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ssage No. 1
하나님은 누구인가?
출 3장 14절 (스스로 있는 자= I am that I am)
인류가 만들어지기 전 혹은 후 아니면 동시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거나 창조되었음은 여러가지로 볼 때 자명해 보인다. 인간에게 자세히 공개되지 않은 세계이다. 사람에 따라 표현이 다를 수 있지만 그 세계를 통 털어 이승의 언어로 영들의 세계- 셋째 하늘(고후 12:1-6), 4차원의 세계, 4차원 세계 속의 4차원의 세계, 5차원의 세계 혹은 그 이상의 세계 – 혹은 천사의 세계라 사람들이 불러왔다.
신학적인 여러 명칭을 뒤로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라고 했다. 이 말 뜻은 원인이 없는 존재, 태어나지 않고 존재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 세상의 어떤 법칙이나 원리로도 풀 수 없는 진리이다. ‘시작이 없는 존재’, 성경은 그 어떤 부족도 없으신 분, 그 자체로서 완벽한 분으로 소개한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그분이 시작이고 그분이 마지막이다. 천하 만물은 시작과 마지막이라는 정점 안에 들어있을 뿐이다.
모든 존재를 현자들은 원인에 의한 결과(Cause and Effect)로 설명 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또 다른 원인(Cause)이 된다. 원인(Cause)의해 또 다른 행 혹은 결과(effect or result)가 일어나고 그 결과(result)는 또 다른 원인(Cause)을 낳는다. 이것이 자연의 흐름이고 법칙이다.
세계 만물은 이처럼 다 원인이 있어 보인다. 알파라는 뜻, “스스로 있는 자” (“I am that I am”) 라는 뜻은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뜻도 될 수 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뜻이다. 인간 편에서는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고 지극히 단편적이나마 하나님께서 알려 줬을 때만 알 수 있는 분, 그 하나님에 대한 소개가 여러 곳에 나타난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약에 묘사한 하나님은 여호와시다. 질투의 신, 보복의 신, 불같은 신, 비둘기 같은 신, 바람 같은 신 여호와, 그렇게 가기 싫다는 모세를 애급으로 보내 유대인들을 구출하라 하여 놓고 까닭 없이 길의 숙소에 나타나 죽이려 하신 여호와(출 4장 24절)이시다.
모세에게 이적으로 바로를 협박하라 하여놓고 다른 쪽에서는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여 모세의 말을 듣지 않게 하신 신, 그리하여 결국 바로의 아들을 비롯하여 모든 이집트 민족의 장자들을 몰살한 신 여호와. (출4장 21-23절)
애급을 탈 출 한 후 유대인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여호와가 보여 주신 여호와의 모습은 너무나 무섭고 두렵다. 여호와를 야훼라고 칭하기도 한다. 유대인들은 그 야훼의 벌을 받아 죽었고, 땅 속에 생매장 되어 죽었고, 야훼의 명을 받은 자신의 동족에게 칼로 살육 당해 죽었고, 독사에 물려 죽었다.
어떤 때는 폭풍우 속에 나타나서 자신의 위엄을 보여주고, 어떤 때는 구름을 타고 나타나 자신의 권위를 나타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후에도 여호와는 두려움과 무서움의 신이었다. 그들은 여호와가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침략을 통해 얻었다. 처음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살육과 약탈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땅, 그리고 남의 피를 흘려서 뺏었던 땅이 약속의 땅이었다. 거기에는 평화도 없었고, 사랑도 없었고, 용서도 없었다. 여호와는 가나안 복지에 거주하는 원 주인들을 몰아낼 때 그들을 창조한 창조자로서 아니라, 철천지 원수진 원수의 자녀를 처형하듯 하셨다.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자비심도 보여주지 아니하였다. 이는 우주의 법칙에 의해 무서운 결과를 몰고 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히브리인들은 그곳에서 행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내내 불행했다.
물론 가나안의 원주민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상을 숭배 한 것은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썩었고 역시 가증했다. 여호와가 “목이 곧은 백성”이라며 전멸을 시키겠다고 할 정도였다. 모세의 간청으로 여호와의 진노는 진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히브리 사람들이 기록한 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제외한 다른 민족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백성처럼 묘사되었다. 그들을 건드는 민족은 여호와께 저주를 받는다는 것만 드러나게 하였다. 차별의 극치를 보여 준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노여워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보복도 없는 거대한 사랑의 원체로 하나님을 소개한다. 모든 이의 하나님, 모든 인류를 차별하지 않고 똑 같이 사랑하신 신으로 소개한다. 유대인들이 구약에 묘사한 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예수님은 민족의 벽을 허물고, 모든 민족의 하나님을 선포함과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사랑해 오셨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들이 평화와 사랑 안에서 살 수 있는 방법과 길이 있음을 전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함이니라.”(요3: 16)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전하면서 하나님은 자신의 한 부분인 숨결을 부어 넣어 생령(Divine Human)이 되게 한 사실을 밝힌다.
이스라엘이 기록하여 가져온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외에 그 어떤 백성에게도 사랑을 준적이 없고 줄 수도 없는 분이다.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왜곡 시킨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바로 잡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고(요한 2서 4장 13절), 선이다. 인간이 평화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란다.(고전 6:15) 주님은 하나님의 한 위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증명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로 완성한다. 모든 인류를 사랑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시킨다.
