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11.
평화 (1)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4-22)
주님의 복음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평화의 복음이다. 이 복음을 주기 위해 주님이 오셨고 성령님이 오셨다. 이 복음을 위해 성경이 존재하고 교회가 존재한다.
교회는 평화를 전해야 한다. 평화는 영생과 함께 있는 도그마다. 교회는 축복을 나눠주고 축복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평화를 찾아주고, 축복을 일깨워주고 성장케 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 속에 있는 양심을 일으키고,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을 일으키고, 우리 속에 있는 능력을 일으키는 것이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평화를 찾아 헤맨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평안과 기쁨을 느껴보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마약을 한다는 이들도 있다. 편안히 잠을 한 번 자보기 위해 수면제를 먹는다는 이들도 있다.
초대 교회는 사랑과 평화를 전했다. 소망을 전했다. 이것은 시간과 시대와 나라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복음이고 주님이 주신 복음이다. 그래서 그 많은 박해 속에서도 복음은 널리 널리 전파 되었다. 그러나 요즈음 교회는 평화의 복음에 너무 소월하다.
평안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평화를 얻어야 한다. 그 복음은 세속의 탐욕이 있는데 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 청결한 곳, 마음이 의로운 곳, 마음이 겸손한 곳, 심령이 가난 한 곳, 바로 이런 곳이 있다면 스스로 피어난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다.
“가슴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게 되리라” 마음을 청결케 하고 탐욕을 제거하고 겸손 한 이에게 서 생수의 강이 넘칠 것이다. 성령의 표적을 구하지 말고 스스로 성령의 표적이 되려고 할 때 성령이 바로 우리 속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런 무리가 모인 교회는 생수의 강, 평화의 강, 사랑의 강이 되고 생의 갈증을 느낀 많은 무리들이 눈사태처럼 몰려오게 될 것이다.
무엇이 평안인가? 근심 걱정 없는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왜 평안하지 못할까? 무엇이 우리의 평안을 없앴나? 어떻게 하면 평안을 찾을 수 있을까?
인간 마음에서 근심걱정이 사라지면 평안한 마음이 된다. 인간이 에덴을 잃어버린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은 선이 아니다. 선이 아닌 것은 죄다. 부끄러움, 두려움, 미움, 원망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망가졌고, 에덴동산도 그 바이러스에 감염 되어 망가져 버렸다. 인간은 에덴을 그렇게 잃었다.
만일 인간의 마음에서 수치심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미움이 사라지고, 원망이 사라진다면 어떤 마음이 되겠는지? 자유, 자유, 평화의 영토가 된다. 끝도 없고, 경계도 없는, 지평선도 없는 평화의 영토가 된다. 그곳은 옥토다. 선한 것들은 무엇이든지 수확할 수 있다.
어떻게 근심 걱정을 없앴을 수 있을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성경에 맡겨 달라고 했다. 근심 걱정은 짐이다. 어둠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죄가 된다. 그러니 주님께 맡겨달라고 했으면 맡겨야 한다. 왜 우리가 생의 짐을 짊어지고 끙끙거리는가?
인간 마음이 천국이 되면 그 사람이 밟고 있는 땅도 천국이 된다. 우리의 삶은 천국의 삶이 된다. 이것이 평안의 법칙이다. “The Kingdom of God does not come with your carful observation nor will people say “Here it is” or “There it is”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눅 17:20) 우리 마음이 에덴이고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에덴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평화가 온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인간을 묶고 있던 모든 “의문에 속한 (뭔지 모르는)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과거 완료형이다.
인류는 평화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율법도 지켰다. 굿도 해 봤다. (두 전직 대통령이 진도 씻김굿을 했다) 제사도 지내보고 평화를 얻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다 기울인다.
그러나 스스로 정말 평화를 얻었다고 선언 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평화를 얻은 듯 보여도 많은 경우 살짝만 건들면 깨져 버리는 가짜 평화가 대부분이다.
참된 평화는 하늘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을 막고 있는 담을 허물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으로 확장이 되고 천국의 평화가 펼쳐질 수 있다. 주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었다. 하나님이 평화라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있던 평화가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밀려왔다는 의미다. 내가 서 있는 곳이 평화의 영역이라는 의미다. 평화를 막고 있었던 것은 죄의 벽이었는데 그 벽을 부서 버렸다는 의미다. 수치의 벽이 무너지고 두려움의 벽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 (엡 12:3)
마침내 그분이 선언 했다. “다 이루었다.” 일군이 일을 다 하고 이마의 땀을 흘리면서 “아! 다 했다.” 라고 하는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얼마나 멋진 선언인가?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초조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심과 걱정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주님을 신뢰하고 십자가 앞에 나의 짐을 모두 내려 놓을 때 평화가 찾아온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12.
