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6.
용서 (1)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되리라.” (이1;18) “아버지여 저들(주님을 죽인 자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눅23:34)
태초에는 죄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불러들이자 죄가 들어왔다. 그래서 인간이 있는 곳에 죄가 있게 되었다. 죄가 사라지게 되면 인간은 다시 본래의 인간이 된다. 죄를 본래의 자리로 보내려면 죄의 능력을 해체시켜야 한다. 죄의 능력이 소멸되면 죄는 아무것도 아니다.
죄를 해체하려면 먼저 내가 죄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죄 안에 내재된 죄의 힘을 알아야 한다. 죄가 품고 있는 독성 (사망의 독) 을 알아야 한다.
복잡한 신학적인 논리를 떠나 내가 하나님께 죄인이 된 것은 내가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은 선이다. 인간은 선을 행할 자유가 있고, 선을 행할 권리가 있고 선을 행할 능력이 있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의 인간의 상태 였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창조물을 잘 다스리면 하나님의 창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선하게 모두 자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이 창조 질서고, 자연의 질서고, 우주의 질서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하나님 앞에서 선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연에 영향을 미친다. 왜? 모든 행위는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를 타고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면 선한 반응이, 악을 행하면 악한 반응이 자연 어딘가에서 나타난다.
자연 안에서 인간이 수행할 일은 사랑과 평화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 후 사랑과 평화 속에서 살지를 못했다. 아니 그렇게 살수가 없었다. 그렇게 살기를 원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내 속에 있는 다른 죄의 속성들이 그렇게 하도록 놔주지를 않기 때문이다. (롬7장20절)
행해야 할 것을 행하지 않는 상태가 악의 상태이고 죄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과 평화롭게, 자연과 평화롭게, 우주와 평화롭게 살아야 했고 이것이 우주의 법칙이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인간은 타락했다. 인간이 하나님과 불 일치, 부 조화 하자 자연도 인간과 불 일치, 부조화 하게 되었다. 인간과 함께 땅도 저주를 받은 상태가 되었다. 탐욕 때문이다. 더 가지려다 가진 것 모두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와 자연이, 나와 우주가, 나와 남이, 그리고 내가 나와 불협화음을 겪게 됐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우주 사이에, 인간과 자연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설정된 조화와 행복을 유지하게 해주는 그 법칙을 어긴 결과다. 즉 죄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로 부터 스스로 등을 돌려 내것이 아닌 내가 사는데 필요치도 않은 다른 존재 혹은 다른 영역에 있어야 할 것을 탐욕으로 취했을 때 오는 “낙원을 잃어 버린 상태” (실락원) 인 것이다.
이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난 죄의 상태에 집중해보자. 사람에는 두 가지 법이 있었다. 양심의 법과 율법이다. 양심의 법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법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인간은 오래전부터 양심의 법을 어기며 살았다.
다음은 율법이다. 율법은 선민을 자처하는 유대인들이 여호와가 주신 법이라고 주장하는 법이다. 그러나 유대인 그들은 그 법을 지켜내지 못했다.
법의 우선순위를 떠나, 성경은 율법을 지키는 것도 선이요, 양심의 법을 지키는 것도 선이라고 하고 있다. 이 말은 어딘가에 선을 강조한 다른 법이 있다면 아마 그 법도 선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근체의 십일조는 드리되 그 보다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십일조를 강조하는 분들이 많이 이용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율법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을 지적한 것이다. 물론 이는 예수께서 모든 율법과 규례를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하신 말씀임을 유념해야 한다.
십일조가 율법을 말하는 것이라면 의와 인과 신은 신성과 양심을 말한다. 율법을 지키되 마음으로 지키지 않은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양심을 지키되 행동으로 지키지 않은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다. 행동 없이 마음으로 지은 죄도 죄고, 마음 없이 행동으로 지은 죄도 죄라는 해석이다. 인간은 마음 따로 육체 따로 놀 수 없다는 의미다. 죄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이다. 마음(생각)으로 누구를 미워했으면 율법에 의해 살인죄, 마음으로 남의 것을 탐했으면 도둑질, 마음으로 누구를 흠모 했으면 간음죄, 마음으로 하나님 보다 무엇을 더 사랑한 것이 있었으면 우상숭배(탐욕, 음행, 더러움) 등 예수님은 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셨다.