이것이 예수님에 의해 입증된 하나님이다.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 –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 된 인류를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독생자를 주셔서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자신의 성령을 주시어서 인간의 구원을 지키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 하나님의 사랑은 한도 없고 끝도 없다. 우주보다 더 넓고 바다보다 더 깊다. 주님이 증언하시고 증명하셨다. 하나님은 누가 뭐래도 처음부터 사랑의 하나님이었고 계속 사랑의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리는 그 하나님의 자녀다. 할렐루야.
Message No. 2.
하나님의 속성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 (요일 4장 7절)
구약에는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나타났고 신약에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소개된 하나님의 진짜 속성은 무엇일까? 왜 구약에는 그렇게 무서운 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 신약에는 그것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일까? 혹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예수님이 소개한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닐까?
신학적인 용어 (공유적, 유기적) 를 떠나 먼저 하나님은 물질계에서 통용되는 물질적인 형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속성이 곧 형체요, 형체가 곧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속성이고 능력이고 권능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의 이름을 아는 것이 지혜고, 지식이고, 믿음이고, 생명이라고 했다. 고후 4: 16절엔 그를 아는 것이 빛이라고 했다.
신학의 범주를 넘어 세속에서의 일괄된 주장은 우주 만물, 영계, 육계를 창조한 신은 하나고, 명칭(천신, 옥황상제, 하늘 신,)은 달라도 영적 실체는 같다. 한 결 같이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고(요한 2서 4장 13절), 선이다. 인간이 모두 평화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란다.(고전 6:15) 사랑 없이 창조가 없고 사랑 없이 운행이 없다. 모든 창조는 사랑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히브리인들이 뭐라고 했건,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신은 사랑임이 분명하다. 사랑의 원인이고, 그 원인의 활동이 천지 창조고, 그 창조물의 숨결이 사랑이다. 심지어 그분의 입김도 사랑이다. 그분의 옷자락도 사랑이다. 그분의 눈동자도 사랑이다. 그분의 손도, 발도, 사랑이다. 온 우주는 그분의 사랑의 흔적들로 충만하다. 사랑의 속성은 평화고, 사랑의 꽃은 용서다. 죄는 사랑에 들 수 없다. 죄는 악이기 때문이다.
우주에는 분명 공의가 있어 보인다. 공의는 보이지 않는 우주의 정의다. 이 정의가 의를 낳았고 선을 지킨다. 태초부터 공의는 있었다. 공의는 Cause and Effect (심는 대로 거두는)의 법칙이다. 공의는 사랑의 곁에 있으면서도 사랑이 아니다. 공의는 Cause and Effect의 주인이다. 어떤 이들은 사랑과 공의를 붙여 공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과 공의는 하나로 보기 어려워 보인다. 두 개의 개체로 보여진다. 참 사랑은 공의 위에 있다. 모든 법을 녹여버린다.
공의는 우주 어디에나 있다. 때론 사랑의 수행원이나 호위병처럼 사랑을 따라 다니기도 한다. 때론 의를 수행하고 때론 선을 수행한다. 공의는 악이 있는 곳에도 있다. 악과 선 사이의 중재자로 혹은 통제자로 공의는 존재한다.
완전하지 않은 것은 언제든지 시들어버린다. 완전하지 않은 것은 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보아온 세상의 법칙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 완전하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잖아, 독생자까지 보내 주셨잖아. 그까짓 죄 좀 지었다고 그 큰 사랑의 덩어리가 이해를 못하겠어? ”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과 공의를 하나로 생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은 사랑이고 공의는 공의다. 악은 악이고 사랑은 사랑이다. 악과 사랑은 하나가 될 수 없다. 반드시 용서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용서의 과정이란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 값은 공의(cause and effect)에 의해 정해진다. 죄를 지으면 공의(cause and effect)의 법칙에 의해 값을 지불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본다. 물론 그 결과가 아주 느리게 나타날 수도 있다. 우주에 있는 때의 법칙 때문이다. (“There is a season for everything”. 전도서 1장)
공의의 법칙을 거슬린 사랑은 변한다. 스스로 부패하여 변질이 된다. 오늘의 사랑이 내일엔 악으로, 오늘의 악이 내일엔 선(사랑)으로 둔갑해 버린다. 그리고 종국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참 사랑은 영원하다. 천지는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다. (고전 13장)
모든 죄는 그들이 가진 값이 있다. 죄를 짓는 순간 그들의 노예가 된다.(로 7-8장) 참 사랑의 영역을 벗어나 고통의 낮선 이방 땅을 방황하게 된다. 이것이 공의다. 사랑은 죄를 용서하거나 중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죄와 섞여질 수는 없다. 독생자를 보내신 것은 죄 값을 청산하기 위함이었지, 죄를 허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죄를 지닌 채 인간의 영혼은 구원되지 않는다. 죄는 악이고 악은 추하기 때문이다. 악은 신성한 땅과 신성한 영혼들을 오염시키는 병균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죄를 없애야 한다. 죄는 두려움이다. 미움이다.
