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복음 (1) 회개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1.

회개:의식의 감옥에서 벗어나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4: 17)

성경은 66권으로 되어있다. 신약이 27권이다. 그 가운데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공관복음이다. 그 중, 예수님의 설교식 가르침은 산상 수훈이다. 산상 수훈의 핵심은 여덟 가지 (8) 복으로 꾸며져 있다. 이는 인류를 하나님의 자녀라 칭하면서 주신 메지지다. 나머지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과 그 행적에 부속된 말씀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속성을 행위를 통해 나타내 보이시는 ‘입증 적 행동’이다. 사도행전과 요한 계시록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편지(서신)들이다.

예수님께는 3년 동안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행하신 일을 직접 본 수많은 제자들(12제자, 70인, 나사로, 유식한 여성제자들)이 있다. 그들도 예수님이나 자신들의 행적에 대해 기록들을 남겼다. 서로 주고받은 서신들이 그것이다. 20세기에 2000여년간 숨겨졌던 사해에 보관 되었던 고 문서들의 발견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각자 남긴 문서들이 수천에 이르고,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서와 서간문등은 로마 통치 하의 교권에 의엄격한 선택 과정을 통해 선택 되어 성경에 포함된 것임을 학자들을 통해 알려져 왔다.

그 많은 기록 가운데 공관복음을 제외하면 성경으로 채택된 제자들의 기록은 단 4명의 아주 짧은 서신들뿐이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 후, 제자들을 박해하다가 주님의 환상을 본 후 독학으로 복음을 깨달은 바울의 편지가 대부분이다.

구약은 신약의 예수님을 위해 존재한다. 제자들의 모든 서신들도 예수님께서 외치신 복음을 위해 존재한다. 예수님 없이 성경은 성경이 될 수 없으며 예수님 없이 복음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의 복음은 대부분 비유고 암호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진리다. 천상의 진리고, 우주의 진리고, 지상의 진리다. 예수님은 그 비유와 암호를 성령께서 알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외치신 복음을 요약해보면 첫째 회개의 복음이다. 예수님께서 외치신 회개는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의식과 삶의 구조를 바꾸라는 것이다. 과거의 구습을 벗으라는 것이었다. 둘째는 자유의 복음이다. 인간을 옥죄고 있는 모든 의식, 체제, 제도, 문화, 세속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고정된 관념과 의식, 형식, 형태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허상이고 아무 쓸데없는 것이니 그들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 악, 불안, 미움, 등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포함된다.(히10:21-22) 세상을 지배해온 힘 있는자들이 만들어 가두어놓은 죄의식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고,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용서의 복음이다. 자유가 용서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내가 나를 용서하고 내가 남을 용서하므로 자신이 용서를 받는, 그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용서를 주셨고, 용서를 하게 하셨다. 넷째는 사랑의 복음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들고 온 질투와 분노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다.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다섯째는 평화의 복음이다. ‘평화’, 궁극적으로 그분은 인간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신 평화의 왕이요 평화의 창조자이심을 가르쳐 주셨다. 평화를 주기 위해 죽음을 없앴고, 영생을 내리셨음을 전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처럼 연결되어 있다. 회개, 자유, 용서, 사랑, 평화 이는 한 가족이고 한 그룹이고 한 몸이다. 만일 이 중 하나가 쓰러지거나 아프다면 다른 지체들도 아프게 된다. 하나가 쓰러지면 모두 쓰러진다.

회개가 없는 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진정한 자유가 없는 곳에 진정한 용서할 수 없고, 용서가 없는 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진정한 자유가 없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와,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사랑이 없는 곳에 진정한 평안이 있을 수 없다. 이는 천상의 진리이면서 우주의 진리이고, 우주의 진리이면서 지상의 진리다.

예수님의 시대 상황은 두려움의 시대, 불행의 시대였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 신분의 격차가 너무 컸다. 소수의 지배계급은 일을 하지 않았고, 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노예처럼 일을 했다. 문제는 정신이다. 백성들은 종교지도자들이 불어 넣어놓은 무거운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노예였고, 육체적으로도 노예였다. 그들은 그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줄을 몰랐다. 모든 의식이 죄의식에 꼭꼭 묶여 있었다. 그들은 힘들게 노동해서 얻은 수익 물을 성전에 갖다 바치고 제사장이나 그 관계자들로부터 인정이나 칭찬을 얻어 잠시 죄의식에서 쉼을 얻는 것뿐이었다.

