 흉내는 과시욕이 아일까? 자기를 나타내려는 추악한 영적 탐욕이 아일까? 우리는 예수님도 아니고 바울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니고 요한도 아니다. 그 분들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고 그들의 마음은 수정처럼 맑았고 청결했다. 그래서 성령을 품었고 하나님을 보았다. 그분들은 한 사람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시간 환자를 붙들고 몸부림치지 않았다. 병이 났든지 아니 났든지 한 번의 기도로 끝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사탄은 자연히 사라진다. 안수를 하려면 이런 상태가 되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그 근처라도 가야 한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The prayer of a righteous man is powerful and effective” 나와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흉내 내고, 성령님을 흉내 내고, 바울을 흉내 내는 것은 처음부터 탐욕이다. 선악과를 따 먹은 하와의 마음이다. 주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나타내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는 추한 영적 탐욕이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열릴 수 없다. 설령 병이 고쳐지고 귀신이 쫓겨나고 어떤 이적이나 기사가 나타났다고 해도 성령의 열매들이 열리지 않을 것이다. 열매가 없으면 그가 일으킨 기적은 하나님과 무관하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 하느니라”
안수는 영성을 자랑하는 퍼포먼스가 아니다. 겸손하게 주의 사랑을 가지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게 하는 것이 안수다. 치유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안수 받는 사람의 믿음이 하고 성령이 한다.
안수 자는 그냥 뿌리는 자의 경계를 넘어서면 안 된다. 주권을 하나님께로 넘겨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넘겨 드려야 하나님의 역사가 된다. 그분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치유를 하시든지, 그대로 놓으시든지, 하나님 뜻대로 하시게 해야 한다. 제 3자인 내가 집착하면 안 된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26.
성령 (14) : 감정 신앙의 실체
“사랑하는 자들아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영들이 하나님께 속 했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일 4장 1절)
역시 은혜가 많고 성령이 충만하다는 바로 그 교회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10대 이이들이 두 손을 높이 들고 두 눈을 감고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불러댔다. 누가 뭐래도 신앙이 좋아 보이는 학생들이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한 한국 할머니와 손녀만 있는 집을 털러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을 묶어놓고 못쓸 짓을 했다.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좋으신 하나님을 노래 할 때 이들은 성령의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몇 시간도 안 되어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왜? 탐욕 때문이다.
미국에서 태군 살인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 역시 교회 다니는 학생들이 포함된 그룹의 학생들이 중국인 친구를 야구방망이로 때려죽인 사건이다. 더구나 완전히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피해자를 산채로 암매장해 버린 사건이다.
그동안 교회는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 왜 교회는 이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가르쳤을까? 마음을 청결케 하는 것이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찬양을 드리는 것 보다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형제를 사랑하라.” “형제를 용서하라.” “일흔 번 씩 일곱 번 씩이라도 용서하라.” “온유 하라.” “겸손 하라.” “마음을 청결케 하라.” “의를 사랑하라.”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믿음의 꽃이다.
점쟁이들 얘기를 들으면 귀신은 실컷 써먹으면서도 협박하고 괴롭히고 나중에는 비참하게 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성령은 써먹고 성화시키고 존귀케 하여 끝까지 영광을 받으신다. 성령이 어떤 방법대로 역사하시든 열매는 같다. 당장 두려움이 사라진다. 평안하다. 사랑이 넘친다. 영혼 구원의 열정이 생긴다.
사람의 삶에서 두려움이 사라지면 어떤 결과가 올까?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 높여 가로되”(행2:14) 그 비겁하던 베드로가 성령에 의해 말씀의 은사를 받아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다. 성령이 안에 계시면 수치나 두려움 사라진다. 성령 안에는 수치심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시대 안디옥의 감독 폴리갑이라는 분이 있었다. 이분은 안디옥에서 체포되어 로마의 원형경기장으로 호송되어 관중들의 오락거리로 처형될 분이었다. 그런데 처형 전에 이분이 나이가 많고 풍기는 인품이 깨끗하여 재판관은 살려주고자 했다. 그래서 “당신은 나이가 많아 살려주고 싶으니 예수를 한번만 부인 하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감독은 “내가 86살 먹도록 단 한 번도 나를 배반한 적이 없는 나의 왕을 배반하라니 말이 되는 소리요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소“라고 대답했다. 호의를 베풀어 줬는데도 그 호의를 무시한 감독에게 화가 난 재판관이 “그렇다면 당신을 장작불에 태워 죽이겠소.” 라고 말했다. 그러자 폴리갑은 “재판관이 붙인 불은 잠깐이겠지만 지옥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마음에 성령을 품었다는 증거다. 로마의 귀족 페페투아스는 막 태어난 젖먹이 아이가 있는 엄마였다. 그녀의 친정 식구들이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신앙을 버리라고 종요한다. 그러나 그녀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는데 문제는 원형경기장에서 일어났다. 짐승들이 그녀를 공격하지 못한 것이었다. 두려움이 없으면 악은 힘을 잃는다.
펠라시스타스의 순교도 그랬다. 그녀 역시 짐승이 달려들지 못하자 병사가 칼로 죽였다. 그것은 육체의 눈으로 볼 때 죽음이 맞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보면 죽음이 아니다. 이들의 영혼은 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영혼은 천사들이 호위 속에서 성령의 손을 잡고 어차피 시간에 따라 늙고 시들어가는 육체를 벗어두고 천국의 영광에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리라”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 그 믿음대로 되었다. 그들은 기뻤다. 평안했다. 비록 박해와 핍박이 있었지만 박해와 핍박이 없었다. 항상 감사했다. 감사로 악을 삼켜버렸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사랑이 있었고 평안이 있었다. 나눌 줄 알았고, 줄줄 알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줄 알았다.
지금은 박해의 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더 심한 공격을 받고 있다. 사람 안에는 탐욕이 있고 분노가 있고 미움이 있어서다. 사탄은 예나 지금이나 그것들을 이용한다. 세속적 향락으로 공격을 한다. 음행으로 공격을 한다. 미음으로 공격하고 있다. 경쟁심으로 공격을 하고 있다.
사탄은 마음이 깨끗한 곳에 핀 성령의 역사를 한 번도 오염시키지 못했다. 사탄의 공격 걸이는 정해져 있다, 갈보리에 묻어버린 우리 옛 구습이다 그것을 꺼내와 그것으로 유혹을 한다. 옛 구습에 미련이 없으면 사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가 한 가지 깨우쳐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동안 없는 것처럼 계시던 성령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보지 못하는 방법으로 거룩하게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처럼 흉측한 양심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리고, 일으키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정체를 밝혀내고, 각종 기적과 표적과 기사로 위장한 사탄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음, 감정, 신앙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다. 영성이다. 마음이 청결하면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 우리 마음을 볼 수 있고 우리 행동을 볼 수 있다. 우리 마음에 육체의 정욕이 머물게 하지 말자. 그래야 마음이 맑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