죄를 없애는 방법은 많다. 신약 성경에는 세 가지 방법을 강조한다. 첫 번째는 남의 죄를 용서함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하는 방법을 소개 했다. (마 6장 14절) 둘째는 자신이 자신을 용서함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다. (마18장 18절) 셋째 사랑을 통해서다. “Therefore, I tell you, her many sins have been forgiven for she loved much. But he who has been forgiven little loves little”(눅 7장 47절)
사람은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칼빈의 말이기도 하다. ‘나는 성령의 전이다’. ‘나는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 삶에 필요한 것을 창조 할 수 있다.’ ‘나는 나를 축복할 수 있다.’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제한한다. 내가 나를 제한 해 버리면 나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나의 능력도 제한이 되고, 나의 믿음도 제한이 되고, 나의 일상도 제한이 된다. 자기를 풀어야 한다. 자기를 해방시켜야 한다. 죄책감으로부터, 제도로부터, 문화로부터, 형식으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해야 한다. (갈 5장 11절) 물론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회개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함으로 하는 회개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온 마음을 다하여 온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자.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면, 죄의 길에서 벗어나고 모든 과거의 악습에서 180 도 전환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것이 성 어거스틴이 고백한 “회심’ 이고 진정한 회개이다.
그러면 죄는 타져서 소멸되어 버린다. 구약에 어떻게 소개 되었건 우리 주님이 소개한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다. 평화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한다. 하나님의 사랑엔 한계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자.
Message No. 3.
하나님은 왜 인류를 창조 하셨을까?
“태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창 1장 1절)
부족이 없으면 필요도 없다. 필요가 없으면 행위도 없다. 원인이나 목적이 없으면 그것들을 위한 행위도 없어야 한다. 따라서 무엇이 있다면 반드시 원인과 목적이 있어야 한다. 완벽하다는 말은 다른 것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다. 그런 하나님이 어떤 연유로 시간을 있게 하고, 시작이 있게 하고, 물질계를 창조 하셨을까? 왜, 스스로 천지의 원인이 되셨을까?
성경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가 않다.
특정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 창조에 대한 얘기를 한다. 수메르 점토판에서 나왔다는 수메르 신화를 비롯하여 우주인들이 일을 시키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는 얘기 등, 그러나 천지가 창조된 원인에 대해 설득력 있게 말하는 이는 없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함이라함은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는 하나님의 존영(원인이 없이 존재하는 절대자)에 부합하지 않는 논리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천지를 창조 하셨을까? 자신이 거하시려고? 아니면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하시려고? 아니면 천국의 연방으로?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의 족보는 하나님께 연결되도록 잘 맞췄는데 이에 대해서는 소홀 했다. 어쩌면 천지 창조에 대한 답은 인간의 이해 밖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전 originally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였을까? 영계였을까? 물질계였을까? 어디에 주로 거하셨을까?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하나님의 나라는 육체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다. 눈으로 불 수 없는 영적 세계다. 일반적으로 나라란 영토가 있고, 통치자가 있고, 법이 있고, 조직이 있고, 백성이 있다. 백성이 있으면 백성의 삶이 있고, 사회가 있고, 형태가 있고, 문화가 있다. 이것이 인간들이 알고 있는 나라에 대한 개념이다. 그러나 그 개념에 들 수 있는 하나님의 세계는 아직 알려준 적이 없다.
종교의 종파를 초월하여 명상이나 육체이탈, 혹은 순간의 죽음, 혹은 기도를 통해 지옥이나 천국을 보았거나 다녀왔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다소 만화 같은 표현들이긴 하지만 각자 나름대로 그럴 듯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당연 지옥이나 천국이 들어 있다.
그것들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본인이 그것을 그것이라고 주장하는 데는 아무도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물론 그중에는 제법 사실처럼 객관성이 있어 보이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겪은 대부분의 영적 체험은 성경의 검증을 통과하기엔 너무나 주관적인 것들이다. 주관적인 체험은 주관적인 체험에서 끝나야 한다. 몸을 빠져나간 인간의 영혼이 무한한 영계의 어디를 갈수 있었을지? 또 가서 무엇을 본다고 그것이 절대적이거나 전부이겠는지? 그들이 본 것이 인류가 꿈꾸는 천국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인지? 그 본 것이 인간 세상에서 다시 인간의 언어에 담아 표현될 때 부서지거나 왜곡 되지는 않았을지?
특히 그들이 지옥에서 봤다는 어떤 물체(뱀이나 구렁)가 물질적인 것인지 영적인 것인지, 거기에 있는 그것들이 인간과 함께 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 벌을 주고 있는 것인지, 그들 자신들도 알지를 못한다. 물질계의 형상과 영계의 현상이 섞여진 꿈, 꿈은 항상 그런 것이다. 그래서 꿈은 꿈이다. 그냥 그 체험들이 그들의 신앙생활에 어떤 도움을 주었다면 거기서 끝내야 한다.
욥기나 시편 그리고 계시록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천상계에서의 일을 보여준다. 계시록에는 일정 부분(하나님의 보좌)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허나 그것들마저 이해 할 수 없는 비유나 특정 장면들에 국한된다.
