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복음 (3) 사랑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9.

사랑 (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4: 7-11)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이란 사람들이 생각한 것만큼 쉽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비위 맞추는 것,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자신안에 사랑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다. 성경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사랑에 대한 창조 기록은 없다. 그러나 누구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거기서 인간의 하나님에 향한 사랑과, 인간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 파생 되었다고 생각한다. 신약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사랑했나?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나? 사랑에는 방법(수단)이 있다. 원수가 됐건, 친구가 됐건, 남이 됐건 가족이 됐건 사랑엔 방법이 있다. 그 대상에 따라, 처한 환경에 따라 사랑하는 방법은 달라진다.

어떤 이에게는 사탕 하나를 주는 것이 사랑이고 어떤 이에게는 먹는 사탕을 뺏는 것이 사랑이고, 어쩔 때는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는 것이 사랑이고, 어쩔 때는 그대로 놔두는 것(참는)이 사랑이다. 성경에 사랑에 대한 판례들이 있다. 그것들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해석하고 사랑을 이해해 나간다. 성경에 설명된 사랑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용서, 이해, 관심, 등등.

성경이 보여준 사랑의 증거는 용서다. 사랑의 열매도 용서다. 사랑의 가장 위대한 속성은 용서다. 사랑이 있다고 하면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거짓이다. 용서는 사랑의 꽃이다. 용서는 사랑의 숨결이다. 숨을 쉬지 못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용서가 있다. 그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셨다.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용서하라”

예수님은 친히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함으로서 인간의 패턴을 만드셨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저들이 하는 짓이 무슨 짓인지 모르고 하는 겁니다. (눅23:34)”

스데반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군중들에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 평안하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행7:60) 라는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주여, 원수 갚는 것이 주께 있다고 하였으니 나의 억울함을 갚아주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고린도 전서 13장에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고,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기의 이익을 구치 않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성경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은 말이나 공식이 될 수가 없다. 그 안에 갇힐 수도 없다. 사랑은 분위기와 환경 그리고 마음에서 나오는 케미컬이다. 사랑의 깊은 세계는 어떤 정의도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아버지” 그러나 사랑의 아버지와 내가 어떤 교감 (communion) 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하나의 지식에서 끝이 난다. 사랑이란 감정이다. 감정이란 감정끼리 섞여져야 한다. 영적 교감이란 하나님의 사랑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흠뻑 느끼고 드리고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잔치 집에서 죄인과 창녀와 어울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고 웃으셨다. 아무런 격식도 없이 가장 낮은 자의 자리로 내려와 그들 중 하나가 되셨다. 주님이 남기신 사랑에 대한 판례다.

낮은 자리 높은 자리를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낮은 자에게 자기가 있는 자리로 올라오라는 요구도 아니 하시고 낮은 자가 있는 자리로 내려가서, 죄인이 있는 자리로 내려가서 그들과 하나가 되어 즐기셨다.

주님이 보여 주신 사랑의 판례에 의하면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를 내가 있는 자리로 끌어올리지도, 내리지도, 내 곁으로 오게 하지도 않고 내가 그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들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들과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그와 하나님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양반이 상인을 사랑하는 방법은 상인에게 양반이 되라 하는 것이 아니라 상인이 있는 자리로 내려가 상인을 대하는 것이다. 상인이 양반을 사랑하는 것은 양반을 상인처럼 되라고 하지 말고 내가 양반의 자리로 올라가 양반을 대하는 것이다.

모심는 농부를 도우려면 구두를 벗고 양복을 벗고 농부의 옷을 입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에 대한 판례다. 무식한 자에게 유식한 자가 되어서 나같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준에 맞는 말로 내가 맞춰 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 속에 젖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흠뻑 젖어야 그 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사랑 속에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들어가는 길이 있다. 비밀의 길이다. 갈보리다. 갈보리는 사랑의 능력과 은사를 얻는 곳이다. 갈보리에 대한 사랑체험 없이는 신앙은 추상적인 지식에서 끝이 난다. 주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시킨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주님의 영이 아니면 이해를 못한다.