평화가 없었다. 바로 이들에게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외치셨다. 천국은 낙원이다. 천국은 자유의 왕국이다. 천국은 평화의 왕국이다. 평화의 왕국에선 누가 누구를 억압할 수가 없다. 어떤 제도도, 어떤 형식도, 어떤 전통도, 어떤 계급도, 누군가를 억압하기 위해 사용할 수 없다. 그런 제도 자체가 없다.

천국은 제사가 필요 없다. 천국은 누군가에게 명령하고 명령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법이 없으니 죄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만 순종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의로운 것들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왕국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할 이유도 없다. 제물을 드리기 위해 굶주려야 할 이유도 없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그러나 주님이 천국을 가져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칠 당시 사람들은 그 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구약에서 그림자처럼 전해지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것이 설명 된 것은 아니었다. 영적 본능에 의해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만 유대인들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구약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한 것이라면 신약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로 시작한다. 예수님 시대를 여는 세례요한의 복음이 회개였다. 예수님의 복음도 회개로 시작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은 낙원이다. 잃어버린 낙원이 곁에 와 있다는 말이다. 영원한 낙원이 바로 곁에 와 있다는 말이다.

아무도 올가미를 씌울 수 없는 곳, 무거운 죄의 멍에를 메고 비틀거리지 않아도 되는 곳, 제사장들에게 제물을 갖다 바치지 않아도 되는 곳, 사람을 섬기지 않아도 되는 곳, 의시 대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곳, 그 나라가 천국이다. 그 나라가 바로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다. 그 나라를 입을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2.

회개의 열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3:8)

‘아브라함의 자손’, 그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다. 이제는 그런 것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의식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고 새 시대가 왔다는 의미다. 진정한 회개에는 반드시 열매가 따라오게 된다. 마음에서 일어나야 할 의지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온 “속으로” 는 유대인들을 오래 동안 지배해온 의식, 자신들은 선택된 자손 즉 선민이라는 생각의 감옥 속에 갇혀 항상 속으로 “자신들이 남보다 더 났다는 생각”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민족을 “이방민족”이라 칭하며 차별해 왔다. 그런데 주님은 이제 그런 것 쓸데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 의식이 잘못 됐다는 의미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한 것은 행동을 통해 삶에 ‘의’를 나타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서는 의가 없었다는 얘기다. 의 없는 민족이었다는 의미다. 의가 없다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

회개의 열매란 어떤 것일까? 회개란 영어로 Repent, Returning from, (행2: 38, 행3:26, 3:19)이란 말이다. Repent는 어떤 행위에 대한 후회를 암시하며, Returning from 이란 어떤 길에서 돌아오는 것을 의미 한다. 회개에는 3가지가 동시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첫째 잘못에 대한 인지 (perceiving), 둘째 즉시 돌아서려는 결심 (determination), 셋째는 수반되는 행동 (action) 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그 열매가 회개의 징표로 나타나게 된다.

진정한 회개의 과정을 시작 하기 위해서는 진실한 후회가 있어야 한다. 무엇을 후회 하는가?

먼저 창세기 3장 17절에 타락한 후 인간이 살아가야 할 방식이 나와 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네가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낼 것이요 너는 종일 수고 하여야 ” 이는 인류가 생존 경쟁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연과 인간과 경쟁하며 서로 뺏고 뺏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밀림의 법칙이라고도 부른다.

경쟁적 마음 – 이것은 예수님이 회개를 외칠 당시 유대인의 마음에 구축된 습관이었다. 그들의 선민사상은 그들을 망친 허상이었다. 악이었다. 그들은 선민사상의 노예가 되어 (사로잡혀) 계산과 논리와 교만과 이기심으로 세상을 살고 있었다. 양심이 죽어 회칠한 상태였다.