하늘 속의 또 다른 하늘을 비롯하여 한 발은 땅에, 다른 한 발은 물을 밟고 있는 천사나 일곱 머리, 입어서 나온 검, 일곱 뿔 달린 짐승 등 배경이나 환경은 이승의 지혜나 명철로 뚫을 수 없는 천 겹의 천상 신비이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그것들을 보여주며 보는 것을 전하라 했지만 요한이 전달한 것은 인간이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의도적으로나 비의도적으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혹은 이해 과정에서 어떤 변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분명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우리가 요한을 통해 전해 받은 그의 메시지를 붙들고 이해하지 못해 끙끙거리는 것을 보고자 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들의 세계란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모든 것이 비유고 모든 것이 암호다. 하늘의 지혜나 신의 도움이 없이는 보아도 볼 수도 없고 들어도 들을 수도 없고 알아도 알 수 없고 이해 할 수도 없는 것이 그곳이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심지어 시간 개념 하나까지도 신비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고’(벧후 3:8) 어느 때는 어머니처럼 다가와 너무 따뜻하게 우주의 진리를 가르쳐주고 묻는 것에 대답해 준 성령님이 어느 때는 아무리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 성령님.
금방 보이는 곳인데도 갈수 없는 곳(거지 나사로 비유). 가까이 있으면서도 먼 곳,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곳, 볼 수도 없고, 갈 수도 없고, 가서 보아도 표현이 불가능한 첩첩의 베일 속에 들어 있는 신비한 곳이 그곳이다. 한순간 어떤 깨달음의 빛이 들어오면 번쩍 알았다가도 다시 몰라져 버리고, 몰랐다가도 알아져 버리고, 알았다가 다시 몰라져 버리는 것이 그곳에 대한 지식인 것 같다.
하나님의 세계는 물질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에 하나님의 신이 물질계의 수면 위에 운행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런 부족이 없는 그 하나님이 무슨 연유로 물질계의 우주만물을 창조 하셨을까? – 기도하면 열릴 것이다. 각자 다른 대답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뿌리가 같으면 달라도 같은 것이다.
Message No. 4.
천국은 찾을 수 있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처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 1장 11절)
예수께서 승천하여 자신의 왕국,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신 장면을 나타내 주는 기록이다. 본인이 말했고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왕국에 대한 기록은 계시록 외에는 없다. 물론 단편적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말해주는 기록은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와 있다.
성경에는 천국에 대한 그림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의 나라 어딘가에 있는 특별 지역이다. 물질의 세계에서는 그곳을 Control 타워가 있는 수도라고 말한다. 그 수도에 왕궁 아니면 최고 통수권자가 머무르는 성이 있다.
성경은 그곳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전한다. 마지막 심판의 장소, 인간이 죽으면 올라가 마지막 심판 때까지 희락을 누리며 쉬는 장소, 그리고 우주의 삼라만상을 내려다보면서 관리하는 장소, 모든 성도의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는 장소, 인간의 말과 생각까지 보관하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을 보여주는 기록이 몇 군데 있다. 요한 계시록이 그것이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 말고도 사도행전 7장에도 나와 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스데반은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스데반에게 하늘 문을 열어 보게 하신 것이다. 이는 어떤 우리가 모르는 차원의 창을 열었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천국과 인간과의 거리를 인간 세상의 거리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경에는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와 나사로가 죽었다. 죽은 후 나사로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으로, 부자는 고통의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고통의 장소에서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본다. 부자는 나사로를 통한 물 한 방울을 구걸한다. 그러나 부자의 청을 거절 하면서 천사는 부자와 나사로가 있는 곳은 건널 래야 건널 수 없다고 말을 한다. 인간의 거리 개념으로 설명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의 보좌와 너무 가까이 있을 수도 있다. 차원의 창을 열기만 하면 그냥 볼 수 있고,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을 수도 있다. 우주선을 타고 수 십 년을 날아가는 거리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시면 어디서나 볼 수 있고, 갈수 있고,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그 어디서도,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오를 수 없는 곳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좌에 대해 성경에서 가르친 기록이다.
빛이 너무 강해 태양이 필요하지 않은 왕국, 사방이 찬란한 빛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궁전, 그 안에 꾸며진 장식물들, 천사들, 군대, 파수 꾼, 일곱의 영, 별들, 거기에 불려오는 짐승들, 이런 단편적인 것들은 있으나 백성들의 생활, 문화 등등 물질계의 장소 개념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물론 천국이란 영적 세계이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는 이처럼 그 이상의 빛과 영광이 충만한 곳으로 성경에는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외친 천국은 무엇일까? 2천 년 전 예수님도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다. 2천 년 전에 전파된 천국은 신약 속에 흐르는 복음의 핵심이다. 천국이 없으면 영생도 없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외침은 이해할 수 없는 암호 같았다.
보통 우리가 천국을 지칭 할 때는 영적인 세계를 말한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만 하나님의 세계고 물질적인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든 그분의 세계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천국에 대해 많은 말을 하신다. 천국에 대한 비유를 비롯하여 천국이 우리에게까지 임한다는 말씀도 하신다.
“The kingdom of God does not come with your careful observation, nor will people say “here it is” or “there it is”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성경은 또 “내가 네 안에 제가 내 안에 있으면 아버지가 너희 안에 거하시리라.” 고 말한다. 그리고 “For we are the temple of the living God. As God has said I will live with them and walk among them, and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people.” (고후 6장 16절) 말한다. 우리가 아버지의 거처가 된다고 말했으니 우리 속에 천국이 건설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거처가 곧 천국이다.
“예수께서 대답 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지 아니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18장 36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장 2-3절)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가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에 제자들이 거할 처소가 있을 것이지만 확인해 보고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이다. 천국은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멀리 하늘을 더듬어서는 찾을 수 없다. 천국은 오히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안에도 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통하는 문을 찾을 수 있고 눈에 보이는 차원 너머의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지 않는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Message No. 5.