탐욕이 죄악의 ‘성전’이라고 한다면 그 성전 안에 있는 것들도 다 죄악이다. 탐욕이 필요이상을 꿈꾸는 순간 모든 정신적 장기들은 공범이 된다. 선을 행할 속성을 가지고 창조된 인간으로서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다. 그러니까다 죄인이라는 얘기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도 죄다. 잃어버린 자기를 찾지 않는 것도 죄다.
모든 행위에는 대가가 따른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죄에는 죄의 대가,선에는 선의 대가, 죄에 따르는 대가를 벌이라고 말한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벌이 나와 있다. 이 세상에서의 벌과 저 세상에서의 벌이다. 꺼지지 않는 영원한 유황불 속에서의 벌도 있다. 그러나 벌은 이 생에서 받건 죽은 후의 세상에서 받건 모두 끔찍한 고통이다.
이생에서 받는 대부분의 벌은 어떤 행위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온다. 그래서 벌을 받고 있으면서도 모를 수가 있다. 그러나 성경에 묘사된 지옥에서의 벌은 다르다. 자연이 없다. 강압적이고 강제적이다. 세상의 자연 법칙하에서는 이처럼, 무언가 잘못하고 죄를 지으면 그걸 벌 이라고 부르던지 댓가라고 부르던지, 그 잘못이 야기한 결과를 감수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이 자신의 말과 생각과 행위로 인해 야기한 필연적으로 받아야 할 벌, 혹은 댓가를 사면해 주시겠다고 했다. 조건도 없다. 그냥 사면해 주시겠다고 한 것이다. 죄의 힘을 해체시키고 소멸 시키겠다고 한 것이다. 용서란 그런 것이다. 값없이 내리는 값을 산출 할 수 없는 선물,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난 청결한 마음, 그것이 참 용서다.
기독교는 이런 용서의 복음 위에서 세워졌다. 용서가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귀한 주님은 용서를 위해 왔고, 용서를 위해 살다, 용서를 위해 고난을 당하여 죽었고, 용서를 위해 부활하셨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바로 그렇게 조건 없이 댓가 없이 용서해서 자유롭게 보내 줄 때, 우리 자신도 바로 그렇게 용서를 받고 죄의 상태로 부터 자유 함을 얻게 된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7.
용서 (2)
“너희가 뉘 죄를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 18)
*용서는 세 가지 방법으로 주어진다. 첫째는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할 때,(마6:14) 둘째 내가 내 죄를 고백하면서 내 죄를 용서할 때, (마18:18) 세 번째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이다.(눅7:47) 성경에서 말한 용서는 더 이상의 책임도, 더 이상의 이유도 묻지 않는 것이다. (히 8:12, 10:17)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은혜요 사랑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예수님은 용서를 주실 때 복잡한 절차도 없었다. 너무너무 간단하게 너무너무 쉽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평안히 가라” “네 죄가 용서되었느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이것이 죄를 용서하는 방법이었다. *“너 그때 왜 그랬느냐?” “그때 저렇게 할 수 있었지 않았느냐?” 낮 뜨거운 추궁이 없다. 원인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아니하겠노라.”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용서를 주고받아야 할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남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용서다.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 목숨만이 대가가 될 수 있는 참혹한 죄까지 탕감해주는 것이 용서다. 그 무엇으로도 청산 할 수 없는 빚, 우주에 진 빚, 자연에 진 빚, 남에게 진 빚, 나에게 진 빚, 창조주 하나님께 진 빚, 그 모든 빚을 일시에 갚아주셨다.
용서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단순하고 그러면서도 넓고 깊다. 빚을 갚는 다는 것은 영생까지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이렇게 크고 넓다. 아까운 것이 없다. 무엇이든지 더 주고 싶은 마음이 하나님 마음이다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하리라”(이 1:18)
하나님은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를 용서했다. 온갖 죄의 본성으로 가득하여 악취가 나는 마음을 끌고 다니면서 날마다 불평과 원망과 미움과 시기와 거짓에 젖은 삶을 용서했다. 짐승처럼 육적인 탐욕으로만 사는 구습을 용서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냥 용서했다. 내가 창조주 하나님께 지은 죄, 내가 나에게 지은 죄, 내가 내 이웃에게 지은 죄, 내가 자연에 지은 죄, 내가 우주에 지은 죄 그 모든 죄를 용서했다.