그들은 율법을 이용했다. 지배계급은 율법을 이용해 약자의 것을 빼앗아 부요한 생활을 하였다. 제사 제도를 이용하여 백성을 수탈하는 방법을 개발했고, 이자놀이를 이용하여 가난한 자를 갈취하였다. 땀 흘려 일하지 않고 사는 방법, 이것이 그들이 만든 삶의 습관이고 이들이 걸어가던 인생길이었다. 도둑질을 하면서도 그것이 허가된 신의 축복으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갈취당하면서 사는 백성들은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신이 자신들에게 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그 운명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바꿀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주님은 둘 다 모두에게 회개를 외쳤다. 둘 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한번 바라보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적 모상이 죽어버린 상태, 이는 양심이 죽은 상태다.  현대인의 마음을 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그런 의식과 삶을 회개하라고 했다. 그런 제도권 아래서 뺏기면서 사는 자도, 뺏으면서 사는 자도 회개하라고 했다. 그런 삶의 방법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단순한 행동의 변화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가르치셨다. 스스로 깨닫고, 믿고, 벌떡 일어나라고 외쳤다.

시대가 바뀌면 법칙도 바뀐다. 천국에는 뺏는 자가 없다. 빼앗기는 자도 없다. 낮은 자도, 높은 자도 없다. 모든 것이 사랑이고 평화다. 경쟁의 방법이 아니라 은혜의 방법으로 살아간다. 경쟁의 법칙으로 사는 시대는 지났고, 새 시대가 왔으니, 새 시대에 맞는 법칙에 적응하기 위하여 헌 법과 헌 구습을 벗어버리라고 외치신 것이다.

회개가 없이는 인간의 중생도 인간의 영생도 있을 수 없다. “회개하라” 는 외침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빗어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던 하나님의 바로 그 말씀이다. 사람 마음에 천국을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기초공사다. 천국을 짓기 위해 내는 연장소리다. 책망이 아니라 축복의 소리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흙이여,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지어다. 흙이여, 하나님의 소리를 따라 모아지고 빗어져서 하나님의 생기를 기다릴 지어다. 너희의 의식을 둘러싼 올가미를 벗어버리고 죄책감에서 나올지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착각의 감옥에서 벗어날 지어다. 의인이라는 교만의 올가미에서 벗어날지어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악한 길이란 강도질 하러 가는 길이 아니고 뿔 달린 악마가 가는 길이 아니다. 성경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길이 악한 길이라고 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사는 삶이 악한 삶이라고 했다. 자유를 느끼지 못하고 억지로 걷는 인생길이 악한 길이고, 죄의식이라는 옥에 갇혀 사는 삶이 악한 삶이라고 했다.

왜 죄의식을 느끼고 사는 길이 악한 길일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의 노예가 되라고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하보다 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화, 창조의 영을 불어넣어 만들었기 때문이다.

악한 길은 자기를 잃고 가는 길,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남이 가는 길을 따라서 가는 길, 많은 사람들이 목적지를 모르고 가는 길, 육적인 본능을 위해 가는 길, 항상 경쟁을 하는 길, 나 혼자 전전긍긍하며 가는 길이 악한 길이다.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고, 부족을 느끼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탓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부러워하면서, 힘들게 사는 삶이 악한 삶이라고 했다.

천국의 길이란 사랑과 용서와 평화의 길이다. 한계와 빈곤이 없는 길이다. 그 길은 자유의 길이다. 그 길은 감사의 길이다. 그 길은 자비의 길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의를 위하는 자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그 길은 성령님과 함께 가는 길이다. 그 길은 성령의 손을 잡고 가는 길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음을 정화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돌아서서 정화된 자들이 가는 삶의 길로 들어가자는 것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3.

회개한 자가 가는 길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나서 나를 쫓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니라.” (마19:21-22)

한 부자 청년이 주님을 찾아와 영생의 길을 물었다 주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했고 그 청년은 모든 계명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했다. 이에 주님이 그러면 가지고 있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하자 근심하며 돌아가는 장면이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바로 그가 살아온 삶의 패턴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옛 구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의식을 힘입으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이다. 이 청년은 회개의 핵심으로 갔을 때 주저주저 하다가 끝내는 회개하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다.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회개는 마음을 비우는 회개를 의미한다. 완전히 털어내는 의식을 의미한다. 이는 주님이 산에서 가르친 산상수훈과도 연결이 있다. 완전한 회개의 결과가 예수님이 약속하신 여덟가지 복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게 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회개를 하면서 부분적인 회개만을 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들이 할 수 있는 회개만 한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은 묻어주고 외면하고 쉬운 것만 회개를 한다. 또한 묻어둔 어두움을 보지 못하여 회개하지 못한다.