낙원은 어디에 있을까?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when you come into) 나를 생각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42-43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은 천국을 낙원이라고 믿는다. 본래 낙원이란 의미는 바벨로니아의 한 왕이 메데에서 시집온 왕후를 위해 지은 거대한 정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왕이 자기 왕후를 위해 지은 정원이 어찌나 크고 아름답든지 모든 사람들이 그곳을 한번이라도 구경하는 것을 평생소원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종교를 초월하여 사람들 의식 속에 각인된 낙원은 평화의 땅이다. 죽음이 없다. 소멸이 없다. 탐욕도 없다. 경쟁이 없다. 풍요롭다. 미움이나 시기가 없다. 도둑질도 속이는 것도 없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으니 시작과 끝이 없다. 영원하다. 완전한 평화의 도성이다.
원인과 이유도 없는 곳, 모든 인간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곳,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곳, 모든 소원이 이미 이루어져 버리거나 소원이 있기도 전에 소원하는 것이 있어져버리는 곳, 소크라테스, 석가를 비롯하여 수많은 현자들이 일생을 바쳐 찾던 곳, 죽음이 없는 곳, 진정한 안식만 있는 곳, 지배가 없고, 속박이 없는 곳, 선만 있는 파라다이스(paradise)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낙원에 대한 이런 개념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 영적 본능에 의해 자연적으로 무의식에 들어있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본래 인류는 이런 낙원에서 시작하였다. 창세기 2장 8절을 보면 하나님이 지상에 낙원을 창조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에 에덴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창 2장 8절) 우리가 에덴을 낙원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의 왕래가 있었기 때문이며 평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근심 걱정이 없고, 미움이 없고, 경쟁이 없고, 사랑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생명과일 나무도 있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장 7절) 계시록에 소개된 낙원도 이와 비슷하다. 물론 계시록에 소개된 낙원은 영적 세계의 낙원이다. 영적 세계에 낙원을 모델로 물질세계의 낙원을 창조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실 때는 말씀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셨고,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생각을 통해 설계를 하셨는데, 그 설계의 모델이 천상에 있는 영적 낙원이었을 것 같다.
인간은 하나님이 조성해주신 낙원을 잃었다. 물질세계의 낙원이었던 에덴은 그를 관리하는 관리자를 잃고, 아무도 찾지 않고, 인간이 갈수 없는 곳으로 버려진 채 얼마를 버티다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물질세계의 낙원이 물질계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본래 물질계의 낙원을 조성하실 당시 그 모델로 사용했던 영적 세계의 낙원은 지금도 존재 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장 4절)
낙원, 비록 영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나라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낙원에 가기를 원한다. 그곳에는 근심, 걱정, 경쟁, 미움, 원망, 시기, 불행이 없기 때문이다. 평화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참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이 쉬리로다./주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기쁘도다./ 은 은혜를 영원히ㅣ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찬송가)
비록 영적인 세계에 있는 도성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낙원을 소망하고 있다. 성경은 낙원에 이르는 길을 알려 줬다. 낙원을 갈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그곳에 가면 영원히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의 말씀이시다.
십자가의 강도는 예수가 낙원에서 온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당신이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면 거기서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고 부탁한 것이었고 주님은 다른 말 하지 않고 (자격=죄) “오늘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는 말로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낙원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도성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그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셨다. 우리는 이승을 떠나면 바로 낙원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 일어날 일이다.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살 때도 낙원을 살게 하셨다. 우리 마음에 낙원을 조성하셨다. 낙원의 필수 여건인 평화와 사랑을 주셨다. 영원한 생명 과일을 먹도록 생명나무를 심어 주셨다. 성령이 바로 생명 과일 나무요, 생명 과일 열매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주님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셨다. 우리가 성령의 전이요, 집이라고 하셨다. 두려움 없이, 부족한 것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췄다는 의미다. 낙원을 살려면 그것을 보고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낙원을 소망하고 낙원에 살기를 선택하고, 낙원에 살게 해달라고 주님께 청하고, 매 순간 평화의 길을 따라 살기 시작 할 때 삶이 낙원으로 변화 되기 시작 한다.
Message No. 6.
태초는 언제를 말 하는 것일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Now the earth was formless and empty, darkness was over the sur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waters.” (창 1장 1-2)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당시 배경 설명이다. 땅이 땅의 형태를 얻기 전의 묘사다. 그러니까 어떤 형태를 갖지 못한 물질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도자기가 형체를 얻기 전엔 그냥 흙이다. 땅이 땅의 형체를 얻기 전의 상태다. 아마 그때는 시간이 들기 전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는 ‘언제’로 계산 할 수는 없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Darkness was over the surface of the deep)” 우주에 시간이 들어서기 전, 질서가 들어서기 전, 별이 들고, 달이 들고, 각종 법칙이 들어서서, 서로 서로 얽혀 거대한 형태가 되기 전, 그저 텅 빈 깊음 그 자체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 깊음을 어두움이 덮었다고 했다. 빛이 없는 우주 공간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우주를 거대한 하나의 형태라고 한다면 그 형태가 만들어지기 전의 상태다.
물(수분- 물방울- 물 덩어리)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신이 그 위를 운행하셨다고 한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태초, 그러니까 천지가 창조되기 전, 우주가, 우주가 되기 전의 우주다. 텅 빈 우주, 텅 빈 하늘, 텅 빈 공간이다.