1988년경 미국에서 불체 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린 적이 있다. 그동안의 불체의 사유를 묻지 않고 영주할 신청자격이 주었을 때 수백만이 기뻐서 팔짝 팔짝 뛰었다. 만일 우리가 사형수가 되어 사형 집행을 기다릴 때 사면령이 내려졌다고 해 보자. 얼마나 기쁘겠는지. 용서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그냥 되지 않았다. 값을 지불하셨다. 여기서 종종 어떤 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가 있다. 하나님이 그냥 죄를 용서해버리면 되지 왜 값을 냈을까? 그리고 “그 값을 누구한테 지불했을까? 아니면 무엇 때문에 혹은 무엇이 두려워 혹은 누구 눈치 때문에 값비싼 죄 값을 지불해야 했을까?”
태초부터 우주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법칙이 있었다. 선에는 선이 보상으로 따르고 악에는 악이 대가로 따르는 법칙이다.
주님은 그 우주의 법칙을 거슬리지 않고 그 값을 자신이 해결하셨다. 우리의 빚은 에덴에서부터 쌓여 살아있는 목숨으로 밖에 청산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만큼 우리의 죄가 흉했다는 뜻이다. 주님이 우리의 목숨 값, 우리의 영혼 값을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 지불하신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죄의 노예인 우리를 노예 값을 치루고 사서 의의 노예로 삼았다는 말로 풀이했다. 그 값을 지불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또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는 성경에 잘 나와 있다.
예수님의 수난기 모두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겪는 고초기였다. 그것은 우리가 겪어야 할 고초,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 우리가 찔려야 할 창, 우리가 매달려야 할 십자가 ,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이었다.- 주님이 대신 받으신 것이다.
우리가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사탄과 더불어 받아야 할 그 고난을 대신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인간 세상에서, 인간 앞에서, 인간에 의해 거룩한 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신 것이다.
성경은 100섬을 면제 받은 빚쟁이를 통해 하나님께 용서받은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가 용서를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용서를 얼마나 해 주는 것이 옳은지 물었을 때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이 말은 몇 천 번씩이라도 용서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용서는 말처럼 쉽지가 않다. 용서를 한다고 해도 마음에서 자꾸자꾸 생각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용서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 마음에 용서가 없어서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 이상은 줄 수가 없다. 용서를 줄려면 용서를 가져야 한다. 왜 마음에 용서가 없을까? 왜 사람들은 용서를 해 놓고 하루나 이틀 후 다시 미워할까? 용서를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용서를 체험하지 못할까? 그것은 자신의 죄의 상태를 보지 못한 바리새인과 같은 자칭 율법상의 의인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비참한 죄의 노예 상태를 보고, 그 상태에서 벗어 나고자 할 때, 갈보리 십자가 상의 예수님의 고난의 이유를 보게 되고, 그 분을 통해 자신이 용서와 죄로 부터의 해방을 체험 할 때에만, 내가 그 값없이 받은 용서의 은혜를 다른 이에게 거저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의 원천은 갈보리다. 우리가 갈보리에 계신 십자가 주님께 다가가면 용서의 능력을 받을 수 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 하소서”주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8.
용서 (3)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 천상에 보내시는 말이다. 사람은 죽어갈 때 마지막 말을 한다. 보통 가족에게 하는 경우가 많다. 주님도 천상에 계신 아버지에게 유언을 하신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하시는 마지막 말이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그것이 용서였다.
이 용서는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언이기도 하다. 우리의 기도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나의 죄를 위한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인다면 그분의 십자가상의 마지막 한마디도 우리의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성경은 읽음으로 끝나면 안 된다. 흡수를 해야 한다. 시간이 걸려도 음미하고, 또 음미하면서 흡수해야 한다. 그래야 뼈가 되고 살이 되고 마음이 된다.
성경을 음미하면 주님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된다. 주님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된다. 갈보리에 가까이 가면 주님이 당하신 갈보리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된다.