진정한 회개는 삶의 패턴을 통째로 바꾸는 것이다. 기존의 자기 자신의 모습과 패턴을 알아보는 그 작업은 주님 앞에서 자기를 바라 볼 때만 가능하다.

주님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나를 보신다면 뭐라고 할까? 내가 주님이라면 나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부자 청년은 주님을 만나기 전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에 대한 채점을 끝냈을 수가 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심장의 곡을 찌른 것이다. – 부- 이는 악도 되고 선도 된다. 여기서 주님이 한 말에 주의할 것이 있다. 그렇게 하였을 때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한 부분이다. 이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일단 참 회개가 이루어지면 그곳에는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야 영생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회개의 삶이고 이것이 회개의 열매다. “지극히 값진 진주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주님이 인간의 마음에 오시기 전 만들어진 삶의 패턴은 옛 구습이다. 그 패턴으로 얻은 것은 다 버려버려야 한다. 의가 아닌 것으로 모은 것은 다 보내버려야 한다. 불의의 삯이기 때문이다. 옛 구습을 벗어버려야 새 삶의 모습을 만들 수 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옛 습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주권자가 바꿔져도 바꿔진지를 모른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을 해도 우리는 알아듣지를 못한다. 새로운 법을 따라야 하는데도 옛날 법을 따라 살려고 한다. 경쟁의 시대가 막을 내렸어도 막을 내린지를 모른다. 그래서 새 법을 어긴다. 새 시대 새로운 법칙과 마찰을 한다.

회개란 책망이 아니다. 겁주는 것도 아니다. 회개의 복음은 영생의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요 봉화요, 횃불이다. 일어나 씻고 새 날을 맞으라는 사랑의 목소리다. 시대를 알리는 나팔소리요,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다. 인류여, 잠에서 일어나라, ‘이제 깨어나야 할 때다.’ 인류의 잠든 의식을 흔드는 사랑의 목소리다. 옛 구습은 사랑과 평화가 없는 구습이다. 옛 구습은 원죄다. 원죄는 병이다. 그 증상은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아담에서부터 인간에게 전이되어온 병이다. 그것을 성경은 사망의 독이라고 말한다. 모든 불행의 원천이다. 두려움을 비롯하여 의심, 미움, 원망, 부족, 수치, 시기, 질투 등등, 인간의 모든 부정적인 에너지가 바로 여기에서 만들어진다. 인간이 넓은 길을 가게 된 것도, 무엇을 붙잡으려 하는 것도, 두려움 때문이다.

법칙을 어기면 생의 구석구석에서, 생의 발자국 발자국에서 파열음이 생긴다. 그래도 원인을 모른다. 자기 곁에 있는 복지를 실감 못하고 누리지를 못한다. 땅이 바꿔졌어도, 하늘이 바꿔졌어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인생이 더 이상 척박한 땅이 아니고 더 이상 가시덤불을 내지 않고 엉겅퀴를 내지 않는 땅인데도 알지를 못한다.

한 농부가 아주 척박한 땅을 갈고 있었다. 하루 내내 땡볕에서 땀을 흘리며 노동을 해야 겨우 자기 가족의 필요한 양식을 수확 할 수 있을 정도의 척박한 땅이었다. 그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 노동을 해서 먹고 살다가 나이가 들면 죽는 것이 정해진 운명 같은 사람이었다. 한 광산업자가 땀 흘려 일하고 있는 그 농부 곁을 지나가다가 그 농부의 땅 속 깊숙이 금광이 들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농부가 불쌍하여 그 사실을 알려줬다. 농부는 많은 갈등 속에서 그 밭에 있는 돌과 바위들을 걷어내고 땅을 파서 땅 밑에 묻혀 있는 금광을 캐냈다. 그리고 부자가 되었다.