태조에 대한 역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족들이 다 가지고 있다.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왔건, 기록으로 전해 졌건, 신화적이든, 전설적이든, 상관없다. 어떤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의 최초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모든 최초는 하늘의 신적 존재와 얽혀져 있다. 이집트든, 수메르든, 마야든, 태평양에 수장되어 있는 무 대륙이든, 아니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인류든, 모든 인류의 역사는 창조가 있어야 하고 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물론 역사는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고, 전달자나 전달받은 자의 이해관계나 주관적인 관점에 의해, 아니면 실수에 의해, 왜곡 되거나 뒤바뀔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인간의 지적 수준, 문화 그리고 이해력에 의해 인간이 신으로, 신이 인간으로 묘사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연결성이다.
우리 나라에도 그런 전설이 있다. 황국, 혹은 부도지 전설이 그것이다. 옛날 천상에서 천 상 사람이 한 포도 과일을 따먹고 죽게 되자 자기 무리들을 이끌고 그곳을 떠나면서 반드시 치유되어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고 그 천상사람들이 지구로 내려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는 전설이다. 거기에도 홍수가 나와 있다. 사방팔방이란 세계 우주 곳곳 물질세계 전체를 의미한다. 수메르의 전설에도 홍수에 의한 멸망이 등장한다.
성경에 나와 있는 창조 역사는 유대인들의 역사에 들어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이 쓰여 질 당시 그리고 당시 존재 했던 수많은 외경들과 서신들 그리고 문헌들 가운데서 특정 기록(구약 포함)들을 성경으로 채택할 당시 특수한 로마의 정치상황아래서 기독교가 인류 창조에 대한 기록으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역사를 받아들였다.
어쩌면 문자가 없는 세대에 수백, 수십만, 수천의 세대의 일을 오류 없이 기억으로 보존하고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민족이 그렇듯이 그들이 천지창조 역사를 자신들을 중심으로 미화시키거나 꾸며 놨을 수 있다. 유대인들도 아브라함 시대 이전까지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도 없었고, 그저 지구상에 떠도는 민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설령 시대적인 압축이나 어떤 사건들이 빠졌거나 삽입되고 편집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섭리와 성경의 존재 목적(요20:31)을 고려할 때 인류의 창조 기원에 대한 사건을 창세기에 나와 있는 그대로 알고, 그렇게 믿어도, 의로 교육되고 영생으로 가는데 지장이 되지 않기에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영지주의다. 그리고 여기서 파생된 마르시온 주의, 자연주의등도 빼 놓을 수 없다. 영지주의는 365 영지들 중 지혜라는 영지가 그의 개인적 야망, 실수, 때문에 인간을 창조(유산)했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그런 스토리를 어떤 기록이나 구전을 통해 조상으로부터 전달받은 것이 아니라 명상을 통해 우주의 영을 만나 직접 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타락한 육체라는 물질에 감금된 영혼이 구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육체를 죄악시하고 계속 영계의 어떤 매체와 교류를 하고, 금욕 생활을 하고, 명상을 하고 기도를 한다.
그들은 스스로 영적 계급(레벨)을 만들고 그 구조를 조직화 했다. 최고의 지성을 가진 엘리트만 높은 경지에 이르러 영적 매체들과 일체를 이루어 교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영적 매체가 어떤 종류의 영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영이 모두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많은 곳에서 이와 비슷한 행위들을 행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는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시험하라.” ‘체험이라고 다 믿지 말고 그 체험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시험하라.’ ‘평화라고 다 믿지 말고 그 평화가 하나님께 속했는지 시험하라.’ ‘사랑이라고 다 믿지 말고 그 사랑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시험하라.’ ‘자유라고 다 믿지 말고 그 자유가 하나님께서 온 자유인지 시험하라.’
성경에서 말하는 태초는 우주가 탄생하기 전을 의미한다. 우주에서 우주선을 타고 신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온 우주인이 아니라 바로 모든 우주의 우주 하늘, 그 우주 사람들의 조상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탄생하기 전을 태초라고 명명하고 있다. 물질계의 모든 것이 있기 전, 이 우주에 시간이 들어오기 전, 땅이 있고 바다가 형성되기 전, 바로 그때가 태초라고 했다.
그러나 태초가 물질계가 있기 전 물질계가 시작된 시점으로 봐야 할지, 시간이 있기 전, 시간이 시작된 시점으로 봐야 할지는 이는 학자들마다 다르다. 분명한 것은 성경에서 말한 태초는 인류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시작이 천지나 우주의 시작을 의미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엇을 태초라 하건, 하나님은 태초에 계셨고, 만물은 그분에게서 왔으며, 그분은 시작이 없고 끝이 없다는 것이다.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는 이들에게만 분명하게 받아들여 질 불변의 진리이다.
Message No. 7.
하늘들에 대한 창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영어 성경: God created the heavens (“하늘들” 이란 표현에 주목) and the earth.)”