평화 (2)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집이 평안 할지어다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눅 10:5-6)
평안을 가진 사람이 가는 곳엔 평화가 임한다. 그리스도를 품은 사람은 평화의 사람이다. 성령을 품은 사람은 평화의 사람이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평화를 전하게 된다. 그가 서 있는 곳에 평화가 있게 하고 그가 머무는 자리에 금방이라도 평화가 피어나게 해야 한다.
평화를 창조하고, 평화를 만들고, 평화를 전하고, 평화를 가꾸고, 평화를 길러야 한다. 평화를 소중히 해야 한다. 나의 평화도 중요하지만 형제의 평화도 중요하고, 형제의 평화도 중요하지만 나의 원수의 평화도 중요하다.
정말 힘든 일이지만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하다. 나를 미워하는 자, 내가 미워하는 자, 원수에게 평화를 빌고, 원수에게 평화를 선물하고, 평화를 축복해야 한다.
평화는 이상한 마력이 있어서 내가 평화를 심는 순간 내게 평화가 온다. 내가 불화나 미움을 심으면 먼저 내가 불화를 겪게 된다. 주님의 말씀은 어디를 가든 일단 무조건 평화부터 빌어주라는 뜻이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우리가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 같이 우리가 새로 태어났다고 했다. 그리고 율법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죄가 죽음과 동시 죽었다고 했다. 새로 태어난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은혜 아래 거한다고 했다.
우리는 홍해를 경험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살아있는 체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사탄아 물러가라 지금이 어느 땐데 그딴 소리로 속이려 하느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니” (눅 24;36)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 속에 더 이상 사망의 독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허상에 사로잡혀 떨 필요가 없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는 없다. 모든 죄를 용서 받았고 모든 허물을 사함 받았고 모든 부분을 치료 받았다.
*십자가가 있는 곳엔 죄가 존재할 수 없다. 타져 버리고 소멸되어 버린다. 우리는 이제 건강하다. 이제 우리 마음에는 기쁨과 평화의 조건들만 가득 찼다. 두려움이 없으니 평화로울 것은 당연하다. 의심도 없다. 미움도 없다. 원망도 없다. 죽음의 그림자도 불행의 그림자도 없다. 감사, 감사, 감사만 있을 뿐이다.
근심 없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자, 평화만 있는 세상을 한 번 상상해 보자. 미움이나 원망이 없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자. 그곳이 바로 천국 아니겠는지? 우리 마음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6장15절에 하나님은 우리를 평화롭게 살게 하기 위해 부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God called us to live in peace”)
이제 에덴에서부터 전이되어온 사망의 독이 해독되었으니 두려움은 더 이상 없다.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막고 있는 담이 허물어 졌으니 내 마음으로 천국이 확장이 되었다.(고전 3:16)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서 살 수 있다.
너와 나 사이가 평화롭지 못하는 것은 창3;17절에서 생긴 경쟁적인 마음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미움과 질투 때문이다. 미움과 질투는 선이 아니다. 선이 아니니 죄다. 십자가가 있는 곳엔 죄가 있을 수 없다. 모든 죄가 사라지고 내 마음에 천국이 임했다면 더 이상 내 마음에 너에 대한 미움이 있을 수 없다.
시기나 질투는 세속의 옛 구습이다. 시기나 질투가 있을 자리는 없다. 나는 이제 평화고 평화의 사도다. 내가 가는 곳엔 평화만 있을 것이다. 나는 어디를 가든지 평안만 빌 것이다. 다툼이 있는 곳에,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창조하리라.
판소리에 맺고 당기고 푼다는 말이 있다. 소리로 맺고, 당기고, 풀어나간다는 말이다. 주님은 수 천 년 맺힌 불행을 풀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고 그것을 푸는 복음을 전했다. 인간의 불행을 풀고, 미움을 풀고, 원망을 풀고, 탐욕을 풀고, 시기, 질투를 푸는 복음을 주셨다. 그것이 회개의 복음이고, 자유의 복음이고, 용서의 복음이고, 사랑의 복음이고 평화의 복음이다. 그 어떤 이론으로도 제도로도 주님이 자유케 한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을 구속할 수는 없다.
그 어떤 이론도, 제도도, 논리도, 인간을 억압할 수 없다. 인간은 자유하다. 이것은 진리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로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8장 21절) “He forgive us all our sins, having canceled the written code with its regulations, that was against us and that stood opposed to us, he took it away, nailing it to the cross.”(골2장 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