인간은 수만, 수십만 년을 인생은 빈곤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자기 마음속에 얼마나 진귀한 금광이 묻혀 있는지 모르고 날마다 돌과 잡초를 뽑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우리 속에 주님이 계시고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 인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의 마음은 금광이 묻혀있는 농부의 척박한 땅이다. 그곳엔 인간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진귀한 보물들이 들어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그곳에 다 들어있다.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꺼내 쓸 줄을 모른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히11:6)

새 시대, 새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바꿔진다. 법도 바뀌고 구습도 바꿔진다. 옛 구습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나라를 볼 수 있고 새로운 구습을 만들 수 있다. 육체의 정욕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새 삶을 만들 수 있다. 두려움 없이 사는 새로운 패턴을 만들 수 있다. 미워하지 않고 사는 삶, 원망하지 않고 사는 삶, 질투 없고, 부러움 없는 평화의 삶을 만들 수 있다. 사랑의 삶을 만들 수 있다. 옛 마음과 생각에서 벗어나고 옛 계명을 버려야 새 계명을 따라 살 수 있다. 천국은 새 생명이다.

요일3:23-24에 새 계명이 나와 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뺏는 법칙에서 주는 법칙으로 바뀐 것이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4.

회개의 방법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행 19장 9절)

삭개오가 주님을 만난 후 선언한 말이다. 부자 청년과 대조를 이룬다. 오늘날 회개의 대표적인 인용문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당시 세리 장은 로마의 관료다. 로마를 대신해서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는 일이 세관원의 일이다.

유대인들은 그런 세관원들에게 ‘죄인’이라는 예명을 붙여줬다. 아마 로마를 위해 자신들이게 세금을 걷기 때문에 붙인 별명이었을 것이다. 삭개오는 어린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눈에 죄인이었다. 어쩌면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난다. 그는 처음부터 주님을 만날 생각을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자 했을 뿐이다. 그래서 주님이 지나가는 길가 뽕나무에 올라갔다. 그런데 그런 그를 주님이 불러준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자진하여 그의 집에 거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는 영광중의 영광스런 소리를 들은 것이다. 한쪽에서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수근거림이 있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려고 들어갔도다.” 어쩌면 그것을 삭개오도 들었는지 모른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자 말자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 갚고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선언한다. 자진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것이 회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죄를 알려줘도 변명과 부인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삭개오는 자진하여 “만일 남의 것을 토색했다면…..” 주님을 모신자의 최소한의 매너를 보여준 것이다.

그는 주위에서 수근 대는 소문을 개의치 않았다.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라는 변명도 하지 않았다. “나, 삭개오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라고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도, 변명도 없이 무조건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만일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를 갚겠다고 했다. 주님 앞에서 자존심 내려놓고 죄인임을 전제로 자기를 한번 훌터 보겠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순전한 회개다.

어쩌면 그는 누구의 것도 토색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전제하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그가 모르고 지었을 수도 있는 죄에 대한 인정이다. 이런 마음이 겸손이다. 이런 마음은 그리스도를 처음 대하는 자가 가져야할 매너고 예의다. 물론 이 마음은 주님과 자주 만나고 아주 가까워짐으로서 변할 수 있다. 처음엔 죄인으로서, 다음엔 친구로서, 다음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

그는 주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정결케 했다. 주님께 가까이 가기 전 취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도둑질은 율법에 속한다. 이는 생존 경쟁의 법칙에서 왔다. 선을 심으면 선을, 악을 심으면 악을 추수하게 된다는 것이 율법이다.

어떤 도둑이 남의 것을 훔쳐 자기 자녀들에게 나눠 줘버리고 자기는 감옥에 들어가서 형을 사는 경우가 있다. 반드시 이 세상 아니면 저 세상에서 대가를 받는다. 그 자녀들도 이 세대 아니면 오는 세대에 그 대가를 지불 받게 된다. 이것이 우주의 원리이다. “너희가 호리라도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하리라”

자기가 심은 악에 대한 악을 추수하지 않으려면 그 값을 치러야 한다. 율법에는 도둑질에 대한 값은 4배로 되갚는 것으로 되어 있다. 꼭 4배가 아니라도 갚아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갚아야 한다.