주님의 사랑을 누구보다 흠뻑 받았던 요한은 그의 서신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한다. 사랑의 속성은 주는 것이다. 계산 없이 주는 것이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그냥 주는 것이다. 상대가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10.

사랑 (2)

사랑은 오래 참고” (고전 134)                                                                                                                                                                                                                                        

요즈음은 아이들 때문에 엄마들이 야단이다. 학교 선생이 학생들에게 벌을 내리거나 때리면 그 부모가 당장 쫓아가서 보복을 한다. 애를 길러본 사람들은 안다. 자기 아이를 건들면 자기를 건드는 것 보다 더 화가 난다고들 한다.

인간은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온 하나님의 독생자를 영접하지 않았다. 온갖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거짓 증거로 채포하였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처형했다. 우리 자녀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분노하여 보복하려 들 것이다.

피조물 인간이 귀한 하나님의 아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독생자 외아들에게 가하는 확대를 보실 때 하나님은 어쨌을까? 하나님은 독생자 외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참으셨다. 인내 하셨다. 오래 오래 참으셨다. 인간이 채찍질을 할 때도, 얼굴에 침을 뱉을 때도, 뺨을 때릴 때도, 옆구리를 창으로 찌를 때도, 십자가에 매달 때도, 조롱을 할 때도, 참으셨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다. 성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의 이익을 구치 않는다고 했다.

주님은 사랑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사랑하기 위해 오셨고, 사랑하기 위해 굶주렸고, 헐벗었고, 사랑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고, 사랑하기 위해 조롱을 당하고, 확대를 당하고,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를 비틀 비틀 오르셨고,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에 창이 찔려 돌아가셨다.

갈보리는 하나님의 참으심만 보여 진 곳이 아니다. 주님의 참으심도 보여주신 곳이고, 성령의 참으심도 보여주신 곳이다. 사랑은 참지 않으면 완성될 수 없다-

주님은 갈보리로 사랑을 표현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는 사랑의 꽃이 피어나는 소리다. 사랑의 꽃이 멍울지는 아픈 소리다.

“엘리 엘리 라막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랑의 울부짖음이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할 때 내 지른 신음 소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때 흘리신 고통의 소리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처절하고 아프게 피었고, 아프게 완성되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에 대한 판례는 이처럼 위대한 것이고 고귀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분의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는가? 어떻게 사랑하는가? 사랑하기 위해 무었을 했는가? 무엇을 참았는가? 무엇을 포기 했는가? 우리는 주님이 주신 사랑을 느끼고 사는가? 그분이 주신 사랑을 가슴에 품고는 있는가? 그 분이 주신 생명을 살고 있는가? 그분이 주신 영생을 호흡하고 있는가?

그분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추억으로 충만해야 할 우리 마음에 두려움, 원망, 빈곤, 분노, 시기, 질투. 미움, 오기 욕설이 들어있는가?

성경은 우리의 말이나 생각까지도 심판을 받는다며 조심 또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모세는 단 한 번의 분노로 가나안 입성이 차단당했다. 상상이나 생각으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얻는 것도 없이 죄를 짓나?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남의 형편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위로해야 한다. 의인의 자리에 앉지 말고 내 형제의 자리를 찾아 가야 한다. 우리는 엄청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은 못 하겠는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은 못하겠는가. 주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을 주저할 수 있겠는가.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 온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요 16: 27)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요6:35-36)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요15:12)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가? 말로? 마음으로? 사랑할 물질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의 사랑 안에 거하면 증상이 나타난다. 온실 안에 있으면 땀이 나는 것처럼 남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난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세상에 사랑 못할 것이 없게 된다. 왜? 평안하기 때문이다. 평안의 세상에선 탐욕도 시기도 질투도 미움도 원망도 두려움도 존재할 수 없다.

하와이에는 뱀이 없다. 뱀이 살아갈 수가 없다. 남 가주는 독사 아닌 뱀이 없다. 일반 뱀도 갔다가 놓으면 독사가 된다. 야생화도 독이 있어 가까이 할 수 없다. 내 맘이 사랑의 왕국이 되고 사랑의 정원이 되면 미움을 살아가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