주님이 보일 것이고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그 소리가 나를 찌를 것이다. 나를 위해 쏟고 있다고 믿어질 것이다. 그 소리가 나의 영혼의 소리가 될 것이다. 주의 울부짖음이 우리 마음속 구석구석에서 메아리 칠 것이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주님이 계시는 성지가 된다.
갈보리 언덕, 주님의 피 흘리는 십자가를 다녀온 사람은 용서가 없을 수 없다. 용서 못할 것이 없게 된다. 용서와 사랑이 흠뻑 빠졌다 오기 때문이다. 온 몸에서 용서와 사랑의 에너지가 줄줄 흐르게 되어있다. 용서가 있어야 평안이 있다. 용서 없이는 평안이 있을 수 없다.
“너와 오늘 낙원에 있으니라” 과거를 묻지 않고 무조건 눈감아 주는 것이 용서다. 용서는 너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한다. 분노는 불이다. 분노는 독이다. 이제 막 주님에 의해 다시 태어난 우리 마음은 여리다. 그 여린 마음에 독을 담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마음이 타버린다. 화상을 입는다. 독이 너무 강해 마음을 녹여 버린다. 그래서 남을 미워하는 사람치고 건강한 사람이 없다. 분노가 많은 사람 치고 건강한 사람이 없다.
어떤 사업하는 사람이 사업관계로 누구를 미워하게 되었다. 정말 억울한 일을 당했다. 너무너무 억울하고 분노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나님 이게 아니지요?” 원망까지 했다. 그런데 자신의 건강 때문에 용서하기로 결심을 했다. 성령의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용서를 했다. 그런데 그 안에 완전 천국이 임한 것이다. 너무너무 기뻤다. 평안했다. 성령이 충만했다. 용서한 마음은 항상 평안이 있다. “너희는 일흔 번씩 일곱씩이라도 용서하라”
우리는 우리 죄를 용서할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 죄를 용서해 놓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무슨 까닭일까? 영적 지식이 없어서다. 자신을 무시해서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사탄도 무시하고 남도 무시한다.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자기를 귀히 여겨야 한다. 자신의 신용도를 자신이 높여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가 씻어졌다고 해도 우리는 귀가 멀어 듣지 못한다. 귀가 멀어 내가 듣지 못했다고 용서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다. 거룩하고 성스런 신비고 기적이다.
이제 죄는 우리가 털털 떨어버리면 되는 먼지다. 길을 가면 먼지는 낀다. 그러면 털털 털어버린다. 그리고 또 먼지가 낀다. 그러면 또 털털 털어버리면 된다. 그것에 붙잡혀 끙끙거릴 필요가 없다. 발로 차버리고 나오면 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용서받는 방법이고 용서하는 방법이다.
주님은 따지지도 않고 용서했다. 우리가 이렇게 받았으니 이런 방법대로 이렇게 줘야 한다. 잠자리에서, 길을 가면서, 나를 섭섭하게 한 사람이 생각나거든 내가 나를 용서한 것처럼 쉽게 용서하라.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용서를 받아도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어 방황하게 된다.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을 뿐 아니라 기도하려고 하면 그것이 다시 생각나서 괴롭힌다. 그래서 다시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빈다. 그러나 또 얼마 있으면 생각이 난다. 왜 그럴까?
바로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왜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을까? 용서를 실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서를 실감하라.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면 자기 속에 있는 주님을 믿어라 성령을 믿어라 죄를 그분이 용서했다고 생각하라. 허리를 펴고 살아라. 그래야 기도가 응답 된다.
눈먼 맹인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죄인은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는 진리를 배웠다. 우리는 더 이상의 죄인이 아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좋으나 주님의 구속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겸손은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의 위치로 내려가서 그 사람 입장이 되는 것이지 주님이 그 많은 고통을 지불하고 의롭게 한 나를 불의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겪으신 모든 고난을 헛되이 만들지 마라. 이는 구약으로 돌아가는 행위이다.
나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나는 용서 받았다. 그래서 누구든 용서 할 수 있다. 내가 용서를 체험했기 때문에 내가 체험 한 것을 나눠줄 수가 있다. 용서는 조건이 없다, 용서는 대가도 없다. 용서는 과거에 대한 추궁도 없다. 이것이 십자가에 뿌리박힌 용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