갚는 방법이 있다. 미움은 일곱 배의 사랑으로, 원망은 일곱 배의 감사로, 시기는 일곱 배의 존경으로, 질투는 일곱 배의 칭찬으로 갚을 수 있다. 교만은 겸손으로 탐욕은 자선으로 해결할 수가 있다.

생각으로 만든 악은 생각으로 갚을 수 있지만 행위로 만든 악은 행위로 갚아야 한다. 만일 그 인간에게 갚는 것이 불가능했을 때는 어떻게 될까? 대리로 다른 이에게 갚아야 한다. 어차피 우주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다. 자기 주위의 제일 필요한 자가 하나님께서 갚으라고 지정해준 사람이다.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 중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겠다고 했다. “가난한자에게” 이는 성령의 역사다. 자선은 하나님의 의와 빛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주님을 모시기 전 그는 그의 생 안으로 천상의 빛을 모셨다. 마음을 청결케 하였다. 그날 밤 주님은 그의 집에서 잔치를 했다. 먹고 마시며 웃고 즐거워했다. 회개는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결심을 하면서 산다.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결심이다. 회개에 대한 결심은 즉각적인 것이다. 미루지 않는다. 내일 부터가 아니라 지금 부터다. ‘지금 당장 이렇게 하리라’ 이다. 즉시 돌아서려는 결심을 해야 회개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리라”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털털 털고 일어나서 걸어가는 결심이다.

아는 것은 지식이다. 지식은 습득한 즉시 사용하여야 산지식이 된다. 움직이지 않은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죽은 지식은 생명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지식이 살아야 사랑과 평화를 생산해 낼 것이다.

행동은 결심의 산물이다. 행동이 있어야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된다. 행동이 없는 결심은 죽은 것이다. 행동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믿음이 필요하다.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행 2:38)

십자가의 강도는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해 주소서” 회개는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것이다. 너무나 쉽다.

회개하는 방법은 이렇든 다양하다. 틀이 없다. 형식이 없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사랑 합니다” 모두 다 회개다. 옥합을 깨뜨리는 것도 회개라고 했다. 회개가 있어야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된다. 영생을 불어넣어 주신다. 새 생명을 주시고 성령을 주신다. 주님이 거하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전을 건설할 수 있다. 천국이 될 수 있다.

사랑과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  No. 5.

자유의 복음 (1)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장 31-32)

‘진리’는 예수님을 의미하고 ‘자유하게 하리라’는 당시 사람들이 자유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인 것 보다는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노예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한 번도 노예가 된 적이 없다는 말로 반박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악의 노예가 되어 의를 행하지 못하고 있는 비참한 참상을 보셨던 것이다.

노예란 주인이 있다는 말이다. 악은 결코 의를 지시할 수 없고 선을 지시할 수 없다.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것 외에 스스로 어떤 것을 창조하거나 생각해 낼 능력이 없다.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할 자유가 없는 자들이다. 의를 보고 의를 행하려 하다가도 죄의 충동이나 지시나 명령이 떨어지면 그 지시대로, 습관에 따라 행동해 버리는 혼령 없는 좀비가 악의 노예다. 죄와 악의 아바타, 이것이 노예들의 실상이다.

미국의 헌법은 인간의 기본권 보호를 최우선으로 설계되었다.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그리고 집회의 자유가 그것이다. 미국 수정 헌법 제 1항에 담고 있다.  지구상의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인간의 자유는 그 나라의 형태를 구성하는 최우선의 뼈대요, 기본 골격이다.

자유가 많은 나라를 선진국이라 하고 자유가 억압당하는 나라를 후진국이라고 한다. 인간의 자유가 없는 나라일수록 제대로 된 나라가 없고 인간의 자유가 많은 나라일수록 제대로 되지 않은 나라가 없다. 청결한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산 사람들은 행복하고 자유를 억압당하고 사는 사람은 불행하다. 의를 행하면서 사는 사람은 항상 행복하고 불의를 행하고 사는 사람은 항상 불행하다. 인간이 아무리 큰 공간 안에 있다고 해도 의와 선을 행할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다면 그곳은 감옥이다.