여기서 하나님이 ‘하늘들’을 창조 하셨음에 주목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지창조에 대한 이해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 대한 입장이 확실하지 않으면 초보적인 과학적 지식이나 고고학적 지식을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은 분명 한 개 이상이다. 그것이 이 우주 속에 있는 은하계 밖의 어떤 하늘을 의미하는지, 다른 행성에 있을 하늘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존재하는 모든 행성의 하늘을 의미하는 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하늘들을 창조했다고 한다면 태초에 창조한 하늘이 하나 이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계시록에는 하늘 속의 하늘이 등장한다. 바울도 어떤 사람을 소개 하면서 그가 셋째 하늘을 체험했다고 했다. 그곳에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에베소서 4;10에도 하늘들 (Heavens) 이란 복수 명사를 썼다. 스데반은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스데반이 본 하늘은 우리가 쳐다보는 하늘이 아닌 영의 눈으로 보는 하늘로 여겨진다. 영적 세계가 어떤 차원인지, 어떤 껍질을 벗으면 보거나 갈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깊은 기도 상태에 대해 묘사한 성인들의 표현 속에 그들의 깊은 기도속에서 그들이 체험한, 어쩌면 영적인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다른 하늘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스데반도 바로 그러한 하늘을 말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창세기에 표현한 “하늘들”이 그러한 영적 하늘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지구에는 한 하늘만 있다. 그 하늘은 네 째 날에 만든 하늘이다. 그 하늘(우주공간)에 모래알 같이 많은 별과 달과 해가 떠 있다. 하나님은 물만 있는 곳에서 물을 원소로 하여 천지 창조를 시작하셨다. (창 1:6, 벧후 3:4-5, 시24:2, 시 136: 6)
과학의 발견에 의해, 우리는 우리의 행성 밖에 또 다른 수 많은 행성들이 있고, 그 행성들에게는 각각의 행성의 하늘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에 나온 ‘하늘들’이란, 어쩌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하늘을 포함 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그리고 우주에는 아직 인간의 머리가 헤아려내지 못한 수많은 법칙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만약 ‘하늘들’ 의 창조를 이처럼 거대한 우주 창조로 이해한다면 성경의 천지창조를 훨씬 깊이, 그리고, 과학과의 마찰 없이, 과학을 초월하여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여호와의 이 거대한 천지 창조 혹은 우주 창조 그리고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그 안의 법칙을 어찌 다 알 수 있으며, 설령 알 수 있다고 해도 말이나, 이론이나,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설명을 할 수 있다 해도 누가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많은 신학자들은 창세기 1:1절의 하늘들에는 이승의 하늘과 저승의 하늘, 즉 영계의 하늘들(어쩌면 4차원 5차원 6차원으로 표현될 수 있는) 그리고 그 안에 속한 영계의 피조물들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영계의 피조물이라 함은 천상계의 천사를 비롯하여 스랍, 구릅, 군대, 불말, 불 병거, 생물, 짐승 등등 영계의 모든 식구들을 총칭한다. 그러나 성경적 뒷받침이 부족하다. 주장은 주장일 뿐이다. 주장이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다른 상상의 공격을 견디어내지 못한다. 신비는 신비로 놔둬야 숨을 쉰다.
그렇다면 정말 영적 하늘들을 천지 창조 때 창조하셨을까? 또 창조하였다면 창세기에는 왜 그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을까? 인간이 알 필요가 없어서? 혹은 창세기 저자가 인간 세상의 일이 아니라 누락, 아니면 몰라서…? 그렇다면 어디에서 영적 세계까지 들어간 창조 기원에 관한 기록을 얻을 수 있을까?
창세기는 인간을 위한 기록이다. 천사나 하늘 군대 그리고 그를 수종드는 다른 천상식구들이 언제 창조 되었는지에 대한 지식이 인간에겐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의 식구들이 인간보다 먼저 창조 되었는지 아니면 후에 창조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으셨다.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영계든, 육계든, 존재한다는 것은 창조가 있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천지 창조 전에 영적 세계나 그 식구들을 창조 하셨다면 천지 창조 때 만든 또 다른 하늘들은 어디, 어디를 지칭하는 것인지?
창조 전 “하나님의 신이 수면(water)위에 운행하시니라” 라는 기록을 근거로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던 곳의 물이 창조 전 이미 있었던 물질이었는지, 아니면 영적 물질을 말하는 건지? 영적 세계에서 물질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건지? 아니면 영적 세계에서 이미 존재하던 물질세계를 방문하셨다는 건지? 그리고 영적 세계에 존재하는 영역도 천지창조 때 나누셨다는 건지? 각 영역 혹은 차원 마다 하늘이 있다는 건지? 불완전한 추리로만 대답이 가능하리라.
인간이 의로 바르게 교육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지식의 영역은 어디까지 일까? 성경은 영적인 생명을 담은 중생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직면할 비성경적인 창조논리를 예상했을까? 왜, 그것까지는 영감해 주지 않았을까?
우리는 태초에 대한 창조를 이해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일단 하늘(우주)과 하늘에 있는 법칙과 땅과 땅의 있는 법칙과 그 땅속에 있는 미생물, 그리고 땅의 속성을 함께 창조 하셨음을 믿는다. 그러나 이런 믿음에 대한 영역이 우리가 의로 교육되어 이 땅에서 평화와 사랑을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세계로 가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음 또한 중요한 fact임을 알아야 한다.
Message No. 8.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 하늘 군대가 필요했을까?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계19:11-15)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님의 군대’ 의 등장이다. 만일 하나님이 하늘들을 창조 하실 때 하늘의 군대나, 천사나, 불 병거나, 불 말들을 창조 하셨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 스스로 있는 자가 군대를 필요로 했을까? 아니면 거느리게 되었을까?