참 자유는 선에만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영의 자유고, 정신의 자유고, 영혼의 자유다. 악을 거부할 자유, 악을 행하지 않을 자유, 자기가 자기를 창조할 자유다. 청결한 자유란 평화를 의미한다. 신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깨쳐주기 위해 오셨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은 자유한 인간이었다. 악으로부터 자유로웠고, 모든 필요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유를 잃었다.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부터 인간은 자유롭지가 않았다. 그냥 수치스러웠고 두려웠다.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하기를 원하신다. 자유는 하나님께서 누리라고 주신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유를 잃었을 때의 모습은 처참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를 찾아주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예수님 당시 유대 지배계급은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풍성한 자유를 누리고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의를 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님은 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이라고 책망했다. 예수님의 눈에는 그것들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들은 자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탐욕의 노예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진정으로 누려야 할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교만이라는 족쇄에 채워져 꼼짝도 못하는 자들이었다. 겸손이나 의를 향해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악취풍기 노예들이었다.

탐욕은 죄다. 철옹성 같은 감옥이다. 질투도 감옥이다. 원망도 감옥이다. 미움도 감옥이다. 교만도 감옥이다. 한 순간에 인간의 몸과 마음과 영을 꼼짝 못하게 가둬버린다. 한번 그 감옥에 갇히면 빠져 나올 수 없다. 자신들이 노예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무지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양심이란 육체의 사지와 같아서 움직이지 않으면 마비가 되고, 사용하지 않으면 굳어버린다. 바리새인들은 양심이 화인 맞아 바로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양심을 사용하며 살지 않았다. 탐욕과 교만이란 감옥에 갇혀서 탐욕과 교만을 사용하며 살았다. 그들은 더러운 죄악 가운데, 악취 나는 죄의 한 가운데, 각종 더러움이 가득한 곳, 천상의 빛이 들지 않은 그런 참혹한 감옥에 갇혔던 것이다. 주님은 그것이 그들의 실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알아듣지를 못했다. 믿으려 하지를 않았다. 인정을 하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두운 곳도 빛이 들어오면 환하게 된다. 캄캄한 돼지우리 같은 곳도 빛이 들어오면 바닥까지 드러난다. 그 바닥에 있는 더러운 오물을 비롯하여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탁탁한 공기며, 그것을 봐야 그 끔찍한 장소를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맹인이었다. 맹인에게는 빛이 소용없다. 그래서 빛으로 보여줘도 보지를 못했고 말을 해도 깨닫지를 못했다.

어떻게 인간이 탐욕에 지배받는 동물이 되었을까? 모든 것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관리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이 어쩌다가 그 모든 능력을 잃고 스스로 악을 끌어들여 그것을 섬기며 그것의 명을 받으며 그것들의 지시대로 사는 종이 되었을까? 왜 자기 마음에 감옥을 지어놓고 그곳에 갇혀서 돼지처럼, 뱀처럼, 사자처럼, 염소처럼 추하게 살고 있을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주님은 자유하게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인류는 진리를 통해 자유 할 수 있다. 자유 한 자가 되어야 자유롭게 무엇을 할 수가 있다. 탐욕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의를 행 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있다. 용서 할 수 있다. 탐욕이란 감옥에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용서 할 수 없다.

탐욕은 철옹성 같아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한번 갇히면 영원히 종으로 살아야 한다. 놔 주지를 않는다. 보내주지를 않는다. 인격도, 학문도 그 어떤 것으로도 그 감옥을 열수가 없고 부술 수가 없다. 이런 비참한 상항에서 벗어나려면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님은 탐욕을 부수는 능력이고, 힘이고, 방법이다. 주님은 진리다. 주님은 영생이다. 주님은 의다.

인간은 자유하다. 처음부터 자유하다. 악 때문에 잃어버린 자유를 주님이 찾아주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시 자유하다. 주님의 복음은 자유의 복음이다. 악에는 자유가 없다. 자유하기 의해서 악에서 떠나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외친 복음이다.