인간의 개념으로 군대는 침략자로부터 어떤 영역을 방어하거나, 어디를 침략할 때 필요하다. 평화의 나라, 사랑의 나라에서는 법도 군대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 상식이다.
여호와는 애급을 치실 때 하늘 군대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또 호위천사나 수종드는 천사를 거느리고 나타나시지도 아니하셨다. 홍해를 가를 때도 외부의 힘을 이용하지 아니하셨다. 이집트에서 탈출 시킬 때는 스스로 구름을 불러 기둥을 만들고, 불을 불러 기둥을 만들고, 바람을 불러 물을 갈랐다. 여리고 성을 허물 때도 하늘 군대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소리를 지르게 함으로서 성벽을 허물어지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불이고, 군대고, 하늘의 무기였다.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광야에서 처벌하실 때도, 땅이 갈라져 타락한 이들을 삼키게 하였지, 그의 천사들이나 군대로 하여금 땅을 가르게 하지 않으셨다. 성경에는 에녹을 데려갈 때, 그리고 엘리야를 데려갈 때, 하나님이 불 병거를 사용했고 여호사밧 왕 때 이스라엘이 이방 군대에 포위당했을 때 하늘 군대가 적군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적군들의 정신 상태를 혼란시켜 서로를 적으로 보이게 해서 서로를 향해 칼질을 하게 한 장면도 들어있다. 엘리사가 하늘의 불로 그를 잡으러온 군대를 태워 죽이는 장면도 들어있다. 그러나 그 불이 하늘의 불 병거를 의미하는 건지 그 불이 하늘 군대를 의미하는 건지는 모른다.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로 인간세상에서 일을 하실 때, 거의 대부분 인간의 손을 빌리고, 인간의 입을 통해 일을 하셨다.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였다.
하늘 군대가 인간의 군대를 죽였다는 기록은 있어도 어떻게 전쟁을 했는지에 대한 전쟁 장면은 나와 있지 않다.
인간 군대의 마음속에 들어가 정신 착란을 일으켜 서로 죽이게 한 것이 하늘 군대였는지?, 하나님의 영이었는지?
하늘 군대가 인간 군대를 상대로 전쟁을 하기 위해 창조 되었는지?, 하늘의 적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기 위해 만드셨는지? 어려운 질문이다.
그 점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신격을 훼손하려는 목적을 가진 그룹에서는 인간이 믿는 하나님은 우주의 다른 행성의 우주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하늘 군대가 그들의 군대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주 안에 있든, 우주 밖에 있든, 물질은 물질이다. 영이 아니다. 원인이 있는 존재, 영이 아닌 것은 신도 아니고 신이 될 수도 없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다 영인 것도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가 신이 아닌 것과 같다.
성경에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쫓겨난 타락한 천사(루시퍼)얘기가 나온다. (계 12:7-9) 이를 통해서 천상에 어떤 영적 분쟁이 있었다는 것과 하나님을 대적한 사탄이 상징적인 비 실체의 상상물이 아니고 어쩌면 실제로 존재하는 악이라는 것을 성경은 알려준다. 그 사탄이 인간 세상으로 내려 왔다는 것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사탄 역시 영이기에 그가 인간 세상에 내려 왔다면 인간의 형체 안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고,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처음부터 예수님의 출생처럼 인간의 형체를 입고 태어났을 수도 있고, 성령이 우리 속에 임하여 거하시는 것처럼 인간 속에 들어가 거할 수도 있다.
또 하나, 천상에서 천사의 타락이 언제 있었는지?, 천상에서 미카엘 천사장과 사탄이 싸울 때 어떤 방식으로 싸웠는지? 그리고 왜 하필 사탄이 인간세상으로 쫓겨났는지? 왜?, 언제?, 그리고 언제 불말, 불 병거를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누가 타기 위해 만들었는지 …?
문제는 천지 창조 직후 사탄이 뱀을 통해 화와를 유혹한 점이다. 이 말은 이때 이미 사탄이 지상에 있었다는 뜻이고, 천지 창조 전 혹은 직후, 천상에 전쟁이 있었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늘의 영체들은 천지 창조 이전에 만들었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도 성경적 근거가 없다. 다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고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기까지 많은 시간이 지났을 수 있다는 것만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시점이 천지 창조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후라면 사탄의 타락이 그 사이에 있었을 수 있고, 천상의 전쟁도 그때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질문이 나타난다. 만일 하나님이 천지창조 때 하늘의 천사와 군대를 창조하셨다면 이때 하늘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았을까? 여기에는 또 하나님의 전지성과 상충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나타난다.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이 승천 후 영적 세계에서 곧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이다. 거기에는 창세기와 짝이 될 수 없는 많은 등장인물과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성경은 계시이고, 그래서 지상의 기록이지만 영적 기록이고, 지상에 있지만 하나님에게서 나온 신령 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는다. 이때 하늘의 군대를 창조 했건, 다른 때 창조 했건, 그것은 중요 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과 별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꼭 알아야 할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성령이 오셨다고 하고 있다.
즉, 성경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진리와 모든 법칙, 모든 역사를 다 서술하는 학술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 많은 진실과 진리 중, 우리를 바르게 하고 ‘의’로 교욱 하기 에 필요한 만큼만의 에센스를 기록하여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전수되게 하였다는 점이다.
그것으로 만족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